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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의 확실성 (롬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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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때 불확실성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는 전문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속한 일들은 모두 다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확실성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여호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모두 다 확실합니다. 성경에 약속된 수천 가지의 약속은 한 가지도 예외 없이 모두 다 확실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만 하시는 신이 아닙니다. 그 분은 말씀을 하시고 그것을 다 이루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하심은 모두 다 확실성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구원 문제에 대하여 우리에게 이런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2)고 말씀하십니다.

  완성된 구원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 편에서는 완료된 일입니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다"고 할 때 하나님 편에서는 구속된 것입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할 때 지명된 것이고 부른 것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고 할 때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편에서는 구원이 완성된 것이고 또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원을 받아들이는 우리편에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합니다. "내가 너를 지명했다"는 것을 어떻게 믿는가? "나를 불렀다"는 것을 어떻게 믿는가? "너는 내 것이라"는 것도 어떻게 보장하는가? 구원받는 우리편에서는 모든 것이 다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의 과정이 있고 예수를 믿는 과정이 있습니다. 당장 예수 믿고 당장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수많은 세월을 믿음으로 살아야 되고 예수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다가 하나님이 부르실 때 하늘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들은 신앙생활의 과정이 형성됩니다. 이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간증입니다. 우리가 간증하는 것은 예수 믿고 살아온 것을 간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데는 간증을 생략하십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면 이제 우리는 과정이 어떠하든지 주님의 것이 되어진 것입니다.
  이제 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 편에서는 확실성을 가지고 우리들을 이끌어 가십니다.

  어떤 조각가가 여행을 하는 중에 한 동네 모퉁이에 이르렀는데 나무가 불에 타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까 상당히 좋은 목재가 불에 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조각가가 불타고 있는 나무토막을 끄집어내었습니다. 그리고 불을 끄고는 타다 남은 나무토막을 다듬어 작품을 만들었는데 훌륭한 비너스 상이 만들어졌습니다. 불이 탈 때는 아무도 이 나무가 비너스 상이 되리라 생각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 조각가의 눈에는 그 나무가 얼마든지 비너스 상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믿었고 가지고 와서 작품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조각가는 그 나무를 절대로 버리지 않습니다. 버릴 것 같으면 불타는 가운데서 끄집어내지 않습니다. 멋진 조각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확신이 있기 때문에 조각가는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구원은 선착순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묵상해 볼 때 이보다 더 신비로운 진리가 없기 때문에 사람의 말로 구원을 설교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을 믿고 살다가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께 확인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신비로움이 구원의 진리 안에 무궁무진하게 포함되어져 있습니다.

  구원받는 것은 선착순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출발을 해서 선착순으로 여기까지가 구원이고 그 이하는 버린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선착순에 미달을 해도 끝까지 구원시키시는 하나님입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부른 이상 너는 내 것이 된다, 내가 아무리 주의 것이 안 되려고 몸부림을 쳐도 결국은 주의 것으로 만들고야 마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방법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여기까지 이른 것입니다. 자격과 조건이 되어서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선착순의 미달 자들입니다. 우리는 쓸모 없는 죄인이며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기어코 구원의 자리로 이끌어 오십니다.

  본문 3∼4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을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 우리에게 환난이 있어도 인내케 하고 연단을 시켜서 마침내 소망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찌어다"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분 편에서는 완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완결됨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결과로 하나님 앞에 찬양하고 살아야 합니다.

  얻었은즉 누리자

  본문 1∼2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완료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구원받았는가 안 받았는가에 머물지 말고 구원받았기 때문에 화평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화평을 누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구원에 대해서는 확신을 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한 이상, 너는 내 것이라고 한 이상,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상 우리는 이미 구원의 확신에 이른 것입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방황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2절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에도 '얻었으며' 완료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우리는 이제는 화평을 누리고 바라고 즐거워하는 일만 남아있습니다.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은 구원의 기쁨, 확신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떤 때에 구원하셨는가? 우리가 구원받은 실체를 보시겠습니다.

