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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부주일] 지식을 따라 (벧전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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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따라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남편 된 자로서 자신의 아내를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이와 같이”라는 부사는 앞선 구절(1-6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도리, 곧 남편에게 복종할 것과 일체의 거룩한 단정함으로 남편에게 행실의 모본을 통해 감화를 끼치라는 말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향하여 거룩하고 신실한 삶을 살아야 되는 것처럼 남편 또한 아내에게 그렇게 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남편이 아내를 대하는 태도는 하나님과 그 남편과의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고 연약한 그릇으로 알고 생명의 유업으로 알고 귀히 여겨라 왜냐하면 너희의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려 함이라” 아내를 올바른 방법으로 대하지 않으면 기도가 막히고, 막힌 기도생활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의 공급을 차단하여 신자로서의 삶에 고갈(枯渴)이 온다는 것을 사도는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I.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

우리의 신앙생활은 단지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과 은혜가 넘치는 거룩한 삶을 목표로 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생명과 은혜에 넘치는 삶을 살 때에 우리들은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목적대로 살 수 있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대로 살아갈 때에 우리는 참으로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정의 기초가 되는 부부 관계, 특별한 아내를 향한 남편의 사랑은 어떻게 나타나야 할까요? 성경은 크게 두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A. 연약한 그릇

첫째로, 그 아내를 ‘연약한 그릇’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스큐오스’(skeu'o")라고 되어 있는 이 그릇이라는 단어는 어떤 특정한 모양의 그릇이라기보다는 무엇인가 담는데 사용하는 모든 그릇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이 ‘그릇’이라고 하는 단어는 성경에서 사명을 가진 자를 가리키는 비유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디모데후서를 보면, 사도 바울이 교회에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모든 성도들을 목적에 맞게끔 선택하셨고 그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개진합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그릇이 있는데 금 그릇, 은 그릇, 귀하게 쓰는 그릇, 천하게 쓰는 그릇 등등 여러 종류의 그릇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한 사람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무엇인가 용도에 맞게 사용되는 모습을 그려낸 것입니다. 이 그릇이 사명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중요한 그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도 바울을 부르시는 장면 속에 더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구원을 받은 사도 바울을 귀한 사람으로 쓰셨는데, 이 바울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가 이방과 임금과 나라들을 나에게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택한 내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아내의 삶이 남편의 삶에 종속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한 자매는 해외 선교에 꿈을 두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나 분명하게 자신을 해외 선교를 위해 부르셨다고 수해 동안 간증하더니 시골교회를 섬기는 어떤 목회자에게 시집을 가버렸습니다. 해외선교를 향한 그 꿈이 자매를 향한 하나님의 뜻인지, 아니면 자매만의 생각이었는지를 더 두고 봐야겠지만 이처럼 여자가 가진 꿈은 독립적이지 않고 어떤 남성을 만나 결혼을 하느냐에 의해서 좌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여자에게는 특별한 소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를 따라가기 마련이기에 남자에게 주신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여자는 거기에 종속되고 부속품처럼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아내를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이 그릇’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록 그 아내와 남편이 결국은 같은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지라도 그 사명(使命)은 각각 따로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숙한 남편은 아내가 자기를 돕는다고 해서 아내를 자신의 종처럼 생각하거나 자신의 일을 돕기 위해서 시중드는 사람처럼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아내 역시 남편과 함께 동일하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남편은 바로 그 일을 위해 머리로 쓰임을 받고, 아내는 남편과 같은 머리는 아니지만 남편을 온전케 해서 그 사명을 완수하는 데에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자신의 고유한 일을 가지고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남편들은 아내를 하나님의 뜻이 계셔서 택하신 독자적인 그릇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날처럼 가정의 가치가 많이 허물어진 시대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 가정을 바르게 세울 수 있을까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들은 어떻게 하든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을 가르치려고 많이 애를 쓰지만 잘 안됩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데는 두 종류의 사랑이 있는데 하나는 애완견적 사랑(비인격적 사랑)과 인격적 사랑입니다. 첫째, 애완견적 사랑은 지시한 대로 말을 잘 듣고 복종하기 때문에 뭔가를 보답해 주는 식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근본적으로는 아내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내를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남편들 가운데 다수의 사람들이 아내를 자신과 함께 동등하게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아서 살아가는 은혜의 그릇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다툼의 원인을 남편인 자신은 아내를 사랑할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끝났다는데 아내는 사랑받을 짓을 안 한다는 것으로 돌립니다. 그런 사랑이 바로 애완견적인 사랑입니다. 이런 애완견적 사랑은 베푸는 사람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그 사랑에 희희낙락(喜喜樂樂)하는 생각 없는 아내들도 문제가 많습니다.

