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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까운 먼 하늘 나라 (왕상 8:27-30, 행 1:6-11, 눅 24:5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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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또 공동체마다 가장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가 편안하게 살집 일겁니다. 우리 교회도 여러분 이렇게 주일마다 오셔서 예배를 드리는데 우리한테 자부심이 하나 있습니다.

이 집은 보통 건물 아니고 아름다운 집, 편안한 집, 특이한 집, 이렇게 돼있습니다. 소위 성전입니다. 성전의 역사를 다 살필 수는 없으나 성전가운데서 최초로 지어진 성전 그러면 솔로몬의 성전을 들 수 있을 겁니다.

유대역사에 있어서 제일 먼저 아름답게 이어졌던 성전. 그 성전의 실물은 우리가 볼 수 없으나 또 사진도 전해진 게 없는데 역사를 통해서 솔로몬이라고 하는 임금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임금. 또 우리가 말하는 문화를 가장 꽃피운 임금. 그분이 문화에 상징적 표현 중에서 가장 잘 지은 것 중에 하나가 성전이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솔로몬의 문화와 솔로몬의 의식 속에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 가장 아름답고 잘 짓자. 그래서 성전을 지었습니다. 성전보다 조금 규모가 큰 왕궁도 지었는데 나중에 성서기록을 보면 진실과 아름다움은 성전이 더 컸고 왕궁은 웅장했다.

이렇게 기록이 돼있습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이 생각한 성전, 하나님의 집, 아름답고 진실하고 아주 화창한 봄날처럼 성전을 짓자. 그래서 성전을 지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 속에서 그렇게 아름답게 지었던 성전, 문화제, 문화의 상징, 동시에 그곳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어떤 방식으로 계시는지를 예술적으로 표현하기를 성전에 세토막입니다. 입구, 중앙 무대, 제단이 있는데 제단이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곳이라고 보고 이 제단 가장 깊은 곳에 법궤를 놓았습니다. 그 법궤 속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십니다.

그 말씀은 구체적으로 모세에게 십계명으로 주었습니다. 십계명을 담은 또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담은 법궤를 지성소에 놓고 하나님은 이곳에 계십니다. 이곳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항상 성전에 오면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아름답게 꾸몄습니다. 휘황찬란한 모습으로 꾸몄을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도 성전을 짓거나 건물을 짓거나 또 무슨 작품을 만들 때 꼭 봉헌식도 하고 축하식도 합니다. 그래서 누가 얼마나 수고했고 또 예술성은 얼마나 되고 자부심은 얼마나 되고 이런 얘기를 우리가 많이 합니다.

제가 오늘 최고로 아름답다고 자부하던 솔로몬 성전의 봉헌사 한 구절 읽어보겠습니다. 봉헌사는 오늘 여러분께서 들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 이집이 당신집인데 하나님이 이 땅위에 계시다는 것을 제가 어떻게 바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계시는 곳은 저 하늘, 아니 저 하늘 뜰 위에 있는 하늘 그곳에 당신이 계시는데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제가 찬양하기도 역부족인데 감히 당신보고 제가 아무리 아름답게 지었기로 서니 이 땅에 있는 성전 속에 오셔서 계시라고 제가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봉헌사 보셨습니까? 건물을 최대의 노력을 해서 지어놓고 이렇게 겸손한 봉헌사를 보셨습니까. 솔로몬의 위대한 신앙고백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선을 다해 지었습니다. 땅에서는 최고로 지었습니다. 그렇다고 감히 당신을 이곳에 모시기가 저는 너무나 죄송합니다.

다만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지어진 성전 당신의 집, 그 집을 봉헌하면서 간구할게 있습니다. 저는 당신의 말씀을 가져다 놓고 말씀에 의지하여 당신께 기도로 대화하겠고 간구로 제가 하나님께 호소하겠습니다.

제 기도와 간구를 들어주시는 방식으로 이 성전에 계십시오. 그것만으로 제가 만족하겠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 감히 하나님이 계신 하늘은 내가 어떻게 땅속에 까지 내려오게 할 수 있습니까? 제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아니면 땅속에서 하늘에 호소하는 방식 말고 당신이 땅으로 내려올 방식은 제 뜻이 아니고 제 권한사항이 아닙니다. 저는 하늘을 향하여 제가 기도와 간구하는 걸로 봉헌사를 대신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답변하시는지 오늘 본문은 기록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나는 비록 땅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하늘 속에 하늘, 하늘 심장부에 올라가 있지만 나는 오늘 내 말로, 내 말씀으로 함께 하마. 나는 하늘에 있지만 내 말씀은 그대가 진 땅 위의 성전에 있으마. 성전을 오가는 모든 사람들은 내 말씀과 만나라.

