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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주일] 눈으로 보는 성령 충만의 모습 (행 2: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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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선교를 위해 크게 쓰임 받은 허드슨 테일러는 무력했고 연약했던 사람입니다. 먼 훗날, 테일러의기도가 완전히 응답받고 선교부의 개척자들이 중국 내륙 지방 깊숙이까지 들어가 방방곡곡 전도를 하고 있을 때 스코틀랜드 교회 소속의 한 지도자는 테일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생님을 크게 사용하셔서 가끔 자부심이 들 때도 있으시겠습니다.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선생님만큼 큰일을 하신 분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테일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연약하고 가장 작은 사람을 찾으시다가 저를 발견하시고 사용하신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귀히 쓰시기 위해 때로 약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임합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 더욱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강한 자보다 연약한 자를 요긴하게 사용하십니다. 성령님은 연약한 자에게 능력으로 임하십니다. 능력 있는 자, 강한 자는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능력 있는 자나 강한 자에게 역사하실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그토록 뜨거웠던 초대교회도 모든 것이 원만하거나 완전했던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을 읽어가다 보면 6장에서 구제문제로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충돌하게 되는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는 곳에도 항상 문제가 따른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로 인한 부작용들에 대처하는 능력도 생기게 됩니다. 성령 받은 교회와 제자들의 모습을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의 삶을 보면 어떤 마음의 소유자인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성도들의 삶을 보면 성령 충만 받았는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성령강림 주일을 맞이하여 성령 충만 받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기도하는 모습
  본문 42절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전혀 힘쓰니라’의 동사는 미완료과거형으로 어떤 행동 방침에 전심전력을 다하여 지속적으로 기도하였음을 뜻합니다. 이미 성령충만함을 받으신 분이라도 기도에 힘쓰지 않으면 감격과 능력은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성령 충만을 체험했던 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지속적인 기도 생활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 충만했던 믿음을 잃어버리고 다시 메마른 삶을 살아갑니다. 불붙는 장작 중에 하나만 따로 떼어 두면 금방 꺼져버립니다. 개인기도와 합심기도는 필수적이고 중요합니다. 기도의 불이 꺼지면 모든 것이 다 꺼져 버립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안 됩니다.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교회와 성도가 범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는 기도교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기도와 정비례합니다. 기도해야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기도가 부족하면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부인하고 칼을 휘두르는 혈기를 부리게 됩니다. 뜨겁게 기도하는 것이 성령 충만의 모습이며 성령 충만할 때 뜨겁게 기도하게 됩니다.

  오래 전에 최경주 골프선수가 방송에 나와 인터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PGA 경기를 하면서 어려운 목회자를 만나면 차를 사주기도 하고, 어려운 교회에 헌금도 하고 간증도 종종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기자가 최경주 선수에게 물었습니다.
  “체력관리를 어떻게 하시나요?”
  “전에는 힘들게 운동을 하고 오면 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쉬는 것이 제 몸에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게임을 하고 와서 피곤하더라도 헬스클럽에 가서 근육운동을 합니다. 근육이란 늘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긴장을 유지해야 합니다. 플레이하는 동안 사용한 근육을 운동을 해서 다시 보충하는 것이죠.”
  그의 말을 들으면서 우리 신앙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응답이 나타납니다. 결혼을 위해 기도했더니 좋은 남편과 아내를 주셨습니다. 자식을 위해 기도했더니 좋은 학교에 가게 되었습니다. 사업을 위해 기도했더니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더 이상 기도할 필요도, 하나님을 의지할 이유도 없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 신앙인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해서 응답받으면 그것으로 게임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여러분의 삶 가운데에도 하나님께서 많은 것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 다음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어떠한 경우라도 기도하기를 쉬지 말고 계속적으로 기도하는 성령 충만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사랑하는 모습
  본문 44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 상호간에 이루어진 영적인 일치는 서로 필요한 물건을 공유하는 생활의 형태로 표출되었습니다.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는 공산주의와 같은 방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물건을 서로 사용하였고 공동의 유익을 위하여 재산을 내어 놓았습니다.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은 욕심이 배제되어 오직 사랑의 원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랑하면 네 것 내 것이 없습니다. 우리들의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개인의 욕심이 나타나면 와해됩니다.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나보다 먼저 남을 생각하는 사랑이 있을 때 어떠한 환난 가운데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은 사랑의 모습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됩니다. 스데반과 예수님이 죽음 앞에서 용서와 사랑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번은 담임목사님이 교회학교 학생이 가는 것을 보고, 그 아이를 불러놓고 이런 저런 말을 건넸습니다. 그러다가 이 아이가 얼마나 교회학교에서 교육을 잘 받았는지를 알기 위해 한 가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얘, 여리고성을 누가 무너뜨렸는지 아니?”
  아이는 심각하게 목사님을 쳐다보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안 했는데요.”
  목사님은 심각한 생각이 들어서 교회학교 담임교사를 불러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선생님이 심각하게 목사님에게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그 아이는 절대 거짓말 할 아이가 아닙니다. 그 아이가 안했다면 안 한 겁니다.”
  정말 심각해진 목사님은 이 현실을 교회가 알고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장로님들을 모아 당회를 열었습니다. 그러자 재정부장 장로님이 이렇게 해법을 내놓았습니다.
  “목사님, 만일 그 일이 사실이라면, 우리 교회가 변상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청년부 설교에서도 ‘여리고성을 누가 무너뜨렸는가?’라고 했더니 청년들이 심각하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벽돌을 사다가 쌓자”
  교회 안에 있는 목사, 교사, 학생, 청년, 장로… 모든 사람들이 알고 보면 사랑의 대상입니다. 싸움과 갈등의 대상이 아닙니다. 나는 사랑의 사람입니까? 싸움의 사람입니까? 개인적인 욕심과 감정을 버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성령 충만과 성령의 열매입니다.