둘째,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인격적인 사랑은 서로를 고치려 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인격적인 사랑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어떤 이익 때문에 베푸는 사랑이 아니라 상대방이 목적 그 자체가 되어서 베푸는 사랑입니다. 부부의 사랑은 서로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인정해 주며, 그 사랑의 질서 안에서 서로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데서 오는 사랑입니다. 자신의 인격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어서 그 사랑으로 인한 자비심으로 말미암아 상대방이 부족할지라도 사랑하는 사랑이 바로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인내를 비롯한 친절과 진리를 기뻐함 등의 모든 소중한 사랑의 특성은 이런 인격적인 사랑 안에서만 나타납니다.

가정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들을 종종 봅니다. 아내의 책임이 아예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나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폭력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아무 대책도 없이 맞고 사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는 남편의 인격을 망가뜨리는 것이기도 하기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의사표시를 해야 됩니다. 내버려두면 폭력은 계속됩니다. 더 무서운 것은 아내가 그 비인격적인 폭력에 길들여진다는 것입니다.

남편들이여, 아내는 “연약한 그릇”임을 항시 기억합시다.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에 더욱더 인격적인 사랑이 필요합니다. 비인격적일 때, 이 그릇은 망가집니다. 집에서 그릇을 꺼내어 쓸 때에 늘 쓰는 쌀바가지나 플라스틱 그릇 같은 것은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발로 차기도 하지만, 귀히 쓰는 유리 그릇은 그렇게 다루지 않습니다. 고운 빛깔 얇은 꽃 모양으로 잘 빚어진 유리그릇들을 우리는 얼마나 조심해서 다룹니까? 아내는 바로 그렇게 조심히 다룰 연약한 그릇입니다. 잘못 다루면 깨어집니다. 오늘 성경은 아내가 고유한 사명을 가지고는 있지만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으신 대로 목적에 맞게 합당하게 쓰이기 위해서는 남편의 보호가 필요함을 이야기 합니다. 인격적인 보호가 필요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아내를 대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우리 아내는 안 약합니다. 체격부터 시작해서 마음에 이르기까지 우리 아내는 산소(living cow) 같은 여자입니다.” 물론 산소(oxygen)가 아니라 산소(living cow) 같이 강한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본질적으로 여성은 약합니다. 그 약함을 깊이 헤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아마 그런 경험을 많이 하셨을 것입니다. 어려운 시절에 심지어는 아버지도 없이 자녀를 키운 홀로 된 어머니가 있을 것입니다. 눈물 한 방울 안 보이고 그렇게 강하게 키운 어머니가 어느 날 남몰래 눈물을 흘린 장면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녀들은 본질적으로 약한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 약함을 보일 수 없을 뿐이지 연약한 그릇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면서 그 아내를 다루어주는 것, 사랑하는 것, 이것이 남편의 도리입니다. 이러한 일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을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 속에서 계속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남편이 지향할 바입니다.

