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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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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 13:4-7)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을 표현할 때 흔히 “눈이 멀었다”고 합니다. 사랑은 눈이 멀어서 다른 것은 보이지 않고 그 상대방만 보입니다. 사랑에 눈이 먼 낙랑 공주는 호동 왕자를 위하여 적이 오면 스스로 울리던 자명고(自鳴鼓)를 찢고 맙니다. 사랑에 눈이 먼 로미오와 줄리엣은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맙니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도 대단합니다. 여러분 단장(斷腸)이란 말을 아십니까? 창자가 끊어진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원숭이의 새끼 사랑에서 나온 말입니다. 중국의 고사에 의하면 어떤 한 군사가 원숭이 새끼를 잡아 배에 태웠습니다. 이 모습을 본 어미 원숭이가 새끼를 좇아 왔지만 강물 때문에 배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배를 따라서 강 옆의 벼랑길을 소리 지르며 좇아갑니다. 그렇게 100여리를 달리다 마침 배가 강기슭에 닿자 배로 뛰어들었는데 그만 기운이 진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몸을 해부해보니 창자가 토막토막으로 끊어져 있었습니다. 끔찍한 새끼 사랑입니다. 자녀들의 부모 사랑으로 대표되는 것으로는 효녀 심청이의 사랑입니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인당수에 뛰어듭니다.

사랑하게 되면 이처럼 맹목(盲目), 즉 눈이 멉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말할 때 눈에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외에 다른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진리 앞에 서는 사랑

오늘은 사랑의 열한 번째 정의입니다. 그 정의는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은 눈이 가리워지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면서도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을 분명히 봅니다. 진리를 보지 못하는 사랑은 서로를 죽음과 파멸로 이끕니다. 맹목적인 사랑은 사랑의 그 지순함을 칭찬할 수는 있지만 서로를 살리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면서도 상대방을 온전히 볼 수 있는 것 이것이 진리와 함께 하는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믿고 싶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온전히 보는 것입니다. 한자 성어에 ‘호시우행(虎視牛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호랑이처럼 보되 소처럼 걷는다는 뜻입니다. 호랑이의 눈이 얼마나 매섭습니까? 소는 또 얼마나 우직하게 자기 길만 갑니까? 결국 볼 것은 제대로 보되 그 목표를 향하여 뚜벅뚜벅 우직하게 걸어가는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입니다. 호랑이 눈처럼 진리를 보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우직하게 가는 사랑입니다. 볼 것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1) 자녀 사랑에서

진리를 보지 못하는 사랑은 흔히 부모의 자녀 사랑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자녀가 잘못된 성격이나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데도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어 저러면 안 되는데 저렇게 키우면 안 되는데’ 해도 본인만 모른 채 하고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버릇없는 아이, 남에 대한 배려가 없는 이기적인 아이, 폭력적이거나 아니면 자기 세계로만 빠져드는 아이가 있으면 부모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자기 자녀를 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내 자식은 그렇지 않겠지 하지만 그러는 사이 아이는 성격이나 태도가 그렇게 고착되고 맙니다. 어쩔 때는 아프지만 자기 자녀교육이 잘못되었거나 내 아이가 정상에서 많이 벗어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아이의 장래와 행복을 위해 필요합니다.

아이를 기를 때는 ‘원 스텝 어헤드, 원 스텝 비하인드(one step ahead one step behind)’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아이가 아무리 영재라 해도 다른 아이들보다 한 발짝 앞서가는 정도로만 길러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가 부담을 갖지 않습니다.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뒤쳐질 수 있는데 한 발짝 정도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많이 뒤쳐지면 한 번 자신이나 아이를 한 번 점검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때론 ‘거리’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너무 가까이 있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좀 떨어져서 볼 때 제대로 보입니다. 이것이 부모에게 있어서 진리 앞에 서는 사랑입니다.

2) 부부 사랑에서

남녀 간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 앞에 서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데 상대방에 대해서 온전히 알며 사랑하려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가진 장점만 사랑하거나, 나에게 필요한 것만 채우려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은 장점만 가진 부분적 인간이 아닙니다. 내 필요만 채워주는 소모품도 아닙니다. 약점과 강점, 훌륭한 것과 허물이 함께 어울려 온전한 한 인간이 됩니다. 그 사람 머리만 사랑하거나 그 사람 손이나 심장만 사랑할 수 없습니다. 진리와 함께 하는 사랑은 그 허물까지도 껴안는 사랑입니다.

한 사람을 미워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그 사람의 100% 다 미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중 한 두 가지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미움이 너무 커서 그 사람이 가진 장점이나 좋은 점마저도 삼켜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미운 마음이 들 때 그 사람의 좋은 점 고마운 점을 떠올리면 미움이 어느 정도 감소됩니다.

