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전도] 이 세상은 복음전도의 영웅을 기다립니다 (막 6:7-13)

  • 잡초 잡초
  • 349
  • 0

첨부 1



여러분, 전도자 그러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아마도 어떤 분은 익산역 광장이나 혹은 길거리에서 아주 큰 소리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소리치는 매우 용기있는 그리스도인, 혹은 비정상적으로 열심 있는 전도자를 마음속에 연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전도자와 동일한 말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다시 말해서 전도자는 그리스도인이고 그리스도인은 전도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전도자가 아닌 사람은 한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상적으로 예수를 따라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을 낚는 어부” 즉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접근해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는 전도자가 되어있어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하자 그러면 그건 특별한 사람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내보내시면서 어떤 준비를 시키셨는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교회 공동체의 비전과 전략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7절을 읽겠습니다.
“열두 제자들을 부르사 둘씩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여러분, 예수님이 제자들을 한사람씩 뿔뿔이 보내시는 상황하고, 둘씩둘씩 짝지어 보내신 것과 어떤 차이가 있다고 느끼십니까?
전도가 쉽지 않죠. 그래서 전도하다보면 어려움을 느낍니다.
따라서 혼자 전도하다가 지치면 언제든지 땡땡이 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묶여서 전도하다보면, 상대방을 의식하여 “내가 여기서 그만두면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공동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예수께서 둘씩둘씩 짝지어 전도하러 보낸 것은 그밖에도 여러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19:19절에 보면 “사람이 죄인으로서 증명을 받기 위해선 증인이 필요한데 한사람으로는 증인”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객관적으로 그 사람이 죄인됨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증인이 필요하다는 것이 구약성경의 전통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불신자가 심판 날에 “하나님, 저는 아무에게도 전도받은 일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께서 “증인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시고 법정증거의 효율성을 성립하기 위해 두 사람씩 제자들을 짝지워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서에 보면 “두 사람이 한사람보다 나음은 한사람이 넘어질 때 또 다른 사람이 붙들어 일으켜 세워준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교회를 격려의 공동체가 될 것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낸데는 그들의 영적성숙을 겨냥한 주님의 전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에서 두 사람씩 제자들이 짝이 된 모습을 보면 아주 흥미롭습니다.
안드레와 베드로가 짝이 됩니다.
이 두 사람은 형제였기 때문에 자라나면서 함께 보조를 맞춘 환상의 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짝도 있습니다.
시몬과 가롯유다인데, 시몬은 아주 격렬한 열심당원 출신이고, 가롯유다는 배신자입니다.
따라서 시몬은 많은 고민을 했겠지만, 매사 비판적인 유다를 위해 기도하고, 그를 다독거리면서 굉장한 영적성숙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마음이 맞아야만 영적성숙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안맞는 사람과 짝을 이룬 공동체에서,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를 용서하는 것을 배우는 이것이 주님의 공동체 영적성숙의 전략인 것입니다.

저는 우리시대의 신앙속에서 정말 그리스도인다운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장애물의 하나가 개인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개인주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예외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공동체의식을 상실한 채 살아갑니다.
여러분, “전도한다”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전도하면 “세상이 변화된다”는 말을 들을 때,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그렇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부족하면 그 부족한 대로, 우리가 연약하면 그 연약한 대로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공동체가 될 때 그 저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 이 교회라는 공동체에게 지상명령의 과제와 숙제를 위임한 것입니다.

마지막 열한 제자에게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 세상을 바꿔라. 모든 족속으로 네 제자를 삼으라”
이것은 주님이 의도하는 공동체의 원형으로서,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실패의 상처도 함께 나누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일어나는 교회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 깊이 들어가다 보면 마음에 안드는 사람도 만납니다.
그러나 그들을 용납하고, 그들을 용서하는 것을 배우는 과정에서, 우리는 용서하는 공동체가 되고,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공동체를 통해서 세상을 바꾸시길 기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우리는 어떻게 교회생활을 하느냐는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날 지식인일수록 교회생활에 대해 “축도가 끝나자마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런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생활을 그렇게 하면 무척 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주님에 의해서 효율적으로 쓰임을 받지 못하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관계속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서로 위로하고, 또 용서해주는 영적성숙을 기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자가 된다는 것은 우선 먼저 교회에 등록하고 묶여진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장예배에도 참석하여 내 인생의 좌절과 슬픔을 나누며, 함께 웃고 울면서, 그 안에서 우리를 치료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성숙시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며,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오직 예수만이 소망”이라고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공동체로 세우신 목적인 것입니다.