B. 생명의 유업을 공유하는 자

둘째로, “생명의 유업을 함께 얻을 자”라고 했습니다.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들 가운데는 아마도 자신의 아내가 신자이든지, 아니면 불신자이든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만약에 남편인 여러분들의 아내가 이미 예수님을 믿는 아내라고 칩시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배나 더 사랑해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아내가 예수를 믿어서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하나의 지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안에서 그 아내를 깊이 사랑하면 하늘나라의 상급이 있습니다. 아내에 대한 그 사랑은 단지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머리이신 예수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형제가 교회 안에서 일생을 끊임없는 자기 복종 가운데서 자신의 안일과 행복은 잊고 연약하고 고통 받는 지체들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섬기면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칭찬과 사랑을 받겠습니까? 구원받은 나의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께 칭찬 받을 일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이치와 같습니다.

내 아내가 비록 영화배우 같은 미모도 없고, 큰 재력가의 딸도 아니며, 남들만큼 공부도 많이 못했을지라도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하나님을 믿으며 살려고 하는 남편을 위해 기도로 돕고 몸과 마음을 다해 섬기려 하니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함께 생명의 유업을 나눌 자”로 하나님이 그 아내를 선택하셔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수의 몸에 접붙여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아내가 아직까지 예수를 믿지 않고 살아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의 가정 전부를 예수를 믿게 만드셔서 온전한 가정을 삼으시고 싶어 하시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아직 아내의 마음이 굳어져서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남편인 여러분들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아내의 회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명을 위해 여러분들을 먼저 예수 믿게 만드셨습니다. 여러분들을 먼저 회심(conversion)시키고 변화시키셔서 참 신자의 가는 길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아내에게 예수를 믿고 변화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어야지만 신앙이 없는 아내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지 않겠습니까? 아직까지도 불신자인 아내에게 여러분들은 참으로 예수를 보여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어렵습니다. 성령 충만하여 말씀을 아는 지식 속에서 계속 자라가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남편을 통해 그 은혜의 강물이 아내에게 계속 흘려보내어 질 때에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의 가정은 예전의 모든 상처를 극복하고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정말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가정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II. 지식을 따라 사랑함

사도는 이어서 좀 더 구체적으로 그런 사랑이 어떻게 이루어져야지 하는지를 말하고 있는데, “지식을 따라서”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이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고 둘째는 아내에 대한 지식입니다.

A. 하나님께 대한 지식

첫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자연스럽게 부르기는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아버지 상을 대입하여 하나님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라고 할 때에, 이 아버지는 어머니 같은 아버지(모성적 부성)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은 성이 없으십니다. 언어적으로는 남성형을 쓰지만 이는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만들어진 언어의 소산일 뿐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함께 깃들어져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희랍 신화에는 다음과 같은 고대 사람들의 생각이 실려 있습니다. 원래 인간은 남성과 여성을 한 몸에 지니고 있었는데, 둘이 쪼개져서 남자와 여자로 갈라졌다고 합니다. 이는 온전함 이루고 있는 인간들의 고상함이 신들의 지위를 넘보게 되자 신들이 저들을 그리 갈라놓았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이루어졌으며, 성인으로 자라나 인간으로서 고상해지기 시작하면 자신의 짝을 찾기에 정신이 없다고 합니다. 이 모든 일은 인간이 고상해지지 못하도록 신들이 조작을 하였다는 것인데,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물론 이 신화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되지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원리 속에는 그분의 온전하신 성품이 배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남성은 남성이고 여성은 여성인데, 남성 속에 여성 호르몬이 흐르고 여성 속에 남성 호르몬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 특별히 남성 속에 흐르고 있는 이 호르몬의 비율에 따라 대머리의 유무를 결정하게 되니, 하나님께서는 인체 안에 두 호르몬을 같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두 성품 모두를 가지고 계시듯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에 남성에게도 여성성을, 여성에게도 남성성을 주셨지만, 동시에 이 두 사람이 본성적으로 구분이 되게 만드시사 두 사람이 합하여 살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성품을 자손들에게 잘 보여 줄 수 있는 도구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로 통합된 것을 남녀로 하여금 나누어 가지게 함으로써 온전한 그분의 성품을 알게 하십니다.

