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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인내의 적극적 사랑 (고전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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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4-7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성공적인 가정생활의 길이 무엇일지 제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았는데, 말할 것도 없이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사랑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첫마디가 “오래 참고”입니다. 참는 것이 사랑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따뜻함, 달콤함, 짜릿함이 아니라 오래 참는 것입니다. 이 말은 7절 초두에 다시, 그리고 7절 말미에 또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사랑의 다른 특징들은 한 단어로 한 번씩만 표현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질투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성내지 아니하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그런데 참음에 대해서만은 4절에 “사랑은 오래 참고,” 7절 초두에 “모든 것을 참으며,” 7절 말미에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렇게 세 번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원래 한마디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묘사하려면 단어들이 많이 필요한데, 본문에서 “참음”이 세 번이나 언급되고 있는 것은 사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인내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기 위해서, 또 가정생활과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을 원만하게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참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난 한 주 동안 남에게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참았다면 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교회에 오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 ‘주일 아침이니까 월요일에 싸우자’하고 참았다면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을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2절)고 합니다. 왜? “이는 너희의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는 믿음에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성숙한 인내를 기를 수 없습니다. 결국 믿음을 통해서 인내를 키우게 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4절)는 무슨 뜻입니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인내심을 계속 더 계발하되 인내에는 전문가가 될 정도로 완전하게 개발하라는 말입니다. 인내는 고난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기쁨과 고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당한 고통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은 고통, 환란, 시련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우리는 성공적인 인생을 위해서 인내력을 길러야만 합니다. 특히 가정생활은 인내 없이는 절대 성공적으로 꾸려갈 수 없습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4절). 인생을 살아가는데 부족함과 모자람이 없으려면 인내력을 키워야 됩니다. 70대 후반의 할머니 서른 분께 “가정생활에서 무엇이 제일 중요합니까?” 물었더니 한결같이 “참아야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오랜 인생살이와 가정생활을 통해 참는 것을 배우신 것입니다.

  어느 젊은이가 좀 더 인내심을 갖도록 나이든 성도에게 기도를 부탁을 했습니다. 그 분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주여, 이 젊은이에게 아침에 큰 환란을 보내주시옵소서. 오후에도 환란을 주시고 저녁에도 밤에도...” 이 때에 젊은이가 급히 말렸습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환난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한 것이 아니고 인내심을 갖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잖아요.” 지혜가 많은 그 분이 대답했습니다. “아, 그런데 인내는 환난을 통해 배우는 법이라오.” 환난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도 기뻐합니다.

  인내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소극적 인내와 적극적 인내입니다. 소극적 인내는 이를 악물고 ‘참아야지, 참을 거야!’하면서 속으로 애를 태우고 얼굴이 일그러집니다. 이렇게 참으면 그만 한이 맺혀서 가슴에 돌덩어리가 하나씩 들어앉습니다. 옛날 할머니들이 그런 말을 하셨지요. “여기 내 가슴에 주먹만한 돌덩어리가 들어있어요!” 물론 그 돌덩어리는 엑스레이를 찍어도 나오지 않지요.

  성경의 사랑은 이런 소극적 인내가 아니라 적극적 인내를 말하고 있습니다. 훈련을 통해 성숙한 모습으로 참는 것입니다. 처음 참을 때는 힘이 들지만 두 번, 세 번, 네 번 참으면서 ‘내가 이번에도 잘 참으면 더 성숙해져서 앞으로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일을 당해도 문제없이 이겨낼 수 있게 된다!”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인내의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성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성령의 도움을 받아 참는 것이 믿음으로 참는 것입니다. 인내에는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4절을 봅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잠깐 동안은 사랑 없이도 참을 수 있습니다. 영어 번역이 잘 되어있습니다. “Love suffers” 즉 사랑은 고통을 이겨낸다는 말이지요. 그 다음 단어가 “long”입니다. "Love suffers long." 즉 사랑은 고통을 오래 감수해 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작은 고통을 감수합니다. 관계가 깨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성령의 도움을 받아 두 번, 세 번, 고통을 이겨나갑니다. 그리고 네 번, 다섯 번 고통을 참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이제는 고통이 다가와도 겁나지 않습니다. 전에는 고통당하는 것이 두렵고 겁이 났지만 이제는 걱정이 없습니다. ‘이제 내가 고통을 얼마든지 이기고 견뎌낼 수 있구나! 걱정하고 염려할 것이 없구나!’하며 성숙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 때마다 주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한 번, 두 번, 거듭 참아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는 것이 적극적인 인내, 즉 사랑의 모습입니다.

  오래 참는 모습은 바로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출애굽기 34장 6절에 보면 하나님이 친히 모세에게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long suffering)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한다”는 말은 “고통을 오래 참는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고통을 끌어안고 나아가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오래 참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은 벌써 이 땅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광야생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얼마나 못되게 굴었습니까! 아무리 선지자들을 보내어 타일러도 그들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민족과 참 비슷해요. 만약 하나님이 오래 참아주시는 분이 아니라면 우리 민족도 노아 시대처럼 “도저히 안 되겠다”하고 싹 쓸어버리셨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고 우리를 오래 참아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께서 참고, 참고, 또 참고 기다려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은 다음에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곁길로 갈 때가 있습니다. 만약 그런 때마다 하나님께서 진노의 채찍을 드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깨달을 때까지 참고, 또 참아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자기 백성들을 향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참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에, 나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일도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참고 사랑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 저를 참아주신 것처럼, 저도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을 닮아 제 가족과 친구와 교우들을 오래 참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오래 참는 것이 사랑입니다.

