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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모와 자식 (창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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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두 가지로 가능합니다. 하나는 혈연관계입니다. 내가 낳은 자식은 혈연으로 맺어지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는 법적인 관계입니다. 혈연관계가 없을지라도 입양을 통하여 법적으로 자녀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렇게 혈연관계와 법적 관계, 이 두 가지가 성립이 될 때 진정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됩니다.

  구라파나 미국에서 우리 아이들의 입양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입양을 할 때 법적으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맺지만 거기에 숨어있는 입양조건이 법적으로 구체화되어 있다고 합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하나는 이 아이에게 상속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여서 입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는 생부모가 훗날에 나타나고 이 아이가 그 부모를 찾기 원할 때는 언제든지 부모를 찾아준다는 조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서구인들은 입양에 있어서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애아들을 입양하는 그 정성은 아주 깊은 사랑입니다. 그러면서도 상속은 하지 않는다, 생 부모가 나타날 때는 이 아이를 돌려준다는 법적인 조건은 굉장히 냉철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른 정과 낳은 정에 대해서 집착력이 아주 강합니다. 언젠가 병원에서 바뀐 아이가 성년이 되어 가지고 바뀌었다는 게 발견되고 그 부모들이 서로 만나게 되고 그 자녀들도 알게되어 안타까움을 나누게 되었는데 길은 부모는 아이를 길은 정성과 거기에 대한 감정 때문에 이 아이를 돌려줄 수 없는 애착을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사랑과 감정과 법적인 한계를 뒤섞어 가지고 법도 감정으로 해석해 버리고 사랑도 감정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엄연히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혈연과 법적인 이 두 가지 조건이 맞을 때 완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혈연과 법적인 관계 이상의 의미를 우리 앞에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관계요 믿음의 관계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믿어야 합니다. 자식도 부모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 ‘품안에 있는 자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품안에 있는 자식은 귀엽습니다. 내 말을 잘 들어줍니다. 그런데 말을 하고 걸음을 걷고 나이가 먹고 자라가면 그만 부모를 한숨짓게 하는 일들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식을 믿어야 합니다. 자식이 기대에 못 미치는 행동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부모를 실망시키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해야 되고 믿어야 하는 관계입니다.

  또 자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 품에 있을 때는 우리 부모가 이 땅에서 최고인 줄 알았는데 자라서 남의 부모도 알게 되면서부터 ‘우리 부모가 참 못났구나’ 하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부모의 약점을 보면 ‘내 인생에 성공을 보장할 수가 없다’ 이렇게 운명론적인 생각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나를 실망시켜도 자식은 부모를 믿어야 하고 자식이 부모를 실망시켜도 부모는 자식을 믿어야 합니다. 그 관계가 성경이 가르치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믿을 수 없는 명령

  본문에 나타나는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의 이야기는 굉장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한 다섯 가지 주제로 설교할 수 있는 깊은 의미가 있는 본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한 부분만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백 세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몸에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자라서 15살쯤 되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청천벽력같은 명령을 주십니다.

  2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15살이 되도록 자란 그 아이를 이제는 죽여서 내게 번제로 바치라는,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동의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7-19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믿음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백 세 때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은 “네 몸에 날 이 씨가 진정한 약속의 아들이라. 이 아들로 인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의 아들이 죽어버리면 하나님의 약속이 부도가 나 버립니다. 그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도저히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약속의 아들이 죽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약속의 아들을 죽이라고 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고 했습니다.

  이 아들을 지금 내가 죽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이 아들을 다시 살려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내가 이 아들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죽이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내가 죽인 이 아들을 다시 살려서 기어코 하나님 자신의 약속을 이루실 줄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믿음의 비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아들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리고 삼일만에 살렸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메시야 되신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을 믿고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리고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아브라함도 내가 이 아들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일이기 때문에 죽이지만 하나님은 자기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아들을 살려내실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 믿음의 비밀이 우리 앞에 알려집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되 아들을 주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여러분, 금년 한 해 살아오면서 건강을 얻은 사람도 있고 사업의 형통함을 입은 사람도 있고 자녀들이 뜻하는 일을 이룬 사람도 있고 여러 모양으로 감사할 일들을 많이 경험한 줄 압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에게 있는 감사의 조건들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아주 신중하게 판단해야 될 점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이삭을 믿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준 아들이 얼마나 귀하냐, 이삭 너는 귀한 아들이야, 너는 하나님이 약속의 아들로 네게 주었어’ 하고 이삭에게 집착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이삭을 주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믿음이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이 아들은 축복의 아들이지만 이 아들을 주신 여호와가 먼저요 이 아들을 바치라고 하신 그 하나님이 먼저라는 것을 아브라함의 믿음에는 자리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이 가졌던 이 믿음의 비밀은 우리가 본받고 성숙해 가야 할 모범입니다.

