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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제는 힘내서 일어나고, 헌신합시다 (요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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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지지 않고, 때로는 아니 많은 경우는 우리가 원하는 것과는 정 반대의 방향으로 달아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때 우리는 마치 이 세상이 고행처럼 어려운 여정이 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우리가 인내할 수 있고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은 늘 변화와 순환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법칙을 적용받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때로는 슬픔이 소망되고, 눈물이 웃음 되기도 하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들에게 그러한 시대가 언제 무엇으로 오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행을 바란다면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끊임없는 노력만으로 된다고 한다면 우리가 노력조차 할 수 없는-기력이 쇠하고 의지조차 쇠해진 때에는 더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는 이런 소망조차 시들어져 버린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오셔서 그의 삶에 새로운 빛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의 양문, 즉 양이 드나드는 허락된 문의 옆에 베데스다-자비의 집이라고 이름 하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변에는 병자들이 가득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먼저 그 물이 솟아오를 때-동할 때 가장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병이 낫기 때문입니다. 가끔 천사들이 내려오는데 그 천사들이 내려오면 막 물이 동하게 되는데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병이 낫는다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자기의 힘으로 가기에는 병이 들어서 너무 어렵고 또 다른 사람이 자기를 도와서 거기까지 넣어줄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혼자가기에는 몸이 안 되고 다른 사람이 그를 도와줘서 가기에는 주변에 그를 도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안타깝게 연못만을 바라볼 뿐입니다.
마음의 소망이 실망으로 바뀌는 안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사람을 보시고 그 사정을 아시고 다가오셔서 말씀함으로 시작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주여 물이 동할 때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서 내가 가는 사이에 다른 사람이 이미 다 들어가 버립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때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게 됩니다. 인생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며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던 38년 된 최악의 병자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그의 문제의 근원을 해결해주시고 그에게 새로운 삶과 기쁨을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 속에서 우리 삶에 어떠한 어려운 삶의 상황이든지, 혹은 삶의 38년 된 병자처럼 주님 곁에 있기는 하지만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든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 주님의 역사가 함께 하시면 우리들에게 새로운 은혜의 역사들이 열려진다는 사실을 생각해 봅니다. 주님 곁에 있지만 특별한 기쁨이나 감격도 없고, 주님 때문에 특별히 해결된 것도 없어 보이고, 내가 무엇을 헌신해야 한다는 신앙의 사실과는 저 멀리 있는 것 같은, 주님이 나를 통해서 무언가를 이룰 것이라는 꿈은 나와는 관계없는 것 같은 우리들이라도 할지라도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시고 걸어가게 하심으로 우리들에게 새로운 헌신자의 역사를 이루어주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가슴이 설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38년 된 영적으로 기력이 상실된 병자와 같은 성도나 혹은 우리 삶 가운데 너무 지치고 쇠해서 ‘하나님 나는 더 이상 어찌해볼 수가 없습니다.’ 하는 생활의 곤고함을 가진 이들이라고 할지라도 오늘 주님께서 이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삶의 모든 자리를 거두어 일어나 걸어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이루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특별히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 더 생각해 봅니다.

첫 번째는 베데스다, 즉 자비의 집 하나님의 은혜의 곁에 있어도 그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여전히 병든 상태 속에 있는 가련한 사람의 모습을 봅니다.
오늘 <5절>의 말씀을 보니 <거기 38년 된 병자가 있더라> 이 38년 된 병자라는 간단한 서술 한마디로 인해서 이 사람의 모든 육신적인, 영적인 모든 주변의 정황이 대표되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는 내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가련한 때가 있습니다. 베데스다, 즉 자비의 집 곁에 있어도 전혀 자비를 입지 못하고 있는 답답한 모습입니다.
내 눈으로 보아도, 내가 그 길을 원해도 꼼짝달싹 못하는 무기력한 때가 있습니다. 잘 하고 싶은데 잘 안돼요. 마음은 간절한데 이루어지지 않아서 너무 슬프다는 말입니다. 우리 삶의 고통이 극한에 달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병자는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낫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내가 정말 저기에 일등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나을 수 있는데, 나는 혼자서 가기에는 몸이 아파 너무 늦고 다른 사람이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나를 도울 사람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 안타까움-더욱이 문제해결의 방법도 알고 소원은 있지만 내 스스로 해결 못할 답답한 때가 우리 인생에도 있는 것입니다.

