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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언어가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약 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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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톤 트르블로드 교수는 그의 작은 책자 '재건을 위한 준비'에서 종교의 참 원수는 '무종교'가 아니고 '희미한 종교성'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참 원수는 겉으로 드러나게 종교를 핍박하는 붉은 군단이 아니고, 복음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없으면서도 교회에 참여하면서 교회에 대해 오만한 태도를 취하는 시민들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시대를 병들게 하고, 우리들의 영혼을 좀먹게 하는 가장 강력한 사단의 무기는 '하나님 없음'이라는 무신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의 뜻에 전적으로 따르지 않는 희미한 종교성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주님의 제자로서의 헌신된 삶이 아니라 단지 교회에 나옴으로써 자신의 마음이 위안을 받는데서 만족하는 종교꾼으로 머물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희미한 종교성으로는 결코 이 시대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종교꾼으로는 종교 놀이는 가능하겠지만 무너져 가는 우리의 사회를 일으켜 세울 수가 없습니다.  종교꾼으로는 결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 땅에서의 평안과 기쁨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종교 놀이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아브라함의 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 신앙을 분명히 하십시오.  내 믿음의 색깔을 더 확실하게 하십시오.  우리는 많은 사람들 앞에 우리 믿음의 진보를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는 시각과 성품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끝없이 예수를 믿으면서 내 성품을 보는 시각이 열려야 합니다.  온유하게 보는 시각이 열려야 합니다.  겸손하게 보는 시각이 열려야 합니다.  무슨 일을 보든지 지금 한 순간의 사건으로 보지 말고 미래를 향한 장기적인 눈으로 보셔야 합니다.  믿음의 원칙을 붙들고 보셔야 합니다.

우리가 직면한 중요한 문제들은 우리가 그 문제를 발생시킨 그 당대의 사고 방식과 시각으로는 절대로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 때 그 문제는 그런 시각으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월이 지나고 나면 다른 시각으로 보아야 그 문제가 풀립니다.  오늘은 오늘의 시각이 필요하고, 어제는 어제의 시각이 필요한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 나라가 왜 꼬입니까?  어제의 시각을 가지고 오늘의 문제를 다 진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범여권이 대통합이니, 소통합을 주장하고 있지만 왜 통합이 안 되는 겁니까?  어제의 감정을 가지고 오늘을 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렇습니다.  지나간 시각으로 보지 말고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십시오.  과거의 감정을 가지고 오늘을 정죄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새로운 감정을 가지고 오늘을 축복하십시오.

변화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변화가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더 훌륭한 목적과 미래를 위해 현재 생각하고 원하는 것들을 포기하면 됩니다.  지금 내가 붙잡고 있는 그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으면 거룩한 변화는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한 행동에 따르는 결과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까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육체의 남은 때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행동의 선택의 자유, 행동의 선택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행동한 선택의 결과에 대한 자유까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제비는 내가 뽑아도 결정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마음의 결정은 내가 하지만 그러나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붙잡고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룩한 변화를 시작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내가 살고, 내 가정이 살고, 우리 민족이 사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인생의 가장 큰 상처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행한 행동이라고 합니다.  그 모진 말 한마디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행한 실수다.  그것도 다 맞는 말이 아닙니다.  힘들지만 그것보다 정말 더 힘든 것은 그런 실수에 대해서 내가 왜 겨우 그렇게 어리석게 반응했던가 하는 자기 반응의 방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온유하면 됩니다.  온유하면 반응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잘 들으십시오.  겸손하면 방식이 달라집니다.  성경은 모세나 우리 예수님의 성품을 온유한 성품이라고 했습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했습니다.  온유한 자가 세상을 정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온유한 성품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여, 강팍하고 완악한 내 마음을 주님의 온유한 성품으로 바꾸어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2007년 5월 27일이라는 역사 속으로 초청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이 땅에 살아야 됩니까?  구원받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단순히 구원받기 위해서만 산다고 한다면 구원받은 다음에 바로 죽으면 됩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인생을 2007년 5월 26일로 끝내지 않으시고 오늘 이 하루를 나에게 주신 중요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좀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희미한 종교성을 거부하고 뜨겁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셔야 합니다.  마지막날 나에게 주실 영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충성스럽게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명자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일에 최우선을 두십시오.  하나님의 일에 크게 동참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자신의 역사를 이루도록 주시는 권능을 받아들이십시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라는 것을 이 시대 속에 보여주십시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선포하는 일에 동참하십시오.  나로 하여금, 내 가정으로 하여금, 우리 교회로 하여금 주의 영광을 세계 속에 드러내십시오.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역사의 주역입니다.  우리 교회가 역사의 주역입니다.  그래서 옆 사람을 보시면서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역사의 주역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삼십년 동안 예루살렘 교회에서 목회를 했던 분입니다.  사실 그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을 감당하실 때에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에야 회개를 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평생을 주님을 위하여 바치게 되고, 초대교회에서 높임을 받는 권세 있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삼십 년 동안 사역을 감당하고 끝내 바리새인들의 가혹한 핍박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야고보를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예수를 부인하라고 윽박지릅니다.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절대로 예수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늘을 쳐다보며 그들을 향해 외칩니다.
"저기를 보라,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에게 전도를 합니다.