오늘 예배하러 오셨는데요, 건물이 좋아서 오신 것 아니지 않습니까? 당연한 우리 시설이구요. 여기 오시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만나 주십니다. 말씀을 만나러 왔지 하나님의 심장을 만나러 왔고 하나님의 머리와 가슴을 만나러 왔지 건물 속에 오신 것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계셔야 살아있는 성전이 됩니다. 저는 이 성전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이 계신 곳. 성전은 아름답고 진실해야 됩니다. 말씀이 있으므로. 여행들 많이 해보셨지요. 저도 여행을 하면서 옛날의 역사와 문화, 예술 이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기꺼이 관광객을 맞이하는 여러 나라 가보시면서 느낀 점이 있으실 겁니다.

훌륭한 궁전들이 있습니다. 훌륭한 성당과 예배당과 문화재로 각국마다 자랑을 합니다. 유럽에 가면 특히 그런게 많지요. 서양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우리한테도 있고 세계 나라마다 다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수백 년 됐다고 하는 성당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항상 하게 되었습니다.

저 성당 건축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갔을까? 수백 년 지었다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의 땀과 피가 저속에 들었을까? 희생은 얼마나 당했을까?

그런데 그 당시에도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이 수십만 수백만 이었을 텐데 저 성당 화려하게 짓는 값으로 먹을 것을 주었으면 훨씬 더 배불리 먹고 좋은 일 했을 텐데. 도대체 인간들 무엇 이길래, 저렇게 화려하게 꾸며놓고 배고픈 사람 문제는 해결 안했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성당이나 예배당이나 고궁을 들어가 봅니다.

한참 본 다음에 나와서 성당 지기나 고궁 지기나 길거리에서 얘기를 나눕니다. 이분들의 입속에는 제가하는 염려는 하나도 없고 프라이드만 있습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얼마나 돈이 들었고 노력이 들었고 얘기하기 전에 우리 선조들이 이렇게 정교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남겨 놓아가지고 지금도 우리 세대가 후손들이 관광수입을 먹고 살아가게 해주셨으니 우리선조들 감사합니다.

한 시대에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중요한 과제고 동시에 모아서 좋은 성전을 짓고 수백 년 수천 년 내려오는 후손들에게 계속해서 먹을 것을 줄 수 있는 건축물은 훨씬 더 위대하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성전이 다 아름다운 건 아닙니다.

호위호식하고 호화로운 성전이 있지만 지속되지 못한 건 허물 수밖에 없고. 차라리 그런 돈 가지고 밥 먹는 게 좋고요. 수십 년 수백 년 지나면서 전통이 말을 하고 문화가 말을 하고 우리 역사에 얼이 서로 이 건물을 통해서 말할 수 있는 건축이라면 저는 지금 세끼 먹을 걸 두 끼 먹을 용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후손들이 그걸로 자부심과 배부름과 역사를 이어 갈수 있다고 보면. 한때 도움과 오고 오는 세대의 도움은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건축은 그냥 아름다운 건축이 아니고 건축을 보는 건축물속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말씀을 듣는다. 얼을 교환한다. 뭔가 나한테 메시지를 준다.

이 사실이 있으면 위대합니다. 그래서 우리한테 예술이 있고 찬송이 있고 찬양이 있고. 저는 이런 역사를 보면서 우리가 너무 단편적으로만 생각지 말자 이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성전과 지성소는 그곳에 있는 하나님은 너무나 높이, 너무나 멀리 계신 하나님. 그래서 사람들이 기도와 간구로만 그분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간구가 없으면 기도가 없으면 빈 공간입니다. 살아있는 말씀이 만나짐이 없는 곳 그곳은 공간의 의미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솔로몬 시대, 예수가 나오기 전에는 너무나 높은 곳에 계시면서 너무나 멀리 계시면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고 때로는 저주도 하시고 혼내기도 하시고 우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세상이 인간의 역사가 너무 멀었습니다. 하나님 스스로 가까이 오시기로 했습니다. 얼마나 가까이 오시기로 했느냐 하면 차라리 내가 역사 속에 들어가자. 인간과 거리를 좁히자. 내가 인간이 되자. 역사의 현실이 되자. 그래서 12월25일 날 하나님 스스로 예수란 이름으로 우리한테 육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분이 예수입니다.