더 답답한 것은 우리와 같은 비슷한 처지에 있다가 문제를 해결하고 툴툴 털고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 같이 비슷한 수준에 있는 사람이 그냥 같이 어려웠으면 그나마 마음의 슬픔이 좀 덜할 텐데 우리 인생의 삶에는 나와 비슷한 어려움을 갖고 있었는데, 나는 계속 어려운데 그 사람은 그 문제를 해결하고 가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항상 선택된 후에 선택되지 못하는 남은 자가 된다는 것은 삶의 비감을 더해주는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서 다함께 어려우면 그나마 나은데 그렇지 못하니 좌절감이 더하다는 말입니다.

은혜의 곁에 있으면서 은혜를 전혀 누리지 못하는 답답한 경우입니다.
베데스다-자비의 집, 그러나 실제로 자비를 얻기도 하는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자비를 얻지 못하니 얼마나 난감하고 아프겠습니까?
화창한 날에 더 우울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명절에 더욱 더 쓸쓸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날씨가 좋은 날에 더욱 더 마음속이 흐려지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삶이 곤고하고 시인하는 고통과 아픔으로 쓰라려할 때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과 같은 때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러한 우리들에게 인간의 문제 해결은 결국 예수님과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38년 된 병자가 있는데 <6절> 말씀을 보니 <예수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오랜 줄을 아시고>그러니까 이 사람은 누워서 지내야 할 만한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보니 이미 병이 오랜 줄을 아십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이 사람의 인생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합니다. 오늘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머지 인생은 평생 연못가에서 기다리다가 결국 세상을 떠났을 수도 있습니다. 안타까운 한스러운 삶의 마감일수도 있었습니다. 우리 삶에는 정말 애쓰고 힘써도 우리 힘만 가지고는 해결하지 못해서 특별한 도움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우리 스스로 풀지 못하는 문제가 얼마든지 많습니다.
우리의 지혜와 지식과 힘과 노력의 한계를 느낄 때가 너무 많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육신적인 문제뿐 아니라 영적인 문제, 즉 우리 마음의 문제, 우리 능력의 범위를 벗어나는 삶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정말 나는 능력이 안 되는데 그것을 해결해야만 되는 그와 같은 삶의 장면에 맞닿을 때 우리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어려움이나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 또는 안타까움이 있을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하는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배가 고프면 식당에 갑니다. 아니면 시장에서 음식을 사오던지, 아니면 집에서 음식을 만들 겁니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갑니다. 머리카락이 길게 자라면 목욕탕에 가서 이발을 하든지 아니면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자를 겁니다. 옷이 필요하다면 옷가게에 가서 옷을 살 겁니다.
마음에 문제가 생기고 우리 삶의 일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내 능력을 넘어서는 수준의 일이 있을 때 과연 우리는 누구를 찾아가느냐 하는 겁니다.

오늘 성경을 보니 이 병자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결국 예수님이 다가오셔서 해결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접근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앞에 나타나셨다는 것은 우리의 필요와 소원을 이미 아시고 그것을 해결해 주시려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은 내 소원을 아시고 그것을 들어주시려는 자비심의 발동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자비와 사랑이 마음뿐 아니라 실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가 선언적인 교회가 되지 말고, 실천적인 교회가 돼야 된다고 늘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선언적인 교회가 아니라 실천적인 교회가 돼야 된다고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실천을 하신 분입니다. 불쌍하고 안됐다고 마음으로 슬피 여기고 끝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긍휼히 여기심은 그 사람의 문제의 해결이었습니다.
배고픈 자를 보시고 마음이 민망하니 오병이어의 기적을 만들어서 그들을 먹이셨고, 병든 자를 보니 마음이 아파 그들을 고치셨고, 그리고 귀신들린 자를 보니 그들의 마음이 보여 너무 마음이 슬퍼 그들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 속에서 우리가 그것을 헤쳐 나가기를 기다리지만은 않습니다. 상황자체를 만들고 새롭게 조성하셔서 우리에게 어려움을 해결해주시는 분입니다.
즉 물이 동할 때를 기다렸다가 그 사람을 넣어주지 않았습니다. 물이 동할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야 안 되겠다. 지금 물이 동하면 내가 너를 넣어줄 텐데 물이 동하지 않으니 기회가 안 된다. 몸조리 잘해라.’ 하고 가지 않고 물이 동하지 않으니 예수님께서는 그 가운데 넣지도 않으시고 <일어나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항상 이 사람이 생각도 못했던 방법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은혜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해결이 될 텐데 그것이 안돼서 가슴 아파할 때 주님은 다가와서 내가 해결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그런 내용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가지고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상황 속에서 우리를 견디고 이겨낼 뿐만 아니라, 상황자체를 바꿔버려서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도 그 가운데 우리가 승리자가 되게 만들기도 하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기쁘고 감격스럽게 만들어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접근하십니다. 오늘 이렇게 우리를 주님이 초청하신 것도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한 겁니다.

