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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군대로 (겔 3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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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셨다. 에스겔을 사망의 음침한 곳으로 인도하신 이유는, 그 골짜기에는 생명이 없는 마른 뼈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관심이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잊혀 진 뼈들을 하나님께서 돌아보셨다.

  하나님께서는 마른 뼈들도 사랑하셔서, 다시 살아나게 만드시는 분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버려진 마른 뼈들을 소생시켜, 하나님의 군대로 사용하시는 분이다. 마른 뼈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민족을 의미한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끌려가, 절망 중에 있었다.

  (11)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가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그들은 스스로 뼈요, 소망은 끊어졌고, 절망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아상이요, 그들의 현실이었다.

  하나님께서 마른 뼈처럼 버려진 그들이 살겠느냐고 에스겔에게 물으셨다. (3)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회복할 수 있다는 소망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느냐고 물으셨다.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이다. 하나님께서 성공, 능력, 강함, 젊음, 형통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러나 우리의 실패, 무력, 약함, 노년의 어두움 가운데도, 함께 하시는 좋으신 분이다. 그러면 어떻게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군대가 될 수 있나요?

1. 하나님의 시각을 가져라.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그들은, 지금 마른 뼈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들 스스로 소망이 없다고 했다. 그들의 생각이 병들었고, 언어가 병들어서 스스로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의 언어 속에는, 더 이상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이 없다. 하나님께서 좌절된 꿈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스겔을 보내서, 그 생각과 언어와 믿음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좌절된 꿈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다.

  하나님은 좌절된 꿈을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을 만나면, 좌절된 꿈이 회복 되고, 소망이 넘쳐나게 된다. 좌절된 꿈을 회복하려면, 하나님의 시각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마른 뼈들이 살겠느냐고 물으셨을 때, 에스겔은 아주 지혜롭게 주께서 아신다고 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5-6)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뼈만 아니라 (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군대가 됨을 보셨다. 또 (12)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군대가 되어서 본국으로 돌아감을 보셨다.

  하나님은 사람과 다르게 보신다. 하나님은 현상만 보지 않으시고, 미래를 보신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와 다르기에,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이를 꿈과 비전이라 한다. 불가능 속에서도 가능을 보고,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갖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처럼 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시각은, 마른 뼈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기에,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하면 안 된다. 끝없는 소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주위에 마른 뼈같이 보이는 사람들이 있을 때, 그를 향해 소망을 갖도록 해야 한다.

  우리 자녀가운데 어떤 자녀는, 메마른 뼈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다른 눈을 가지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들어서, 위대한 인물로 사용하신다. 사람들이 포기할 수밖에 없는 자녀를 통해, 위대한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란다.

  기독교는 잘난 사람을 불러서, 그 사람의 잘남을 칭찬하고, 감탄하는 역사가 아니다. 못난 사람을 불러서 “하나님께서는 저런 사람을 통해서도, 엄청난 일을 하시는 구나”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역사다. 하나님은 당신이 얼마나 은혜로운 분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사람을 부르시는 분이다.

  어느 의과 대학에서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질문했다. “한 부부가 있는데, 남편은 매독에 걸려있고, 아내는 심한 폐결핵에 걸려 있다. 이 가정에는 자녀가 넷인데, 첫째 아이는 장님이고, 둘째 아이는 몸이 허약해 일찍 죽었고, 셋째는 장님에다 벙어리이고, 넷째는 결핵으로 얼마 못 산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현재 다섯 번째 아이를 임신했다. 만약 이럴 경우, 그 어머니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겠는가?” 한 학생이 “낙태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교수님은 “그럼 자네는 방금 베토벤을 죽였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조금 더 기도하면서, 기다리시기 바란다.

  마른 뼈들은 버려진 채로, 무력하게 기다렸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좌절된 꿈에 말씀을 통해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골짜기는 낮은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낮은 곳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각을 가진 사람은 겸손하다.

  하나님이 높이 세우시기 원하시는 사람일수록 낮추신다. 산이 높을수록 골짜기는 깊다.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의 국무총리로 높이시기 전에, 철저하게 낮추셨다. 요셉을 구덩이에 던지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셔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셨다(빌2:8).

  높이 올라가는 나무일수록 뿌리를 깊이 내린다. 뿌리가 깊지 못하면, 쉽게 쓰러지고 만다. 마귀는 낮아짐이 없이 높아지게 만든다. 교만하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도,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게 만드신다. 다윗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했다(시23:4).

  그러므로 골짜기의 마른 뼈같이 살아간다고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심을 믿으시기 바란다. 마른 뼈도 능히 살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뢰하시기 바란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반드시 이루신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들에게, 놀라운 역사를 이루신다.

2. 말씀이 있어야 한다.

말씀은 능력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빛을 말씀하셨을 때, 빛이 창조되었고, 해와 달을 말씀하실 때, 해와 달이 그대로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골짜기에 있는 마른 뼈들을 살리시기 위해, 에스겔에게 말씀을 주신다. 마른 뼈들을 행해 대언하라 하신다. (4-6)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하나님의 명을 받아, 에스겔이 마른 뼈에게 대언할 때, 뼈들이 다시 소생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말씀은 놀라운 능력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인 것처럼, 우리의 말도 능력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대로 역사하신다. (민14:27-28) “…이스라엘 자손들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이, 하나님의 귀에 들리는 대로 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우리와 우리 자손을 위해 말을 잘해야 한다. 우리의 언어가 미래를 만든다. 왜냐하면 말은 방향설정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약3:3-4). 죽고 사는 것이 혀에 달려있다(잠18:21).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마른 뼈와 같은 인생을 회복시키시고 재창조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른 뼈에게 직접 말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대언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홀로 행하실 수 있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고, 꼭 누군가를 통해 일하신다.