그러자 옆에서 야고보가 예수를 부인할 것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그를 떠밀어 땅으로 떨어뜨립니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그에게 돌을 던지고 몽둥이질을 합니다.  야고보는 죽는 순간,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외칩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순교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평생을 통하여 특별히 기도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비교적 과묵한 사람이었습니다.  말이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아주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먹는 것, 입는 것이 지극히 검소했습니다.
그에게는 특별히 기도하는 사람임을 특징짓는 별명이 하나 있습니다.
'약대 무릎을 가진 사람'
이것이 그의 별명이었습습니다.

아시다시피 약대는 무릎을 잘 꿇고 있습니다.  꿇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곤 합니다.  그래서 약대의 무릎은 둥그렇습니다.  야고보의 무릎도 늘 꿇고 기도하는 바람에 군살이 박히고 약대의 무릎처럼 둥그렇게 되었다 하여 붙여진 것입니다.  그는 실천의 사람이었고 검소한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높이 존경을 받고 평생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다가 순교까지 하였습니다.

그 야보고가 예루살렘 교회와 성도들을 향하여, 그리고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여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그러니까 야고보는 우리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다 실수가 많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든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은 깊이 생각한 다음에 신중히 해야 합니다.  더 신중히 해야 합니다.

야고보서는 5장으로 구성된 짧은 서신입니다.  그런데 이 짧은 서신에는 매 장마다 말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른 할 말도 많았을 텐데 하필이면 매 장마다 이렇게 말을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야고보가 삼십년 동안 예루살렘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이 결국은 말 때문이더라는 겁니다.  가정의 불화도 말 때문이요, 교회의 분열과 다툼도 결국에는 말 때문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면서 본문에서는 배의 키와 같다고도 비유했습니다.  배의 키를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은 지극히 작은 것이지만 엄청나게 큰 배의 방향을 잡아줄 뿐만 아니라 배를 안전하게 항구로 인도해 나갑니다.  우리가 내 뱉는 말이 바로 이 배의 키와 같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나에게 인격도 있고 재산도 있고 명예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훌륭한 것을 가졌다고 해도 어쩌다 말 한마디 잘못하고 나면 그 훌륭한 것들이 다 소용없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을 얻기 위해 바친 오랜 세월과 각고의 노력이 말 한마디 때문에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을 우리들 주변에서도 비일비재로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야고보는 말이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서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말은 마치 불과도 같다.  불이 한번 붙으면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말 한마디의 여파는 엄청납니다.  말을 내뱉는 것은 불을 지르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만큼 무서운 것이 말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름지기 깊이 생각한 다음에 말을 해야 합니다.  말을 했으면 그로 해서 파급되는 영향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무릇 자기 혀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내 입술에서 저주의 말을 버려야 합니다.  파괴의 언어를 제거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은 축복의 말을 합니다.  창조적인 말을 합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신앙의 진실성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1장 26절에서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않는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교회 안에 있는 거짓된 경건의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은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떠들어댑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들어보면 이것은 은혜와는 전혀 동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이 내뱉는 말들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함부로 내뱉어지는 말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야고보는 결론을 내립니다.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런 신앙생활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입으로는 경건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신앙생활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야고보는 3장 9절부터 10절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찬송도 축복도 말로써 합니다.  그런가 하면 원망도 저주도 말로써 합니다.  둘 다 말입니다.  이것을 특별히 히브리 사람들의 말로 바꾸어 말한다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됩니다.

히브리말로 '축복'은 '바라크'입니다.  여기에서 '바라크'라는 말은 '좋은 뜻의 말을 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바라크'라고 하면 찬양한다는 말이 되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크한다'라고 하면 축복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좋은 말을 하면 이것이 찬송입니다.  사람을 향해서 좋은 말을 하면 이것은 축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말은 축복과 저주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망한다 망한다 하면 망합니다.  복을 빌면 복이 됩니다.  은혜가 있을지어다 하면 은혜로워집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언어의 변화가 행복의 척도입니다.  행복하려면 먼저 말이 행복해야 합니다.  말이 좋아야 합니다.  말이 신선해야 합니다.  그래서 창조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축복의 말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충만한 말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드럽고 온유한 말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언어는 존재의 근거입니다.  언어는 생각과 행동을 지배합니다.  언어는 창조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어는 지배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언어의 타락은 인격의 타락입니다.  사람은 언어를 버릴 때 그 인격을 버리는 것이고, 언어가 무너질 때 자신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오늘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면서 주님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내 입술이 변하기를 기도하십시오.  내 입술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기를 기도하십시오.  입이 변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람은 손이나 발로 짓는 죄보다 입으로 짓는 죄가 훨씬 많습니다.