어느 날 우리가 주님 앞에 찾아왔다는 것은 이미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셨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마음에 초청을 하시고 우리가 응답하여 이 자리에 오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찌 여기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은 다 주님을 만나시는 분입니다. 만나고 계신 분이고 주님이 다가오신 분이란 말입니다.
일 이억 대의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방법으로 영광과 기쁨과 꿈을 이루기 위해서 애썼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느낀 것은 마지막 한계와 허무였습니다.

성경에서 이 세상의 모든 자보다 지혜롭고 가장 많은 것을 누렸던 솔로몬은 마지막 전도서에서 고백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되다>라는 것입니다.
주님 없는 이 세상, 하나님 없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결국 우리 삶에 소망을 주실 분이나 대상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께서 내 삶에 찾아오셔서 문제가 해결되고 우리 삶에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맛있는 음식도 계속 먹다보면 익숙해져서 별다른 맛을 느끼지 못합니다. 음식이 계속 맛있으려면 우리는 건강을 유지하고, 그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욕을 느낄 수 있는 건강을 회복해야 합니다. 천하의 진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건강해지면 음식이 맛있어질 것입니다. 세상이 아름다우려면 우리 주변에 많은 좋은 것을 꾸며놓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상황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을 준비하는 것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건물도 그 건물 안에 화장실도 있고, 쓰레기통도 있고, 모든 이러저러한 면이 있을진대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워지려면 결국 우리가 완벽하게 모든 것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갖춘 것을 기쁨과 감사와 사랑과 아름다움으로 볼 수 있는 마음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문제, 나아가 영혼의 문제를 아름답고 기쁘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뿐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단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접근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삭개오는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소경거지 바디메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소리 질러 외쳤습니다. 이 병자는 본인은 몰랐는데 예수님이 직접 다가오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주님을 잘 알지 못해도 주님이 나에게 다가오셔서 나에게 새로운 역사와 은총을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예수 믿어도 어려운 일도 많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많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결되지 않은 것 같아도 내가 해결되는 그 상황보다 더 큰 이가 되어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 삶은 언제든지 해결이상의 새로운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제가 예배시간에 봉헌기도를 드리다보면 이런 기도를 자주 하게 됩니다.
‘하나님, 세상에는 많은 것을 가지고도 늘 부족하고 없다고 허덕거리며 사는 사람도 있는데 우리는 적은 것 주셨어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은혜와 영광을 드릴 수 있고, 작은 것 중에서도 우리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자처럼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것도 있고,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것도 있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풍요를 느낄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어떤 현상-물리적인 현상 뿐 아니라 그 현상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축복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입맛이 없으면 좋은 음식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입맛이 좋아지도록 건강을 회복하고 튼튼해지면 어떤 음식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위해 예수님은 어떤 형태로든지 우리가 예수님은 만날 기회를 만들어 우리들에게 다가오십니다. ‘나는 전혀 예수님과 상관없었다. 아무런 관심도 없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찾아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은 우리 주님께서 주신 은혜와 능력과 영광을 체험하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사실 입니다.