  오래 참음은 예수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자기 앞에 놓인 기쁨을 위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뎌 내시사 하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니라”(히12:2). 예수님은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품성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10:22). 인내가 곧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너희의 구원이니라”(벧후3:15).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시고 모두가 다 하나님께 돌아와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인류를 향해, 여러분을 향해 오래 참아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완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서지 않은 분이 있다면, 이 시간에 돌아서십시오. 하나님께서 왜 오늘까지 여러분을 향하여 그토록 오래 참으셨습니까?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도록 이 시간까지 오래 참아 주셨습니다. 지금 반드시 하나님 쪽으로 방향을 돌리십시오.

  오래 참음은 또한 성령님의 모습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의 성령의 열매 가운데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이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오래 참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오래 참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우리 한국 사람들은 삼세번 이상은 못 참습니다. 삼세번 참아주는 사람도 아주 괜찮은 사람이죠. 그 이상은 안 됩니다. “이제는 더 못 참아!” 그런데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다시 한 번 여러분의 귀에 대고 “한 번 더 참아. 내가 도와줄게!” 하십니다. 성령의 열매로 우리가 참을 수 있게 됩니다. 가족에 대해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는 그 순간에 “성령님이여, 저를 도와주옵소서. 제게 참을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시고, 인내를 훈련하게 하옵소서.” 간구하면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참는 사랑을 주실 것입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가능합니다.

  오래 참음은 또한 많은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longsuffering)을 옷 입으라." 성령께서는 오랜 고통을 참고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믿는 자들에게 주십니다. 인내가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슴속에 이 성령의 은혜를 주셔서 여러분의 삶 속에 오래 참는 사랑, 참음으로 이기는 사랑이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것 없이는 가정생활을 성공적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남의 집 식구는 속상하면 그냥 돌아서서 안 보면 됩니다. 이쪽으로 오면 다른 곳으로 피해갈 수도 있어요. 하지만 자기 가족은 돌아설 수가 없습니다. 아내를, 남편을, 자식을, 부모를 어떻게 버립니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여러 번 말하고 빌기도 하고 협박까지 해도 변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참아야 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도 참으시고, 성자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참으시고, 성령님도 참으시며 우리의 참는 것을 도와주십니다.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품성 가운데 오래 참음이 들어 있습니다. 목회자의 특징입니다 (딤전 3:10). 우리가 경험한 것입니다. “내가 자비를 받은 것은 내 안에 먼저 그리스도 예수께서 영원한 생명을 위해 그를 믿으려 하는 자들에게 오래 참음을 보여 주셨다.” 믿는 자의 특징은 사랑인데, 사랑이란 짜릿한 것도 달콤한 것도 아니요, 그저 참아주는 것입니다. “주여, 참음으로 모든 것을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기도가 우리 입술에 있기를 원합니다.

  본문 7절을 보십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Love bears all things). 사랑은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골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처럼 생겼으면 그냥 품어준다는 겁니다. 우리 고향사람인가, 나랑 성격이 맞겠나, 느낌이 통하겠나, 이런 것을 따지면 골치 아파요. 이 세상에 사람이 몇 명인데 어떻게 골라서 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쉽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사람이면 그저 못 본척하고 편안하게 다 품으라고 하십니다.

  사람을 사랑하면 인생이 재미있습니다. 왜? 사람은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나와 아무 상관이 없어도, 사람들의 걷는 모습, 웃는 모습이 나와 다르니까 재미있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얼마든지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사람을 싫어한다면 큰일입니다. 어디를 가도 사람이 있는데 어디로 도망을 치겠습니까? 한적한 곳으로 휴가를 가도 거기에 사람이 더 많아요. 사람을 고르지 않고 그대로 품을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을 갖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4:5)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큰마음을 가졌으니 그저 관용하고 품으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내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각을 세워봤자 밥 먹은 거 소화만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단점과 장점, 있는 모습 그대로를 품는 능력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제대로 안 되면 고생을 많이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품는다” 할 때 여기에는 사람만이 아니고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도 포함합니다. 내게 질병이 닥쳐와도 “어, 너 오래간만에 왔구나!” 하면서 사랑으로 품어서, 가슴속의 사랑 때문에 병균마저 힘을 못쓰고 죽어 질병을 이겨낼 수 있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사고가 나고 어려운 일이 생겨도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어?” 하며 그 사건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만 죽습니다. 환경과 여건이 어떠하든지 내 인생에 일어난 일이라면 ‘하나님의 섭리가 있겠지! 지금은 이해가 잘 안 되지만 이것을 통해서 나를 더 정금 같이 빛나게 할 것이고,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 이렇게 성경대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모든 일들을 수용하는 넓은 마음을 갖기 바랍니다. 그것이 사랑이요, 거기서 위대한 역사들이 나옵니다.

  끝으로, 7절 말미에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Love endures all things). 사랑은 끝까지 참아낸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어떤 갈등과 어떤 어려움을 겪더라도 결국 성령의 도움으로 승리하리라!” 이런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최후 승리 때까지 십자가를 붙들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에스더도 그랬습니다. “나의 민족의 멸망을 어떻게 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 하고 자기 민족이 노예상태에서 해방될 때까지 끝까지 기도하고 인내하면서 민족애를 보여주었습니다. 에스더는 결국 자기 민족을 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패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망할 수 없습니다. 넘어진 것 같아도 다시 일어납니다. “우리가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 (고후 4:8-9). 예수님처럼 최후 승리 때까지 모든 사람과 모든 사건과 모든 형편을 참고 품고 끝까지 이겨냅시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이 여러분의 삶 속에 충만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김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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