하늘 성소의 지상화. 하나님의 성육화. 우린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씀이 솔로몬 성전에 보관됐던 말씀입니다. 천지를 창조했던 말씀입니다.

말씀이 이제 곧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말씀을 보듬고 보전해왔던 지성소의 성전이 있는가 하면 예수의 오심으로 인해서 그 말씀은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사람이 되어 거하신단 말씀 속에는 우리 역사의 고비 고비 마다 성전이 있습니다.

육신이 된 그 살아있는 말씀은 어느 한군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그 말을 누가복음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말고 어디에 있느냐 하면 당신 마음속에 있다.

이제 예수가 오신 이후로 성전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전해주는 성전은 고착된 장소만이 아니고 살아 움직이는 인간 속에 계십니다. 제 속에 성전이 있답니다.

제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제 마음이라고 하는 제 가장 깊은 곳 저의 궁극적인 장소. 내가 그래도 가장 진심으로 보관하고 가꾸고 사랑하는 장소. 나의 가장 깊은 곳. 궁극적 관심의 영역. 그 속에 하나님이 계셔서 저보고 너는 성전이다. 내가 있으므로 성전이다.

모든 작품이 다 작품이 아니듯이 모든 작품 속에 혼과 영이 있어서 우리한테 말해주듯이 하나님이 계신 우리 모든 인간 속에 살아있어야 제가 살아있는 성전이 됩니다. 교회도 성전이고 오늘 앉아계신 여러분 다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어느 곳이 성전이냐 하면 여러분의 언어 속에 여러분의 정속에 우리의 행실 속에 하나님의 말씀하는 곳. 하나님을 만나면 기쁘고 훌륭해야 합니다. 성전 잘 집시다. 후손에게 넘겨줍시다. 제가 성전이라면 유한한 육신을 살고 죽습니다만, 저한테 말씀이 살아있으면 제가 죽어도 자손들이 후손들이 제가 한 일. 저의 역사. 저의 인격. 저의 이름. 계속해서 보존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죽어도 산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한테 있는 집, 제가 성전이면 잘 집시다. 아름답게 집시다. 그 물건 하나라도 아름답고 탐스럽게 지속될 수 있는 역사 속에 제가 성전을 집시다. 이것이 우리의 꿈이고 자기실현 아닙니까? 제가 요즘에 여러 가지 책자도 읽어보고 재미있는 신앙고백도 읽어보는데 아주 재밌는 우화 같은 얘기 하나 읽었습니다.

어느 건축가 한분이 오랫동안 회사를 다니면서 이제 은퇴를 할 때가 됐는데 주인한테 통보를 합니다. 저도 이제 목수일 오래했는데 은퇴하겠습니다. 그랬더니 주인 하는 말이 은퇴해도 살 수 있느냐. 부탁이 있다. 마지막 집 한 채만 지어주고 은퇴해다오. 기꺼이 하겠다.

그런데 이 건축가의 마음속에는 그동안 평생 동안 일한 것도 지겨워 죽겠는데 또 집을 좀 지어라, 화가 나가지고 요즘말로 말하면 빨리빨리 날림 집 하나를 지어주고 주인에게 은퇴하겠습니다. 주인을 만났습니다.

주인이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맙다. 집 열쇠를 가지고 와서 주면서 이집이 내가 마지막 당신에게 주고 싶은 보너스다. 하고 열쇠를 넘겨줍니다. 자 날림 집을 지은 목수의 마음속에 고민이 생깁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말씀하시지. 말씀 안하셨으니 그렇게 밖에 지을 수 없었다. 더 잘 지을걸. 알았더라면 잘 지을걸. 하나님은 우리한테 주시는 게 이렇다고 봅니다.

나는 당신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있겠는데. 그 어느 신학자가 말 한데로. 나는 궁극적 관심사를 주관하는 사람인데 궁극적인 것만 말 할 테니 집은 마음대로 지어라. 너는 모퉁이 돌만 될 테니 그 모퉁이 돌을 가져다 알아서 역사를 꾸며봐라. 그런데 제가 날림 집을 지었으면 그 집은 제 집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그게 네 집이라고 말씀 하시는 게 아니라 무슨 집이든지 지어라. 나는 모퉁이 돌이다. 나는 궁극적인 것의 궁극이고 가장 깊은 곳의 깊은 곳이다. 그러니 알아서 지어라. 비슷한 얘기가운데 하나 있습니다. 어느 여성 한분이 꿈을 꾸었는데 가게에 곡식을 사러 갔나봅니다.