<누가복음 5:1-11절>을 보면 게네사렛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는 베드로의 모습이 나옵니다.
평생 물고기를 잡는 것이 직업인 어부 베드로에게 밤새도록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상황이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다가오시더니 ‘깊은데 그물을 내려라’
어부에게 목수출신인 예수님이 애길 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까? 그런데 그 말씀에 따라서 깊은데 그물을 내렸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서 한 배에는 모자라 친구의 배를 불러서 두 배에 나눠서 실었어요. 물 밖으로 나갔습니다. 예수님 앞에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 나는 어부고 예수님은 목수출신인데 목수출신인 사람이 어부인 나에게 물고기를 잡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셔서 그대로 했더니 많이 잡았습니다. 정말 놀랐습니다. 정말 이렇게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주님의 초청을 받고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물질적인 현상계에서 신적인 역사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삶에는 물질적인 현상계 속에서 신적인 역사와 능력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소망해야 합니다.
봄에 남쪽지방에 꽃이 피기 시작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조금 있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중부지방에도 아마 꽃이 필 것을 압니다. 모든 것은 징후가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은, 주님이 내 앞에 서 계시다는 것은 분명한 징후가 있습니다. 내가 주님의 마음을 느끼고, 내가 주님 앞에 나아오고 싶고, 기도하고 싶고, 찬송하고 싶고, 말씀이 그립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고 싶고, 하나님께 헌신하고 싶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의 사람 되고 싶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여러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은 이런 마음이 우리에게 생긴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수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나를 택해서 은혜를 주시겠다고 하시는 겁니까? 정말 내가 맞는 겁니까? 나는 그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데 내가 정말 은혜를 받아도 되는 겁니까? 나도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까?

저희 청년공동체와 의료 선교단에서 여러 해 동안 필리핀의 기마라스 섬이라는 곳에 가서 여름마다 선교를 하고 왔습니다. (요즘 청년들은 겨울에도 계속 갑니다.) 제 작년-2년 전에 의료 선교단이 여름에 선교를 갔다가 무장 강도 단원들에게 밤에 위협을 받고, 밤에 총구를 대고 해서 물건도 뺏기고 가지고 있는 돈도 다 빼앗기고 굉장히 어려움을 겪었어요. 다행히 사람 안 다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이 신문에 잘 나오는 필리핀 반군이었습니다. 필리핀 반군인데 한국 사람이 왔다니까 정말 그들을 도우러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 다 볼 것 없다 우리는 가서 돈만 뺏어오자.’ 이렇게 생각한 것 같아요. 너무 안됐잖아요. 그래서 사람을 총으로 위협하고 돈을 뺏어가고 얼마나 떨리겠어요. 영화에서나 보는 장면이 실제로 보여지니까.

그런데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가지 못하고 전화로 들었었는데 “여기서 부터가 중요하다. 정말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 사람들에게 사랑의 선교를 한다면 거기 있는 분들도 인정을 하게 될 것이고, 거기에 눌려서 우리가 어려움을 겪고 퇴각한다면 우리는 어려우면 그냥 돌아가는 사람들이 되고, 선교도 결국 그런 수준에서 끝나고 말 것이다.” 이렇게 부탁을 드렸는데 정말 이 선교단원들이 정성껏 기도하고 마음에 뜨거운 심정을 가지고 두려운 마음속에서도 더 기도하며 아름답게 선교를 잘 진행하고 마치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좋은 결과와 인상과 많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다음에 2월이 되어서(요즘 청년들은 주로 겨울에 많이 가고, 여름에 조금 가는데)청년들 100명 정도 같이 가서 선교를 하고 왔는데, 제가 해결해야 될 문제가 있어서 특별히 그곳에 있는 지도자 분들을 만날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경찰서에 계신 분, 행정지도자, 의회 지도자, 기타 관리가 되는 분들인데, 우리는 20년 정도 계획을 가지고 진행하고 있고, 또 이러이러한 여러분들에게 제공하는 일을 하려고 한다고 여러 가지 설명을 드리고, 꼭 필요한 일이라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경찰책임자가 정식으로 사과를 하고 앞으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안전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하고 가있는 동안, 그 이후에도 계속 밤에도 경찰이 와서 다 지키고, 왜냐하면 한밤중에 주로 총 들고 오니까 경찰이 낮에도 지키고, 어딜 가도 쭉 지켰습니다.
작년에 캄보디아 갈 때도 마찬가지로 경험이 있으니까 부탁을 해서 혹시라도 만일의 어려움에 대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이러저러한 얘기를 하고 맨 나중에 거기에 계신 사람중의 한분이 의미심장하게 질문을 해요.
“왜 하필이면 당신들은 이 기마라스에 와서 우리를 도우려고 하느냐?” 라는 겁니다. “왜 그 수많은 곳 중에 당신이 하필이면 왜 여기에 왔느냐?” 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대답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왜 거길 갔어요. 대답은 하나밖에 없잖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이리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게 정답이잖아요. 사실이고요. 하나님이 인도하시지 않으면 생전 어디 알지도 못하고, 필리핀 중에서도 이 기마라스 섬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거기에 육천 개인가 삼천 개인가 하는 섬이 있다는데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하필이면 왜 거기에 갔겠습니까? 사람을 통해서 연결이 되고, 가 봤더니 한 번 가고 또 가게 되고, 그러다보니 비전이 생겨서 20년 동안 가겠다고 생각한 것이겠죠.