  6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연약할 때' 이 말은 제일 실감있게 말하면 전신마비되어 있을 때에 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못하는 존재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였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죄인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의도와 빗나간 삶을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지 못하는 인생, 그런 인생일 때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10절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원수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존재를 말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고 감사하지도 못하던 연약할 때,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살지 못하던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던 원수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심할 필요가 없고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죄인이었고 원수되었다는 이것을 한마디로 묶어서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두 가지입니다. 죄를 짓는 죄인이 있고, 죄를 안 짓는 죄인이 있습니다. 마비되어 연약해 있다, 하나님을 느끼지도 못하고 부르지도 못한다는 것도 죄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지 못하는 것도 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도 죄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말을 하기 전까지는 적어도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을 하기 시작할 때부터 이 천진난만한 아이도 거짓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이 죄 공부를 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날 때부터 죄 박사학위를 받고 태어납니다. 말할 줄 모르는 애가 거짓말을 안 했다 할지라도 말을 하게 되면 거짓말을 합니다. 행동으로 죄를 짓지 않는 그 어린아이들이 다 커가면서 행동으로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인은 죄를 안 짓는 죄인과 죄를 짓고 있는 죄인으로 구별은 되지만 이것이 묶어져서 전부 다 죄인입니다. 구원받지 않고는 소망이 없는 존재입니다. 이런 죄인을 주께서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담가문에서 예수가문으로

  12절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음으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몇년 전 '가문의 영광'이라는 영화가 히트를 치고 있는데 우리의 가문이 어디입니까? 아담가문입니다. 아무리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습니다. 이 가문은 중요합니다. 가문에 태어나면 그 가문의 성을 받고 살아야 됩니다. 그 가문의 전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담가문의 자손들입니다. 우리 조상 아담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그 죄를 지은 가문에 태어난 우리도 전부 죄인입니다. 이것을 대표원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새로운 가문으로 이적을 시켰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흥미로운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시작이 아브라함부터 시작합니다. 아담부터 시작하지 않고 아브라함부터 시작합니다. 구원의 족보는 아담부터 시작하지 않고 아브라함부터 시작됩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부터 시작되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면 "예수 그리스도가 나시니라"고 했는데 "요셉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나시니라"가 아니고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요셉의 가문에서 태어난 아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요셉의 힘을 빌어서 난 아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족보에는 죄인 된 아담이 스며들 자리가 없습니다. 요셉이 그 자리에 스며들 자리가 없습니다. 요셉의 힘을 빌어 예수님이 났다면 메시아가 아닙니다. 사람의 아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로 났습니다. 이것은 구원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프로젝트에 의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완료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하나님의 프로젝트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을 여호와 하나님 편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무효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도 우리의 구원을 취소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는 이것은 취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보증하고 약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참 신이시기 위해서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을 취소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만큼 확실한 것입니다.

  불안한 구원

  얼마 전에 한 목사님이 자기 교회의 한 성도의 문제로 상담을 해 왔습니다. 매우 신실한 가정이었는데 '구원파' 라는 이단에 빠졌습니다. 아무리 설득하고 달래고 그 사람들을 구출해 보려고 노력을 해봐도 자기 힘으로 되지 않았습니다. 20여 년간 목회를 한 중견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때 이 목사님은 자신이 목사로서 이단에 빠진 한 성도의 가정을 이끌지 못하는 것에 무능함을 느끼면서 좌절감이 왔다고 합니다.

  제가 그분에게 한 마디 비법을 알려드렸습니다. "목사님, 그 성도에게 가까이 가서 대화를 해 보시면 구원관에 허점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것을 가지고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그 성도에게 구원파에 가서 구원받은 확신이 있는가? 기쁨이 있는가? 그것을 진단하십시오, 분명히 확신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에 대하여 의심하고 방황하고 걱정을 하고 있는 그것을 붙잡고 목사님이 파고들어 가야 됩니다"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이것은 여러 사람에게 일러준 비법인데 틀림없습니다. 이단 사이비에 물든 사람들은 모든 면에 우리보다 잘 되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 구원문제만은 불안합니다. 그들은 예수로 구원받는다고 하면서도 자기들이 요구하는 것을 더해야만 구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거의 예외가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받는 것으로만 끝내야 되는데 거기에 '더하기 무엇을 하라'고 합니다. 이름도 없는 선교를 들먹이면서 재물을 바치게 합니다. 보증을 서게 합니다. 공덕을 요구합니다. 당신은 이것만 더 하면 완전해진다고 합니다. 구원받기 위해 그런 헛수고를 하다가 올무에 걸려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계획 이것만으로 확신하고 받아들여야 됩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무엇을 더 한다는 것은 기독교가 가르치는 구원이 결코 아닙니다. 아마도 그 목사님이 그 방법으로 접근을 하면 성령께서 지혜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 방법 외에는 이단에 빠진 자들을 설득시킬 방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설득시키려고 달려듭니다.