  순종의 길을 떠남

  이제 두 부자의 대화를 들어봅시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두 종과 더불어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준비하여 아들 이삭과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그곳은 브엘세바입니다. 하나님이 모리아 땅으로 가라고 했는데 모리아 땅은 성경에 두 곳밖에 언급이 안된 신비로운 땅입니다. 모리아 땅은 오늘날의 예루살렘으로 칭합니다. 그리고 그 모리아 땅에서 내가 지시하는 한 산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 산은 바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산이라고 합니다. 그 성전산은 하나님의 법궤가 옮겨졌던 곳이요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던 곳입니다. 그러므로 골고다가 있는 그 성전산은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2000년 전부터 하나님이 지시하신 속죄의 산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산으로 보냈는데 3일길을 갔다고 했습니다. 브엘세바에서 예루살렘은 72㎞입니다. 그 당시에 나귀를 몰고 짐을 싣고 길을 떠나면 삼일길이 충분히 되는 곳입니다. 드디어 모리아 땅에 왔습니다. 눈을 들어보니 산이 보였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두 사환을 보고 “너희들은 이곳에서 머무르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들에게로 돌아오리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 지점이 모리아산 5㎞지점 정도된다고 주석가들은 말합니다. 4, 5㎞ 전방에서 아브라함은 두 종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아들과 함께 모리아 산을 향하여 이제 또 다른 여행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들 이삭이 번제에 쓸 나무를 매고 가다가 아버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버지, 번제에 쓸 나무는 여기 있는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버지가 받아들이기에는 대단히 무거운 말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번제할 양을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렇게 대화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사건의 하이라이트를 주목해야 됩니다.

  9절에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모리아산에 왔습니다. 아브라함이 단을 쌓고 단위에 나무를 벌여놓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결박하여 올려놓고 칼로 이 아이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여기에 표현되는 이 이야기는 간단하지만 단을 쌓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모되어야 합니다. 나무를 벌여놓는 것도 상당한 작업입니다. 아들을 결박하는 문제는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우리가 깊이 묵상을 해보면 그야말로 상상할 수 없는 과정이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의 과정

  여러분, 이삭은 지금 나이가 한 15살쯤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15살의 노인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장면은 단번에 이루어진 장면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이 아들을 단에 결박하여 올리기까지 아브라함에게 있어선 4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삭에게 보면 15년의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15년동안 자라왔던 이삭이 아버지의 말씀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그 순간의 감동이나 충동이 아니라 15년동안 아버지를 사랑하고 신뢰했던 그 과정이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런 말로 한번 대사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이삭아, 하나님께서 지금 너를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다. 아버지는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너를 결박하여 칼로 죽일 것이다. 그러나 너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너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다. 만약 내가 내리치는 칼에 네가 죽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를 다시 살려주실 것이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해야 돼. 내 아들 이삭아” 하는 이런 대사를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삭을 주목해야 됩니다. 이삭이 아버지가 말씀하신 것, 아버지가 행동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 이삭은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습니다. 노인 아버지는 자기를 결코 붙잡지 못합니다. 심지어 자기를 결박하는 그 아버지를 향하여 줄을 빼앗아 아버지를 도로 묶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노인이 지금 제 정신이 아니구나, 큰일났구나. 아버지를 단속해야 되겠다’며 도리어 줄로 아버지를 묶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아들 이삭은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묵묵히 묶여서 단위에 올려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부모와 자식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믿음의 비밀을 발견해야 됩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믿었습니다. 아들 이삭은 아버지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부자간의 신뢰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삭은 아버지의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하나님을 순종하기 위하여 자기를 죽이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를 믿었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을 사랑합니다. 아들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을 주신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믿음과 아들의 믿음의 일치점은 하나님을 믿는 데에서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7절 이하에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 세가 되어 자기 몸에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에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연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세 가지를 믿음

  여기서 중요한 게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여러분, 막연히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무엇 무엇에 대한 하나님을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 믿으십니까? 우리를 죄에서 속죄하여 주신 구원의 하나님으로 믿으십니까?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그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계시한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범신론적으로 막연한 신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 가운데 있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은 속죄의 하나님이고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은 창조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자기에게 아들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태가 죽었는데도 그 아들을 주신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아들과 약속된 천하만민이 이 아들로 복을 받으리라고 하는 메시야 예언을 믿고 있습니다. 또 그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까지 믿고 있습니다. 그 믿음은 시종일관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결박하여 놓고 칼을 들어 찌르려는 그 순간에 ‘주여, 믿습니다’ 하고 믿은 게 아닙니다. 믿음이 그렇게 마술적으로 오는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네 독자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은 그 때부터 아들을 죽이려는 그 자리까지 동일한 믿음으로 역사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성경에 중요한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5절에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두 사환에게 ‘너희들은 여기 있으라, 내가 이 아이와 함께 가서 경배하고 돌아오리라’ 이 말을 했는데 우리말 번역에는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히브리어 공부를 하면서 이 구절만큼 히브리어의 오묘함을 맛본 구절이 별로 없습니다. 그만큼 히브리어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경배하고 돌아오리라” 이 말을 했는데 히브리어 원문에는 인칭대명사가 들어 있습니다. 즉 일인칭 복수대명사입니다. 그대로 번역하면 ‘우리가 경배하고“(나와 아들이 경배하고) ’우리가 돌아오리라‘(나와 아들이 돌아오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서 아브라함은 아들을 죽일지라도 하나님이 살려주셔서 둘이 돌아온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영어성경에도 이 표현이 생략되어 있는 게 많은데 어떤 성경에 보니까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We may worship'(우리가 경배하고) 'and may return'(우리가 돌아온다) ‘to you'(너희들에게) 아브라함은 이 아들과 함께 행진을 하면서도 이 아들은 내가 죽일지라도 하나님이 살려주신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이 아들을 하나님께 바쳤던 아브라함입니다.