그런데 결국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것은 성령님이 아니십니까? 성령께서 인도하셔서 우리가 그리로 간 것입니다. 작년에도 캄보디아 갔다가 겨울에도 잠깐 소수의 인원이 다녀오고, 올여름에 한 150-160명 정도가 신청을 해서 다녀올 계획이 있는데요. 왜 하필이면 캄보디아에서도 그 지역을 갔을까? 그걸 뭐로 설명을 합니까? 설명할 방법이 없잖아요. 하나님이 인도하셨으니까 간 것입니다.
우리 삶에 이런 일이 많지 않습니까? 우리 삶에 이루어지는 것을 어떻게 설명을 합니까?
하필이면 왜 나냐, 하필이며 왜 너냐, 내가 하필이면 왜 그 일을 하냐, 내가 하필이면 그 사람을 만나냐, 뭐로 설명합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때문에 섭리 가운데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모든 일이 결국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필이면 왜 우리가 거기에 가겠습니까? 하필이면 왜 내가 수많은 사람 중에서 내가 이 자리에 와서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하필이면 왜 내가 예수님을 만나서 놀라운 능력과 은혜의 역사를 이루고 헌신하겠습니까? 하는 겁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과 섭리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내가 오늘 왜 이 자리에 왔을까?
나는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될까?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될까?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세 번째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소원을 아시고 그 소원의 근원자체를 들어주십니다. 이 병자는 낫고 싶었어요. 일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능력으로는 안 되고 다른 사람이 도와줘야 되는데 도와주지도 못하고 하니까 정말 안타까웠던 겁니다.
주님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심을 새삼스럽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소원을 아시고 우리들에게 다가오십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드리는 것이 부담스러운가요?
부담스러우면 굉장히 어려울 것입니다. 찬송해도 빨리 끝나지도 않고, 기도하는데 굉장히 오래하시는 것 같고, 우리 장로님들은 기도 굉장히 짧게 합니다.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교회 중에서 장로님들의 기도가 제일 짧은 교회가 우리 교회일겁니다. 정말 짧게 기도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아주 중요한 내용은 다 기도하시잖아요. 정말 우리 교인들은 행복한 교인입니다. 우리 장로님들이 너무너무 훌륭하셔서 짧은 시간에도 모든 기도를 다 하시는데 그것도 기쁘게 여기셔야 합니다.
설교는 들으면 무슨 생각하다보면 ‘어 언제 설교 끝났네.’ 이 생각밖에 안 납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주님께서 나를 부르셨으니 내가 정말 주의 뜻 가운데 부름을 받아서 교회에 가는 건데 내가 하나님께 가서 내 마음과 정성을 다해 예배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해야 돼요?
정말 우리 마음에 예배당에 와서 앉자마자 우리마음에 은혜가 임할 겁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이번 주에도 이렇게 예배당에 와서 이 의자에 앉을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찬송을 불러도 감격이 되고, 기도할 때 우리 장로님들이 기도하시는데 그 기도에 같이 마음이 동참돼서 내 마음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 같아요. 말씀을 들어도 꼭 내게 하는 말씀과 같고, 그것이 그렇게 은혜가 되고, 정말 예배시간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께 은혜가 된단 말입니다. 또 부담이 아니라 내게 기쁨입니다. 짐이 아니라 힘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은 우리에게 뭘 요구하고-주님이 우리에게 헌신을 요청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요청하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은혜를 주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벽기도회 때 늘 우리는 기도하고 나서 이렇게 인사 합니다.
오늘 인사 한 번 합시다.
‘여호와를 기대합시다. 주님은 항상 우리의 기대이상 이십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인사하고 반드시 기도합니다.
여호와를 기대하고 또 주님은 우리의 기대이상이심을 늘 믿고 기도하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내 마음에 믿음의 마음이 생겼다.’는 것은 우리에게 부담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은 기쁨입니다.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너무나 좋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우리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자비하심 때문에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내 능력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자비 때문입니다.