어떤 분이 사업에 부도를 맞고, 빚에 시달리자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지막으로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상담자 앞에서는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죽고 싶습니다.” 그러나 상담자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모든 것을 다 잃었다고요? 당신의 나이는 어떻습니까?” “예 아직 젊습니다.”
“당신은 가족이 있습니까?” “예 사랑하는 아내와 나를 존경하고 따르는 아이 둘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를 믿어주는 부모님들이 계십니다.”
“당신은 친구들이 있습니까?” “예 저를 신뢰하는 친구가 몇 있습니다”
“당신의 건강은 어떻습니까?” “예 아직 튼튼한 두 다리가 있습니다.”
“당신은 신앙이 있습니까?” “예 저는 매주 교회에 나가며 집사입니다.”
“당신의 실력은 어떻습니까?” “예 몇 가지 인정받는 기술이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 나라는 어떻다고 생각하십시니까?” “예 열심히 일하면 기회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상담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잃은 것이 아니군요.” 

빙산의 일각처럼 우리가 다 잃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우리가 아직 잃지 않은 것이 더 많이 있습니다. 남녀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미워하는 부분은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수면 아래 감추어져 있는 많은 부분은 서로 공통적이면서도 내가 사랑하는 소중한 부분들입니다. 성격, 솜씨, 능력, 친척, 건강, 자녀, 사랑, 순결, 물질 등 한 번 미움 리스트와 사랑 리스트를 만들어 보십시오. 아마 사랑할 부분이 더 많을 것입니다. 한 사람을 진리 안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이처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그대로 보아줄 수 있는 사랑을 말합니다.

3) 자기 사랑에서

또한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은 옳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랑을 말합니다. 옳은 소리는 아픕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 앞에 서기를 두려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13:14-15) 이스라엘 백성이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음이 완악해서, 곧 마음이 무디어져서입니다. 옳은 소리를 듣지 않으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옳은 소리를 듣지 못하면 고칠 수 없고, 고치지 못하면 망하게 됩니다.

목회자들에게 가장 예민한 때는 설교를 마치고 강단을 내려올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지만 설교가 제대로 되지 않을 때는 마치 자신의 작품을 망쳐버린 것처럼 신경이 쓰입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말일지라도 한 마디 평가에 민감해집니다. 어떤 때는 아예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 합니다. 제가 이번에 책을 쓰고 난 후의 태도가 그렇습니다. 예스24시나 알라딘에 서평이 실려 있는데 그 서평을 그대로 읽기가 두렵습니다. 스치듯이 빠른 속도로 읽을 뿐이지 정독하려면 상당한 긴장감을 가지고 읽어야 합니다. 왜? 쓴 소리를 듣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연예인들이 자기 홈페이지 댓글에 민감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평가를 두려워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중 자의식이 강한 사람은 특히 그러합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고 만약 그것이 옳은 평가라면 기쁘게 듣고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평가에 민감해 진 것은 아직도 옛 자아가 덜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옛 자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지나치게 민감한 것은 자기 발전이나 행복을 위해서도 좋지 못합니다.

잘못을 했으면 솔직히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자기에 대한 어떤 비판도 받아들일 수 있는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세상에 도둑질과 같은 죄만 아니라면 부끄럽거나 두려워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두려움의 근원은 자기 확신의 부족에서 기인합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서는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이는 진리와 함께 하는 자의 당당함입니다. 내가 진리 안에 서 있으면 그 외에 달리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확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진리 앞에 서 있지 못한 것에 두려워하기보다는 자기 체면이나 자기 평판에 대해서 더 두려워합니다. 자아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이 옛자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진리 앞에 당당히 서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매일 십자가를 묵상하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라지고 그리스도만 남습니다.