가게 주인이 신이라고 이름하는 주인이었다고 해요. 제가 뭘 사러 왔느냐 하면 행복을 사러 왔는데 제가 바라는 행복의 이름은 평화의 행복이고, 사랑의 행복이고, 지혜의 행복이고, 물질적 축복의 행복인데 그걸 좀 사러 왔습니다. 모든지 다 있으니 가져가시오. 주인 얘기입니다.

단, 행복의 열매는 팔지 않습니다. 이집은 행복의 씨앗만 팝니다. 쌀 한 톨 먹을 때 이것은 제 건강의 열매입니다. 하고 먹는 것과 이 쌀 한 톨은 제 건강의 씨앗입니다. 하고 먹는 거는 다를 겁니다. 주인 얘기입니다.

이집에는 곡물이 많고 행복이 많지만 열매는 당신이 거두어 먹는 것. 여기 있는 모든 것은 씨앗일 뿐입니다.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은 씨앗이지 열매는 우리가 만들어서 먹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통치하시면서 우리한테 수많은 씨앗을 주었는데 씨앗이 우리가 잘못해서 새가 와서 쪼아 먹고 땅에 뿌리도 못 박고. 그것은 저희 책임이지 하나님 책임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기도를 할 때 저한테 행복의 열매를 주십시오. 하나님의 대답은 행복의 씨앗만 주마. 그리고 씨앗을 길러서 뿌리내리고 줄기가 되고 열매 맺는 것은 그대에게 준 축복이라 이름 하는 책임이니라.

제가 받은 축복은요 거저 받는 것이지만 책임 있는 축복 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오늘 승천하십니다. 승천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를 정말이지 멀리 있는 사람으로 볼 텐데 너무나 먼 사람으로 볼 텐데 먼 사람으로 보지마라. 함께 눈으로 보고 만져봤던 나 예수는 멀리 가지만 당신들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아주 가까운 곳에 있겠다.

저희들에게 있는 하나님은 이제 성령이란 이름으로 저희 안에 계십니다. 성령을 찾아라. 성령은 씨앗이다. 열매는 그대들의 거다. 성령과의 대화. 성령이란 이름으로 계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저는 오늘 우리한테 말씀하시면서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움직여 살아라.

예루살렘 사마리아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돼다오. 사람의 운명은 이런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실 때는 존경하지만 하나님이 너무 가까이 왔더니 인간의 몸이 돼서 역사 속에 왔더니 인간들이 그 하나님을 죽였습니다. 이게 십자가 사건입니다. 가까우면 죽입니다.

너무 가까이 오면 사랑이 없으면 죽이고 싶은 것 같습니다. 제게 일상생활의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고민이라기 보다고 겸연쩍은 일인데요 제가 살아가면서 매일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을 들어가는데요, 엘리베이터에 혼자 갈 때가 제일 기쁩니다.

사람이 여럿타면 허공 쳐다볼 수도 없고 제 맘이 꺼림직 합니다. 사람이 있으면 행복해야 하는데 사람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 외롭습니다. 군중속의 고독. 괜찮은 말 같지요. 이해하시지요. 혼자 차를 타고 다닐 때 아주 자유롭게 다닙니다.

세상도 보고 인간들도 보고 교통규칙도 보고 제가 많이 교류하면서 다닙니다. 혼자 운전 할 때에. 버스에 타거나 지하철에 타면 사람들이 왁자지껄 한데 좀 괴롭습니다. 쳐다볼 수도 없고 가까이 있는데 교류가 없습니다. 관계가 없습니다.

사람이 모여 있다고 관계가 아니고 사람이 모였으면 소통을 해야 하는데 관계를 가져야 하는데 이것이 없어서 어렵습니다. 제가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느냐 하면 가까이 있던 멀리 있던 관계가 깊고 사랑스러우면 외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옆에 계시다는데 저하고 소통을 못하는데 하나님 말씀입니다. 나는 외롭다. 차라리 멀리 있을걸. 기도라도 들을걸. 고백이라도 들을걸. 내가 당신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있었더니 나하고 대화가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과 대화를 못하면서 제 속에 있는 하나님과 나와 전혀 관계없는 내 이웃의 하나님이 만날 수 없잖습니까?

그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맘대로 하십시오. 이렇게 해버릴 수 없습니다. 왜 그런 하나님이면 뭐 하러 십자가에 달렸습니까. 인간 구원해버리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원했지 않습니까? 당신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왜 십자가에 죽으십니까? 하나님 말씀입니다.