성경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더럽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입 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입 관리를 잘 하십시오.  여러분이 내뱉는 그 말 한마디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십시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말은 손이 없지만 손이 하는 일을 하며, 사람을 죽인다.
그러나 말은 손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손은 가까이 있는 사람을 죽이지만 말은 먼데 있는 사람도 죽이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손보다 말이 더 무섭습니다.  말은 쏜 화살보다도, 휘두르는 칼보다도 더 무섭습니다.  화살이나 칼은 방패로 막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이 쏘아대는 살상력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을 함에는 지·정·의에 신앙까지를 다 동원해도 모자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좋은 말을 자꾸 하면 별수 없이 복이 됩니다.  나쁜 말을 자꾸 하면 별수 없이 저주가 됩니다.  사람끼리 하는 말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역사 되기 때문입니다.  축복하면 복을 주시고 저주를 하면 저주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입을 다물 줄 모른 사람은 문이 닫히지 않는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문이 닫히지 않는 집은 도둑이 들어와서 다 가져갑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믿음이 좋고 은혜를 많이 받아도 입을 닫을 줄 모르면 악한 영들이 다 가져갑니다.

말은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상처를 줍니다.  믿음의 사람은 더러운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은 언제나 순화되어 있어야 합니다.  입을 버리게 되면 다 버리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의 입으로 절대 남을 비판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과 경배만 드리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언제나 모진 말, 강퍅한 말은 버리고 꼭 필요한 말만 해야 됩니다.  기도는 많이 하고 말은 적게 해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혀는 마음의 펜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자꾸 감사하는 말만 합니다.  안 되는 것도 감사하면 그 말이 마음에 열매를 맺습니다.  말은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키와 같습니다.  말이 바뀌어야 표정이 바뀌고 운명이 바뀌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

우리의 옛말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말 한마디로 공든 탑을 무너뜨린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모름지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잘 들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말투가 어떻다느니, 아니면 그 사람의 말이 거칠다느니, 경박스럽다느니 라는 평가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을 잘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말투가 어떤지를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말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말이 부드러운지 거친지, 축복의 말인지 저주의 말인지, 질이 좋은 말인지 그렇지 않은 말인지를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질이 좋지 못한 혀는 질이 좋지 못한 손보다 훨씬 더 문제를 일으킵니다.  물고기도 입을 자주 열면 낚시에 걸리고 마는 법입니다.  질이 좋지 못한 말을 자주하게 되면 결국 스스로 올무에 걸려 넘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말투에 대해서 깊이 들어야 합니다.  들을 뿐만 아니라 사랑스러운 말투로, 아름다운 말투로, 생명의 말투로, 축복의 말투로 훈련시켜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이란 약과 같습니다.  약을 지을 때는 저울에 달아서 적당한 양을 짓게 됩니다.  은혜에 꽉 잡혀있는 사람은 우리의 말에 생각이라는 저울에 달아서 나옵니다.  말이 입 속에 들어 있을 때는 우리의 노예이지만, 말이 밖에 나오고 나면 그때부터 사람은 그 말의 노예가 됩니다.  입 밖에 나온 그 말이 자신을 이끌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 없이 함부로 말을 내뱉어서는 안됩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고서 말을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이 말이 생명의 말인지, 사랑스러운 말인지, 축복의 말인지, 이 말을 들은 상대방이 기분 좋아할 말인지, 더 중요한 것은 이 말을 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런지를 생각하고서 말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입보다 귀를 높은 지위에 두고 살아가십시오.  입 때문에 망한 사람의 수가 귀 때문에 망한 사람의 수보다 훨씬 많습니다.  우리들 주위에 보면, 말 한 마디 때문에 엄청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입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입을 관리하는 사람은 그 어려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입은 남에게도 삶의 용기를 줍니다.  입을 지킨 사람은 강하고 담대합니다.  언어의 통제가 불가능한 사람은 그 사람의 생활이 통제 불가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명철한 입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매우 복된 일입니다.  잠언에 보면 명철한 자의 입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이며, 그 입에서 지식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미련한 자의 입은 다툼을 일으키고 매를 자청하며, 그 영혼의 그물이 결국 그 입으로 멸망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은 결코 헛되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입술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십시오.  내 입술에 파수꾼을 세울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사실 성령이 역사하면 제일 먼저 우리의 언어가 달라집니다.  실제로 성령이 역사하면 혀가 달라졌습니다.  방언이 옵니다.  예언이 옵니다.  입이 변하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합니다.  우리의 입이 바뀌면 우리의 인생이 바뀝니다.  언어가 바뀌면 우리의 운명이 바뀝니다.

성령이 역사하면 입을 관리하게 되는데 입을 관리하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입을 지키고 나면 자기 분열을 막을 수 있습니다.  입을 지키고 나면 하늘의 기쁨과 감격이 오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의 입에 권세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권세 있는 능력은 사람을 살리는 힘입니다.  사람을 세워주는 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남에게 용기를 주고 기쁨을 주는 믿음의 말만 해야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입이 변할 때 하나님의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내 입술의 언어가 바뀌면 운명도 바뀌어집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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