  순종으로 온전케 되는 믿음

  그런데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에게 말씀한 그 핵심은 무엇입니까? 이 사건이 우리 앞에 가르쳐 주는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순종으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명령을 받은 것으로 완성된 게 아닙니다. 이 아들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순종으로 완성되고 있습니다.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신 것으로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완성된 것입니다. 메시야의 순종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완성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자리로 나아갔고 증거를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믿음이 의로 여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을 이 메시지를 통하여 살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결박하여 칼을 들이댈 때 그 아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그 자리까지 갈 때 아브라함은 그 아들에게 신실한 아버지로 보여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버지가 칼을 들이댈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아들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이삭이 평소에 아버지의 믿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말씀할 때, 아버지가 행동할 때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로 아브라함의 믿음이 성숙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의 행동을 받아들이고 있는 아들의 믿음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믿음이 아니라 아버지를 통하여 받은 성숙함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의 결정적 요인은 순종입니다. 그러나 그 순종이 가능할 수 있도록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여기는 부모님들도 계시고 자식된 사람들도 함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부모의 영원한 자화상입니다. 오늘 부모된 우리들은 내 말 한마디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알고 순종해 줄 수 있는 아들이 될 만큼 내가 아들 앞에 믿음의 모범이 되었던가? 내가 권위를 가지고 있는 아버지였던가? 아버지의 자화상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자식된 우리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내가 성숙한 자리에서 부모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 제가 30년 전에 개척했던 교회에 가서 총회회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감회가 깊었습니다. 가보니까 그 당시에 내가 일했던 자리는 흔적도 없고 내가 설교했던 강대상이나 그때의 비품이 한 가지도 없었습니다. 내가 살던 사택도 흔적도 없고 30년 전의 내 흔적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했는지 하나도 증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30년 전에 그 교회를 섬겼던 그날의 수고, 그날의 열정이 지금 내 안에 다 있었습니다. 그때그때 내가 일했던 이용호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이용호가 있는 것입니다. 지나온 30년의 세월이 내 안에 다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삼손을 보십시오. 삼손은 위대한 사사입니다. 그러나 삼손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타락을 했습니다. 드릴라의 꾀임에 빠져서 그는 하나님의 계율을 어겼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블레셋의 우상을 받아들였습니다. 여자와 더불어 그는 퇴폐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 결과로 머리가 깎이고 눈이 빼이고 쇠사슬에 묶여 물맷돌을 돌리면서 블레셋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어 있는 삼손의 몰골은 그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다는 자화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그렇게 된 게 아닙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과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맺는 말

  여러분, 종교는 원래 말이 많습니다. 기독교도 말이 많습니다. 그런데 불교도 말이 많습니다. 불교는 설법이 아주 장황합니다. 성경보다 불경은 더 장황합니다. 큰스님들의 설법을 제가 TV로 보았습니다. 글자 몇 자 적어놓고는 그렇게 말이 많았습니다. 그것도 글자 하나 적어놓고 끝없는 설법이 나오는 게 불교입니다. 그런데 불경은 석가모니가 죽고 난 600년 후에 제자들이 구전을 모아서 만든 게 것입니다. 사실 석가가 직접 말한 게 아닙니다. 죽고난 지 600년 후에 만들어진 게 불경인데 그것을 보면 성경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바로 사도들이 이 말씀을 받아서 기록을 했습니다. 석가가 죽고 나서 600년 후에 만들어진 것을 가지고 말이 많은 게 불교입니다. 그래서 불교계에서 자성이 일어났습니다. 너무 불교이론이 장황하고 끝이 없으니까 이제 우리 말하지 말고 바로 살자고 나타난 불교가 선불교입니다. 선불교는 설법을 하지 않습니다. 참선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말하지 말자 했던 선불교도 또 말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구별이 있습니다. 앞의 불교는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선불교는 바로 살자는 말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가 차별이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봉하지 않는 이교, 불교의 진리도 행함이 없으면 성립이 안됩니다. 너무 말만 하지 말자, 말없이 바로 행하자 라고 하는 게 선불교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 믿음은 어떤 믿음이 되어야 합니까? 아브라함과 이삭이 모리아 제단에서 보여준 이들의 순종을 염두하고 야고보 선지자는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하여졌느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금년 안에 순종에 미달했던 우리의 믿음은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믿음의 열매가 충실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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