진리와 함께 하는 사랑

진리와 함께 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고 말씀하십니다. 타종교와 기독교는 진리 개념 자체가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타종교나 일반 철학에서 진리라고 하면 어떤 원리나 말씀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우주의 근원은 이데아다”(플라톤) “인생은 고해다”(불교) 같은 것을 진리라고 합니다. 삶을 통합할 수 있고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있는 어떤 개념이 나 원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진리는 원리가 아니라 예수라는 인격 자체입니다. 성경에서는 ‘나를 믿느냐’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지 객관적인 원리나 깨달음을 질문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에게는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나 수행과정이 중요하지만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는 예수님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의해 구원이 결정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말은 달리 ‘사랑은 예수님과 함께 기뻐한다’고 바꿀 수 있습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부간의 사랑이나 부모 자녀 간의 사랑에서 그 중심에는 예수님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가정 식구 수를 셀 때는 한 분을 꼭 더해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자는 침대 방에도 계셔야 하고 거실과 아이들 방에도 함께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방까지 들어오시면 좀 거북하지 않나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 안방에 십자가를 걸어놓거나 예수님의 초상화를 걸어 놓는다면 좀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안방은 우리의 사생활이 보장되고 우리의 허물이 그대로 노출되어도 부끄러움이 없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경건한 신혼부부는 첫날밤을 지내기 전에 둘이 손잡고 기도하거나 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그 경건함에 놀라기도 하지만 웬 지 부부의 은밀한 사생활이 종교에 의해서 침해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장차 천국에 가서입니다. 그곳은 항상 예수님 앞에 노출되어 있고,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야 할 곳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천국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계22:5) 밤과 낮이 없고, 등불도 필요 없고 24시간 하나님의 빛이 환하게 비추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이 좀 불편한 분처럼 생각되고 있는 이유는 예수님은 거룩한 분이고 우리 생활은 거룩과는 상관없는 사소하고 은밀한 영역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청교도들의 신앙 영향이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원죄설을 믿었습니다. 그 원죄는 인간의 출생과 유전을 통해서 전달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쾌락과 방탕은 죄를 조장한다하여 억제하려 하였습니다. 부부간의 성과 사랑에 대해서 극히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생활 전반에 금욕적 생활을 요구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 안방에 있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과 사랑을 만들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분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열심히 노동하고 있는 아담에게 하와를 주어 가정을 갖게 하신 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저는 성경에 아가서가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아가서는 현대인의 눈으로 보더라도 정말 세속적이고 은밀한 남녀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바로 이 아가서를 성경으로 만드셨습니다.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아1:2-3) 아가서는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을 노래한 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내게 입맞추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는 사람은 솔로몬이 아니고 술람미 여인입니다. 사랑의 표현에 여자가 더 적극적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이 아름답고 향기롭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자신에 대해서는 검붉은 피부를 가진 건강한 여인으로 묘사합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 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아1:5-6) 구릿빛 피부를 가진 여자가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남자를 유혹합니다. 아가서를 읽어갈수록 표현의 농도는 진해지고 더 은밀해집니다. 5장 2절은 그 표현이 더 노골적입니다.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야밤에 침실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통속적인 남녀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8:6)와 같은 유명한 구절도 아가서에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옛날부터 이 아가서를 어떻게 해석할지 논란이 많았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 구절을 남녀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사랑을 노래한 시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침실로 유혹하는 듯한 노골적인 표현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통은 교회에도 계승되어 아가서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매우 강합니다. 어떤 신비주의자들은 신비경 속에서 하나님과의 하나 되는 연합을 노래한 시로 이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가서에서 그리고 있는 두 남녀의 사랑은 다름 아닌 에덴 동산에서 사랑을 나누던 아담과 하와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발가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이 말은 단순히 정신적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인 결합까지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며, 이미 타락 전에 인간에게 주신 본질적인 축복입니다.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나누고 있는 성과 사랑은 단순한 쾌락이나 하나님과는 관계없는 인간적인 행위라거나 부정하거나 불결한 것들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이 부부 사이에 계셔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씀할 때 이는 단순히 아가페적인 고귀한 희생적 사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로스 사랑을 비롯한 모든 사랑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사실 우리는 부부간이나 남녀간의 사랑에서보다 더 지극하고도 깊은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들이 즐겨 부르는 유행가 가사도 그렇고, 즐겨 읽는 소설들 대부분이 다 남녀의 사랑 타령입니다. 이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며, 또 이 사랑이 하나님께로부터 연유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다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남녀 관계나 부부 관계에 끼어들어 우리 인생을 재미없게 만드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듭니다. 이기적으로 자기 욕망만을 취하려는 자에게 자기 희생을 알게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쾌락에 노예가 되어 인생을 허무하게 보내는 자들로 하여금 절제와 겸손을 알게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행복을 찾아 먼 곳으로만 헤매는 사람들에게 바로 가까이에 행복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시는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사랑을 더 풍요롭게 합니다. 예수님이 부부 사이에 계시지 않다면 그 사랑은 이기적이며, 단순히 쾌락만을 좇아가는 사랑이 되기 쉽습니다. 또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는 부부간의 온전한 만남도 어려워질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유행가의 가사가 대부분 슬프거나 비극적인 이유는 그 안에 사랑만 있지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이며, 이는 곧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랑입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은 진리를 향하여 함께 달려 나가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사랑으로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그 사랑은 곧 소진되고 맙니다. 사랑은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입니다. 부부가 하나라고 할 때 그것은 두 사람의 성격이나 취향이 다 똑같아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남녀가 만날 때는 서로가 부족합니다.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부가 된 이상 이제 바라보는 방향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해 함께 달려 나가는 것입니다. 그 궁극의 목표는 우리 인생의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서로 격려하며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도록 돕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사랑이 바라보는 목표 때문입니다. 그 바라보는 것이 숭고하고 영원한 것일수록 사랑은 더 빛납니다. 사랑이 목표를 상실한 순간 사랑은 치졸한 사랑싸움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우리를 부부 관계로, 부모 자식관계로, 또 교회라는 공동체로 만나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 만남을 통해 영원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은 바로 사랑이 추구해야 하는 목표를 가리키고 있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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