  전적 은혜로 얻은 구원

  왜 구원의 확신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신앙생활의 본질은 구원의 확신에서 이루어집니다. 내가 구원받은 이것이 기쁘고 즐겁고 의미가 있고 흔들 수 없는 확고한 기반이 되어야만 그 다음에 영적인 문제가 성화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족관계에 있어서 날마다 확인한다면 그런 비극이 없을 것입니다. 당신이 내 남편이 맞습니까? 당신이 내 아내가 맞습니까? 당신이 내 부모가 맞습니까?

  자식이 부모를 의심할 때 논리적으로 설들을 시키지 못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도 그런 논리로 의심하고 나가면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원만은 인간이 전혀 토론을 못하도록 전적으로 은혜로만 주신 것입니다. 선물로만 주신 것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어떤 이의도 못 달고 할 말이 없도록 구원받을 존재가 안 되는 우리들을 전적 하나님께서 구원받는 존재로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석차에 미달이 되어도 계속 참으셔서 기어코 믿는 자리로 이르게 하십니다.

  한국의 막가파 엄마들이 우리 사회에 큰 공을 세우면서도 큰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한국의 교육수준을 높이는데 막가파 엄마들이 공헌을 했다고 합니다. 가정에 고3생이 있으면 고3생 종교가 형성이 된답니다. 고3생 아이가 집에 들어오면 전 가족은 침묵의 시간으로 엄마가 다스리고 그 시간부터 엄마는 아이들의 간식을 갖다대는 풀 서비스를 해야 합니다.

  저도 과외교사를 3, 4년간 했지만 과외를 시키면 틀림없이 성적이 오릅니다. 본인의 성적보다 틀림없이 더 나은 성적이 나오는 것이 과외입니다. 그래서 기본 성적으로 대학에 갈 수 없는데 과외를 잘 하면 실력이 붙어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서 상당수 학생들이 문제가 됩니다. 괴외를 통해서 원하는 학교에 들어왔는데 기본이 미달되어 공부가 안 되는 학생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황을 하는 것입니다. 실력은 안 되는데 학연, 인맥 등을 타고는 좋은 자리에 앉을 수는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함량미달의 신자가 아닌가?

  오래전 TV에서 방영된 '왕건'이라는 드라마에 '궁예'라는 사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궁예는 역량은 미달하는데 그의 자리는 왕입니다. 실력이 밑돌고 인격이 밑돌고 능력이 밑도는 사람이 왕이 되니까 그 나라가 어떻게 됩니까? 모든 사람이 적이 됩니다. 조금만 탁월하면 내 자리를 빼앗을까 해서 왕비까지 죽입니다. 모든 사람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능력 이상의 자리에서 영광을 누리고 있을 때 사회는 병들고 망가진다는 것입니다. 궁예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왕으로서 함량 미달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처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이런 역현상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믿음은 없으면서 구원의 기쁨은 없으면서 우리가 주님 앞에 너무나 중요한 일을 맡고 있지는 않습니까? 맡았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은 되지 않습니다. 감당을 해야 됩니다. 구원의 기쁨을 가진 자로서 이 일을 감담해야 되고 구원의 확신 속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면서 바라고 즐거워하면서 이 사명을 감당해야 됩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 가운데는 너무도 많은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불확실성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약점이 불확실성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뛰어 넘어가야 됩니다.

  맺는 말

  하나님이 결론을 내려놓은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을 어떻습니까? 하나님부터 계산하고 분석합니다. 그분의 약속을 계산하고 분석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게 따져들고 있습니다. 구원의 확실성, 이것은 어떤 은사보다도 더 소중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확실성 안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성령 충만한 자리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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