좋은 남편이 되는 방법은 먼저 하나님이 보실 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무시하고는 결코 좋은 남편이 될 수 없습니다. 가정에 평화를 이루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는데 남편이 아내에 대해 힘으로 제압해 버리든지, 아니면 그와는 반대로 아내가 남편에 대해 어떤 방식에도 꺾이지 않는 경우입니다. 평화가 이루어지긴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는 참된 평화도 아니며, 항상 가정에 상처를 남기며, 자식들에게도 왜곡된 가정관을 물려주게 됩니다.

좋은 남편이 되는 더 나은 방법은 아내와 남편이 각각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하나님 앞에서 참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깨뜨리면서 하나님을 알아갈 때 거기에서 지식이 생겨나게 되고, 그 지식의 빛 아래서 살아갈 때 가정에 평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아내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아내를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자기와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 아내를 소중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긍휼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B. 아내에 대한 지식

그 다음으로 필요한 지식은 아내에 대한 지식입니다. 아내에 대한 지식을 아는 것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곧 보편적인 아내와 개별적인 아내에 대한 지식입니다.

1. 보편적인 아내

‘보편적인 아내’에 대한 지식이라 함은 결혼해서 한 남편의 아내가 된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사람됨, 다시 말해 결혼해서 한 보편자(普遍者)인 아내들에 대한 지식을 말합니다. 남성과 여성은 아주 현저하게 다릅니다. 몸의 구조부터 사고방식까지 모두 틀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던 우리 선조들도 남녀를 설명할 때 음양의 원리로 설명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여성들의 경우에는 일 중심적이라기보다는 관계 중심적입니다. 반면 남성의 경우에는 일 중심적이고 진취적입니다. 여성의 경우에는 새로운 땅을 넓히고 사업의 지경을 넓히는 것보다 지금 이루어진 일들을 잘 돌보고 가꾸는 것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많은 남성들은 가정이 안정되고 화목하게 되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아내의 경우에는 이제 가정이 화목하게 되었으니까 남편을 가정이라는 울타리 쪽으로 완전히 끌어들이고 싶어 합니다. 남편은 집을 한 채 더 사야지 행복할지 모르지만, 아내는 남편의 성취보다는 자신의 뜻에 따라 앞뜰에 자기 원하는 꽃을 심고 화초를 가꾸는 것에서 보람을 느낍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남녀의 차이입니다. 아내가 남성화된 가정 보다는 남편이 여성화된 가정이 훨씬 더 행복한 가정이라는 흥미로운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성들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여성을 배우고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성들도 마찬가지로 남성에 대해서 배워야 합니다. 아내들은 남편이 삼일절 잊어버린 것은 상처가 안 되도, 자신의 결혼기념일을 잊어버린 것은 상처가 됩니다. 6.25가 언제인지 몰라도, 자기와 어떤 관계가 있는 날을 잊어버리면 너무나 서운해 합니다. 이는 부부 관계뿐만 아니라 미혼 남녀 사이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아주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세심하게 배려하며 자상하게 챙겨주는 남편을 보며 아내들은 행복해 합니다. 이는 예외가 없습니다. 아내 된 자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보편적 여성으로서의 아내를 이해하게 될 때에 남편은 비로소 모든 것들이 연합된 가운데 아내와 동거하는 것이 가능해 집니다.

2. 개별적 아내

보편적인 아내를 앎도 실로 중요하나, 개별자(個別者)인 아내, 즉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내 아내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내에 대한 지식은 보편성(普遍性)으로서의 지식도 있겠지만 개별성(個別性)으로서의 지식도 있습니다. 보편의 틀 안에 내 아내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보편성 속에 내 아내에 대한 모든 것이 들어 있지는 않습니다. 개개인의 특성이 모두 다르듯 말입니다.