작년에 있었던 일인데요. 저희 아이가 생일을 맞이하셨어요. 올해 중학생이 되었는데 막내아이가 초등학교 아이생일이니까 몇 명 불러서 집에서 음식도 하고, 아니면 식당에 가서 요즘은 아이들 밥도 한 그릇씩 사주고 그러나 봐요. 마침 생일인데 그 즈음에 개교기념일이라서 그날 논다고 해요. 그러니까 갑자기 뭐라고 얘기 하냐면 “엄마, 아빠, 나는 이번 기회에 우리 집에서 애들 초청 안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더니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에버랜드에 내가 가고 싶은데 애들을 초청해서 내가 입장료를 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차비하고 점심값은 각자 가져오고 그 입장료는 내가 생일이니까 초청해서 개교기념일이라서 노니까 같이 가서 생일기념으로 놀았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굉장히 큰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한 번도 혼자 놀러가 본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드디어 부모로부터 탈출해서 홀로서기를 시도하는 것인데 굉장히 좋은 기회죠. 그래서 저도 큰마음으로 허락을 했습니다.
“잘했다, 아빠가 그 입장료 줄 테니까, 그런데 한 가지 절대 애들한테 점심값도 받지 말고 네가 점심값도 내주고 차비도 내줘라.” 그리고 허락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비가 온다고 징징거리는 겁니다. 난 일기예보에 그렇게 관심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계속 일기예보를 보고 징징거리는 거예요. 그런데 가는 날 보니까 아침에 가고 나서 정말 비가 주룩주룩 오기 시작 했습니다. ‘아휴 어린애 마음에 그렇게 기대하고 사모했는데 비가 왔습니다. 걱정은 됐지만 알아서 어떻게 하겠지. 알아서 하도록 놔두자.’

그런데 점심때쯤 돼서 걱정이 돼서 전화를 한번 했습니다. 그랬더니 뭐라고 얘기 하냐면 걱정하는 기색은 전혀 안보이고 “우리 우비입고 신나게 놀고 있어요.” 그러더라고요. 제가 생각하기에 ‘애들도 영악하다, 우비사서 입는 것 가르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사서 입고 돌아다닐까?’ 언제 왔느냐면 그렇게 비가 왔는데도 깜깜한 밤에 왔어요.

부모를 탈출해서 이제 홀로 서는 거죠. 간섭하면 크지 못할 것 같아서 목구멍까지 나오는 소리 참고 절대 안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도 오고 춥고 하는데 아이들이 이러다 감기 걸리면 어떻게 하나? 우리 아이도 감기 걸리고 초청해서 온 아이까지 감기 걸리면 부모님들 입장에서 생각해서 괜히 초청해서 감기까지 걸리게 하면 굉장히 안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저희 아이와 다른 아이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꼭 감기 걸리지 않고 잘 놀다 가게 해 주세요.’

제가 마음에 깨달아지는 것이 있더라고요. 뭐가 깨달아지냐면 첫째는 그 아이는 죽기까지 제가 그 아이를 위해서 감기 들지 말라고 기도한 것을 모를 겁니다. 오늘 예배도 여기에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모르잖아요.
두 번째는 제가 그 생각을 하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늘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아비가 기도하는 것 자식이 모르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역사하시고 돌봐주신 은혜를 우리가 늘 모르고 사는 구나.