2.주님의 능력을 철저하게 신뢰할 줄 알아야 합니다.
8-9절을 읽겠습니다.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뭐만 가지라고 했습니까?
지팡이와 신발입니다.
성지순례를 해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스라엘은 지형이 험하기 때문에 걸어다니려면 지팡이가 필요하고 신발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최소한의 준비입니다.
그러나 “나머지를 걱정하지 말아라. 나를 믿어라. 나를 의지하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도자에게 너무 많은 것이 소유되어 있으면 거추장스럽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전도를 시작하게 되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대상이 있습니다.
뭔줄 아십니까? 귀신을 만납니다.
여러분은 귀신 만나보셨습니까?
귀신을 만나보지 못한 사람은 아직 전도해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전도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전도를 누가 가장 싫어할까요?
바로 귀신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를 시작하면 제일 먼저 귀신의 공격을 받는 것입니다.

7절을 읽겠습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여러분, 주님께서 제자를 보내시기 전에 뭘 주셨습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전도하면 반드시 귀신을 만날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아라. 귀신을 제압하는 권세를 너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반드시 귀신은 우리 앞에서 패배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도하는 사역의 현장에서 우리는 귀신을 제압하는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선교사님들의 선교지 사역보고를 통해 “기적이 일어났다”는 기적의 리포트를 듣게 됩니다.
그때 여러분은 어떤 소감이 드십니까?
선교지에서 일어나는 기적이 왜 우리 교회에서는 일어나지 않을까요?
저는 우리가 선교사들처럼 주님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복음전도의 최전선에서 살게 될 때, 기적은 여기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인생이 바뀌는 체험을 한번 해보고 싶으시다면, 선교사가 안돼도 좋으니까 단기선교를 한번 떠나십시오.
그리고 우리와 전혀 다른 문화권에 가서 우리보다 더 가난한 곳, 더 어려운 곳, 영적인 어둠이 있는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땀을 흘리는 수고를 한번 해보십시오.
반드시 인생이 바뀌어서 돌아올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도 정말 주님의 명령앞에 우리가 순종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을 경험할 줄로 믿습니다.

3.환영과 핍박을 함께 받을 각오를 하셔야 합니다.
10절을 읽겠습니다.
“또 가라사대 어디서든지 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우리가 전도의 현장에서 어떤 집에 가면 “아, 수고하십니다. 쉬셨다 가시지요”라며 대접을 받고 환영을 받습니다.
이때 우리는 얼마나 용기 백배합니까?
이렇게 하나님은 전도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그런 상황을 펼쳐주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도하는 사람의 삶의 전부가 아닙니다.
어떤 때는 기대하지 않았던 냉담한 거절과 핍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11절을 읽겠습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어떤 분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어느 집에 가서 전도하다가 안받아 들이면 나오면서 신발에 묻은 먼지를 털고 떠난다”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먼지”라는 것은 “세속적인 죄악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발에 있는 먼지를 떤다”는 것은 “나는 당신의 죄악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버리라”는 얘기는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의 냉대, 그들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찾아가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들이 심판의 날에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촉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전도하다보면 핍박은 더해질 수가 있고, 심지어 전도하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끊임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복음을 가지고 다가서는 자가 진정한 영웅입니다.

과거에 기독교신앙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던 사람들이 신앙을 갖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마음이 약하기 때문에 위로 받기 위해 종교를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할 때, 진정한 용기는 “나는 당신을 위해서 목숨도 버릴 수 있습니다”라는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자에 대하여 주님은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가 있다”는 이 위대한 용기를 가진 자들만이 이 세상을 바꾸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의 스타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계20:4절을 보면 요한이 “내가 보니 주와 함께 보좌에 앉아서 세상을 마지막에 영원토록 다스리는 사람들은 주의 말씀과 복음의 증거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영혼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 전도자들은 분명히 천국의 스타가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단12:4절을 보면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모든 것이 무너지는 이 세상에서, 사업이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고, 인생이 무너지는 비극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들에게 찾아가 “예수가 소망”이라는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영웅이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모든 것이 무너지는 이 세상에서, 익산의 모든 사람들이 영원히 무너질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 하도록 소망을 나누는 이 삶보다 더 고귀한 삶이 우리에게 어디에 있을까요?

<찬송>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