결혼한 지 5년이 된 어떤 부부가 외식을 하러 보신탕집에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편이 워낙 무뚝뚝하여 별 말 없이 살아가고 있던 터에 간만에 외식을 시켜준다는 남편을 따라 아내가 간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술도 뜨지 못하는 아내를 보며 남편은 그제야 아내가 보신탕을 먹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혼한 지 5년이 넘었는데도 말입니다. 아내가 그 음식을 못 먹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남편 혼자 맛있게 먹는 것은 자신의 아내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아내들은 저마다 특별히 힘들어 하는 것, 보다 더 선호하는 것이 각각 있기 마련입니다. 내 아내가 특별히 싫어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계속 하면, 다른 곳에서 열배로 잘해 주어도 빛이 안 납니다. 그리고 아내에게는 마음이 고통이 끊임없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함의 첫 번째는 필요한 것을 해주는 것보다 그가 괴로워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내가 특별히 힘들어하는 일이 있습니다. 아주 힘들어하고 싫어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어떤 부부가 이혼을 했습니다. 이혼의 이유는 성격차이였는데, 결정적인 원인은 부부생활을 할 때에, 남편이 불을 환하게 켜고 부부생활(夫婦生活)을 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반면 아내는 그 속에서 무한한 수치심을 느끼기에 이를 거부하는데도 남편은 계속해서 이를 강요하였다고 합니다. 이렇듯 아내가 싫어하는 것을 계속 강요하다 보니 아내의 마음에는 미움이 정신병처럼 뿌리 내리고 자라게 되어 여러 다른 사건들과 연결되면서 결국은 이혼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바로 자신의 아내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생겨난 일입니다. 아내의 힘든 부분을 일단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천천히 대화하며 사랑으로 타이르고 다른 일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기다려 주는 것, 그것은 바로 아내를 아는 지식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아내에 대해서 계속 연구해가야 합니다. 하나씩 배워가면서 그런 지식을 따라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은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동거하고···” 동거한다는 말은 같이 산다는 뜻인데 그냥 같이 생활하는 것을 산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동거’라는 것은 마음과 정신이 연합된 가운데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정을 생각할 때에는 항상 교회를 연상하면 이해가 쉽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지 않은 사람들인데 자기의 이익과 맞아떨어진 한도 내에서 교회에 함께 모여 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을 우리는 함께 동거하는 신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진정한 의미의 동거가 아닙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동거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사랑과 일치가 있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 이루어진 것을 진정한 ‘연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축소해서 생각하면 그게 바로 가정(家庭)입니다. 가정이 바로 이런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동거, 이러한 연합 가운데 말입니다.

IV. 결론과 적용

교회가 어떻게 연합을 이루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원리적으로는 이미 일치가 이루어졌지만 실제적으로 그런 자기희생과 양보, 그리고 철저한 복종과 자기 죽음 속에서 교회가 일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누가 당신의 몸을 위해서 더 많이 죽었는지, 그리고 누가 당신의 몸을 위해 당신을 더 사랑하여 자기를 희생하고, 주님의 몸을 보양하려고 자기희생의 길을 걸으며, 자기 죽음의 길을 걸었는지 주님은 다 아십니다. 그런 희생을 통해서 교회가 실제적인 일치와 연합을 이루는 것처럼 가정도 동일하게 그러한 원리 속에서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깨뜨림 속에서, 남을 세우는데서 자아의 실현을 이루어가는 것이지, 남편 된 자가 가지고 있는 완력과 재산, 그리고 힘들을 이용해서 아내를 억누르고 자기 질서에 복종케 함으로써 자기만족만을 구가하면 가정의 근본적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내에게 선심이나 쓰는 후한 남편이나 유명한 남편이 되기 전에, 먼저 착한 남편이 되십시오. 착한 사람, 작은 일에 감동받을 줄 알고 마음 아픈 일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눈물 흘릴 줄 아는 착한 남편이 되십시오. 그런 남편이 연약한 그릇인 아내에게 어울리는 남편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가정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 이 정신적이고 영적인 연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주신 것처럼 남편은 아내를 그렇게 깊이 사랑해야 됩니다. 주님이 교회에 베푸신 그 사랑은 대가가 없는 사랑입니다. 구원에서 멀어져 방황하는 인간들을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생명을 버렸고 이 은혜를 주셨으니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아내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 이것이 진정한 가정의 대의(大義)입니다. 이런 속에서 여러분들의 가정을 세워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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