날마다 편안하면 내가 주변 잘 챙겨서 편안하다 생각하고, 날마다 좋은 일 있으면 내가 노력해서 좋다고 생각하는 거 아닌가, 정말 하나님이 손끝하나 다치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을 다 막아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편안한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아비가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지만 그 자식은 기도한 것을 모릅니다.
그렇다고 내가 널 위해 기도했다고 얘기할 것도 아니고요.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시고 보호하시는 것을 우리가 모르고 그냥 산다는 것입니다. 섭섭한 것만 얘기하고 안 들어주신 것만 얘기하고 우리 하나님의 뜻을 모르니 늘 이렇게 사는 겁니다. 이것을 생각해보니까 너무너무 감사한 것 같아요.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하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말씀으로 명하심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일어나 걸어가라 하니 그 사람이 곧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갔단 말입니다. 주님은 관념적인 분이 아니라, 매우 실제적인 분입니다. 우리 삶의 직접적인 장면에 개입하셔서 우리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능력 이상의 분입니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고 우리보다 더 염려 걱정하시고 그것을 해결해 주실 능력이 있는 겁니다. 아무리 원해도 능력이 없으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능력도 있으시고 우리에 대한 자비심도 있으신 거죠. 우리는 내가 못한다고 주님이 못하거나 도와주시지 못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자리를 들고 일어서야 합니다. 주님의 우리를 향하여 명하신 삶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린 주님의 해결의 음성을 듣고 우리의 자리를 들고 일어나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를 괴롭히는 과거의 어두움과 고통의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이제까지 우리가 감당하지 못했던 삶의 일들을 주님으로 인해 해결할 새 능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못했던 것을 합니다. 올해 연초에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올해는 어떻게 하면 된다고 말씀을 드렸냐면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자 따라서 합시다.
“가보지 못한 곳까지 가보며,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을 하며, 내 능력의 범주 밖이라고 느꼈던 것을 내 능력의 범주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한 번도 못했던 일들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곳까지 가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건 내 능력이 아니야 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우리의 능력을 키워서 내 능력의 범주 안으로 끌어들이는 겁니다. 그만큼 우리는 확장되고 커지며 하나님의 역사가운데 새로운 은혜의 역사를 체험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날마다 기도하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 성도님들께 한 가지 말씀을 드리고 맺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기가 추구하는 목표에 따라 삶을 살아갑니다. 어떤 분은 그래도 괜찮아서 기쁨과 감사 속에 살아갑니다. 어떤 경우는 늘 삶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삽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지금 주어진 여건이 어떤 것이든지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체험하며 영적인 충만 가운데 기쁨으로 살아가십니까?
또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진정한 가치 있는 일에 전념하고 계십니까?
아무런 삶의 후회가 없어 내가 하나님이 나를 지금 불러 가신다고 해도 나는 이제까지 살아온 것 감사하다 생각하고 영광으로 그 나라에 가시기를 소원합니까?
아니면 내가 사는 것이 이런 것은 아닌데, 오늘 베데스다 못가 즉 은혜의 집 옆에 있으면서도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처럼 누가 못에 넣어주기를, 그래서 낫게 되기를 원하지만 아무도 그를 도와주는 사람 없어 38년이나 된 병든 몸을 가지고 고초를 겪는 사람들처럼 괴로워하는 분은 없습니까?
가진 것을 놓지 못해서,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해서, 이제까지 있었던 과거의 좌절과 고통의 상처 때문에 괴로워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이 시간 마음을 정리합시다.
이제는 힘을 내서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38년 된 병과 같은-영적인 무기력, 우리가 어리석어 바르지 못한 욕심, 정리해야만 하는 상처로 남은 패배감,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좌절감을 다 씻어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은혜를 채워야 합니다.
누가 베데스다 못가에 나를 넣어주지 않아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내가 생각도 못했던 새로운 은혜를 주심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님을 붙잡고 일어나야 합니다.
바로 예배시간에 주님을 붙잡고 일어나야 합니다.
언제까지 병든 자의 모습으로 있을 수 없습니다. 씩씩한 성도로써 자신 있게 두려움 없이 헌신하고 그것으로 인해 기뻐하며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우리는 체험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의 염려로 위축된 성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가지고 분명히 일어나며,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신의 삶이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기대와 소망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예배시간에 마음에 결단하셔서 어떤 어려움의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붙들고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헌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통해서 많은 사람에게 영광을 이루게 하시는 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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