  대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함을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주셔서 먹게 하신다. (겔3:1-3)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받아 먹어야, 말씀을 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다. 마른 뼈를 소생케 한다. 말씀을 먹을 때, 침체된 영혼들이 살아난다(시19:7-8).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말씀은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중풍병자가 일어났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고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 살아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가까이해야 한다.

  에스겔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뼈 저 뼈가 서로 들어맞아 서로 연결되었다. 하나님께서 부흥을 주실 때, 언제나 말씀을 통해 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해 질 때,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다.

  (행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예수님은 말씀으로 오셨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계시고, 말씀이신 예수님을 전하고, 말씀이 역사하게 되면 교회는 부흥하고, 영혼은 살아 춤을 추게 된다.

  한국교회는 1907년 평양대부흥 운동이, 다시 일어나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부흥은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 특별히 대동강에서 순교하면서 성경을 전해 준 토마스 선교사의 사역이 평양 대부흥의 시작이 되었다. 1866년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하면서 성경을 전해 주었다.

  그 성경을 전해 받은 사람들 중 하나가 토마스 선교사를 죽였던 박춘권인데, 훗날 영수가 된다. 박춘권의 조카 이영태이다. 이영태라는 사람이 그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믿어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레이놀즈 선교사를 도와 성경을 번역할 때, 큰 기여를 한다.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하기 전, 최치량이라는 아이에게도 성경을 주었는데, 금서인 성경을 가지고 있던 최치량이 겁이 나서, 평양감사 경비였던 박영식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성경을 가져다가, 자기 집 도배를 했다. 그런데 성경을 도배했던 박영식의 집이, 평양 최초의 교회 널다리골교회가 되었다.

  그 널다리골 교회가 나중에 장대현교회가 되는데, 여기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말씀에 붙잡혀 살아야 한다. 말씀을 사모하고 갈망하기 바란다.

3. 성령님과 연합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마른 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뼈들이 서로 연결되고, 그 뼈에는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올랐다. 그 위에 가죽이 덮였지만, 그 속에 생기는 없었다(7-8).

  그때 다시 에스겔이 생기를 행해 대언하니, 생기가 사방에서 몰려와서 마른 뼈들에게 들어가, 결국 마른 뼈들이 큰 군대가 되었다(9-10). 여기서 생기는 성령님을 의미한다. 말씀이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함께, 성령님이 더불어 일하신다.

  마른 뼈와 같은 우리인생에 말씀이 필요하지만, 말씀만 가지고는 안 된다. 성령의 생기가 필요하다. 말씀은 그 자체가 능력이지만, 홀로 역사하지 않고 꼭 성령님과 함께 역사하신다. 구원자 예수님은 말씀으로 오셨다. 전능하신 말씀이요, 창조의 말씀이요, 치유의 말씀이요, 회복의 말씀으로 오셨다.

  그러나 예수님도 성령님과 더불어 일하셨다. 말씀은 성령의 영감으로 쓰여 졌다. 성령님의 생기, 성령님의 숨결로 쓰여 졌다. 성령님과 말씀은 늘 함께 역사한다. 우리에겐 성령의 생기가 필요하다. 성령의 생기가 임하면, 모두 다 변하고, 모두 역전된다.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고, 하나님의 군대가 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이처럼 하나님의 숨결을 받을 때 생령, 즉 살아있는 영적 존재가 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 생기였다.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제자들은 마른 뼈와 같았다. 그들의 꿈이 십자가 앞에서 무너졌다. 그들의 사명도 무너졌다. 그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다. 그들의 침체된 영혼에 생기가 임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해 생기를 넣으셨다. 그런데 (겔37:3, 9, 11, 16) 에스겔에게 인자라고 하셨다. 신약에는 예수님을 통해, 성령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성령의 생기를 마실 수 없다. 예수님을 통해 성령님의 생명에 접할 수 있다.

  성령님의 생기가 마른 뼈에 임했을 때, 마른 뼈들이 힘을 얻게 된다. 힘을 얻어 곧 살아 일어나 서게 된다. 그리고 큰 군대를 이루었다. (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이처럼 생기는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를 준다. 힘이 없으면 설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누워 있기를 원치 않으신다. 일어나 빛을 발하시기 원하신다(사60:1). 성령을 받아 영적전쟁에서 승리하기 원하신다.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하면, 영적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고,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없다.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는 안 된다. 제자들이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완전히 변화되었다. 마른 뼈들이 군대가 된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군대가 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연약하고 무력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꿈이 다시 살아났다. 사명의식이 투철한 사람들이 되었다.

  말씀을 전할 때, 사람들이 뒤집어지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자. 성령의 충만함을 받자. 그때 우리는 일어설 수 있다. 강하고 담대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수 있다. 흔들림 없고, 요동함 없는 군대가 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살기가 등등했던 사람이다. 그는 스테반을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을 버리지 않으셨다. 그의 살기를 사랑의 기운으로 바꾸셨다. 성령을 충만히 받은 바울은,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사랑의 기운이 충만했다.

  따라서 무력하다고 낙담하지 말고, 하나님의 시각을 갖자.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가지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불행의 때에도, 말씀과 성령님을 통해 은혜를 공급하신다. 생기가 임해야 활동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서, 귀하게 사용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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