나는 역사화 되기로 했고 인간되기로 했고 그대들과 운명을 똑같이 하기로 했는데 내 약속을 버릴 수 없지 않냐. 그래서 기적을 행하시지 않고 죽었습니다. 오늘 저한테 온 하나님은 이웃과 있는 하나님과 왜 대화를 못하겠습니까.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데. 안하십니다. 왜. 인간되기로 결심했으니까. 단 저희 속에 있는 하나님이 들고 일어나서 이웃에 있는 하나님과 함께 만나서 저와 인간 이웃이 대화하면, 제가 아내와 대화하고 가족과 대화하면 그 속에 있는 하나님도 기뻐서 대화 하겠다고 합니다.

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하나님 좀 감옥에서 해방시키시지요. 하나님보고 혼자 살지 마시고 여러 세상가운데 모든 인간 가운데 있는 하나님과 서로 만나시라고 대화하면 어떻습니까? 남과 북의 군사 붕괴 선을 넘어서 철도가 연결됐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당연히 있어야할 일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도 가까운 남과 북이 그렇게도 멀었습니다. 남과 북이 먼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가까이 있다고 다 친한 것 아닙니다. 가까이 있던 멀리 있던 제 속에 있는 제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곳에 있는 씨앗인 하나님을 서로 만나게 하라. 하나님이 말씀하게 하라.

시공은 초월할 수 있다. 지난주에 제가 잠깐 제노바에 좀 다녀왔습니다. 보건관계로 몇 가지 서명을 하러 갔다 왔는데 네팔, 라오스, 아프리카 돕는 프로그램인데 자세히 보고 드릴 거는 없고요 10년 전 15년 전만해도 저는 밖에 있을 때 여기서 일할 때 외국을 다니면서 어떻게 하면 원조를 많이 받아올까.

부자나라 헌금을 어떻게 많이 받아다 우리 좀 살릴까 그게 저의 총 관심이었습니다. 그때 제 얼굴이 어떻게 비췄을지 이번에 보고 딱 깨달았습니다. 여러 도움을 받는 나라들이 와서 한국이 도와주겠다니까 고마워서. 그 얼굴 보면요 애타는 얼굴이 있는데 제가 얼굴이 이제 교만스러웠으면 큰일 날 것 같아서 일부러 겸손했는데요 저는 겸손하고 고개를 숙이면서 너무 기뻤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언제 우리 같은 사람 택하셔서 돕게 할 수 있습니까. 돕는 사랑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받을 때 사랑 좋았지만 비교해 보니까 상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 가지 말할 수는 없는데 한 가지만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최근에 아프리카 남단은 고약한 질병인 HIV 에이즈 때문에 사람들이 다 죽어갑니다. 오늘 이 질병의 감염은 성적 접촉이 있어야 감염된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거 하나는 그러면 왜 갓 태어난 아이가 6개월도 안지 났는데 1년도 안 지났는데 에이즈로 죽어갑니까? 모자보건에서 중요한 얘기입니다.

애가 성적 접촉도 없는데 왜 죽어갑니까. 통계를 내봤더니 어린아이 경우 꼬마아이 경우 에이즈 균에 감염되었을 경우 통로를 봤더니 모유를 먹고 환자인 어머니의 모유를 먹고 균에 감염된 것이 30~40 프로로 제일 높습니다. 자 이제는 모유는 모유만이 아니라 모유 속에 어머니의 사랑이 있습니다.

우유와 사랑을 함께 먹고 우리 자식들이 자랍니다. 지금은 질병 때문에 어머니는 병에 걸렸지만 왜 태어난 자식이 병 걸려야 됩니까. 아무 잘못이 없는데. 그 아이에게 모유를 줄 수 없습니다.

죽음을 주는 겁니다. 그래서 프로그램 중에 하나가 우유를 줍시다. 근데 우유가 없습니다. 우유 살 돈도 없고 제정이 약합니다. 우리보고 하는 말입니다. 다른 것은 그만두고 간난아이들이 먹을 우유라도 좀 주십시오. 그런데 그 우유 속에 당신들의 작지만 깊은 사랑을 좀 심어 주시면 우리 아이들이 자라겠습니다. 씨앗만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열매로 키우겠습니다. 하나님은 승천하셨지만 성령을 통해서 우리한테 말씀하시기를 나는 씨앗이 되마. 근본이 되마. 깊은 곳에 있으마. 마음대로 나가서 깊은 은혜에 보답하고 기쁘고 즐겁게 살자. 멀리 있지 않습니다. 가까운 곳에 있지만 사랑으로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 성전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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