3. 모이는 모습
  본문 46절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성령을 받은 초기 예루살렘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이는 유대 전통과 관습에 따라 행동함으로 그들의 신앙을 표현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는 성전과 성전바깥 뜰 동편에 있는 솔로몬 행각이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예배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또한 성전에 오는 유대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제자들은 성전에서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에 의해 자발적으로 기쁨 충만한 상태에서 모였습니다. 때로는 목숨을 내놓고 순교적인 자세로 모였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고 하였습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예배 시간이 기다려집니다. 교회 가는 것이 기쁘고 즐겁습니다. 성령받으면 모이는 것이 행복합니다. 모이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성령 받은 체험이 있다고 영적 교만을 품고 교회의 모임을 등한시 한다면 자칫 신앙이 독선적이고 이기적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교회 모임을 통해서 성도들은 건강해지고 건전해지는 것입니다. 교회보다 성령의 역사가 더 강한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교회가 언제나 최상이고 일차적입니다. 다른 곳은 언제나 교회 다음이고 차선입니다. 대치가 아닌 보조의 장소일 뿐입니다.

  미국 갈보리교회 척 스미스(Chuck Smith)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목사님은 미국의 Baby Boomer들, 죽 60년대 이후 히피족으로 등장한 젊은이들을 위해 선교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마침 그때 교회는 아름답게 단장을 하고 새 카펫을 깔아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신발도 신지 않은 지저분한 젊은이들이 교회를 휘젓고 다니자 교회의 중직들은 불만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중직들이 목사님을 찾아와 젊은이들 때문에 교회가 지저분해진다는 불평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스미스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아름다운 새 건물과 깨끗한 카펫 때문에 젊은이들이 들어올 수 없다면, 그 카펫을 당장 걷어버리십시오!”
  젊은이들에게 도움이 되어야 할 교회가 카펫 때문에 그들을 밀어낸다면, 그 카펫을 걷어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선교와 복음을 위해, 주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세워진 교회가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교회로 바뀐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힘쓸 때 능력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모두가 피곤하고 바쁘지만 모이기를 힘씁시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 사명을 잘 감당하는 잘 모이는 교회와 성도가 됩시다. 모이는 모습을 보면 성령 충만의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4. 칭송의 모습
  본문 47절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초대교회의 분위기는 총독이었던 플리니우스(Plinius)가 트라얀(Trajan) 황제에게 보낸 서신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즉 그는 박해로 인해 비밀리에 모이는 기독교 공동체를 은밀히 조사해 본 후 ‘그들은 법 이상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보고함으로써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의 영적, 윤리적 삶이 칭송받을 만했음을 로마의 정치가로서 입증시켜 주었습니다. 이처럼 성령 충만한 성도는 세상의 법을 초월해서 살게 되므로 온 백성의 칭송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백성에게 욕을 당합니다. 칭송을 받아야 구원받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교회가 크게 부흥됩니다.

  어떤 자유 기고가가 ‘내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이유’라는 글을 쓴 것을 보았습니다. 이유는 이러했습니다.
  ① 너무 흔해 가치가 없어 보이기 때문에  ② 죽었다 깨나도 적응하지 못하는 분위기 때문에  ③ 강요와 협박의 전도활동 때문에  ④ 어려운 경제 상황에 더욱 부담이 되는 십일조 때문에
  그런데 유독 내 눈에 들어온 이유가 있었습니다. “눈에 너무 잘 띄어 슬픈 종교”라는 말이었습니다. 기독교는 비신도의 눈에 매우 잘 띈다는 특성이 있습니다. 식사를 할 때 기도하는 모습이나, 주말 생활 스케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 믿으라고 목청 높여 노래를 부르거나 고함을 치고 다소 유난스러운 활동을 하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을 것입니다. 남들의 눈에 너무나도 잘 띄는 특성 때문에 오히려 힘든 종교가 바로 기독교입니다. 예를 들어 식당에서 식사 전에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던 성도가 음식이 맛이 없다고 식당 주인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똑같은 행동을 해도 기독교 신자가 그랬다면 조금 다르고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그 사람을 기독교의 정신과 함께 연결하여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기독교 성도는 다소 억울할 수 있지만 눈에 잘 띄기 때문에 사사로운 것이라도 행동에 좀 더 신경을 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라도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아야 합니다. 칭송은 눈에 보이는 성령입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기도와 사랑과 모임과 칭송의 성도가 됩시다. 눈으로 보는 성령의 사람이 됩시다. 더욱 성령 충만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교회를 부흥케 하는 면류관의 보석같은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김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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