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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눅 8: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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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눅8:22~25)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믿음이 있습니다. 문제는 믿음의 주소가 어디며, 믿음의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주소가 정확하고, 대상이 분명할 때에 믿음이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자라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신이나, 정치적인 종교집단 및 엉뚱한 철학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무슬림은 무함마드의 혈통을 이어받은 “시아파”와 무함마드의 사상을 계승한다는 “수니파”의 대결로 피의 보복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란과 이라크 그리고 바레인은 시아파가 우세합니다. 거의 70-80%가 시아파이고, 그 외의 중동과 세계각국에는 수니파가 절대 다수입니다. 전세계적으로 보면 시아파가 20-30%, 수니파가 70-80%됩니다. 참고로 이라크의 후세인은 “수니파”였습니다. 이란의 시아파를 두려워하여 자국내의 시아파를 학살하기 시작하여 후세인 정권을 유지했었습니다. 지금은 이라크에서 “시아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무슬림의 믿음의 대상은 인간 “무함마드, 모하메드”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잘못되었으니 피의 보복은 멈추질 않을 겁니다.

우리 기독교의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요 우리의  신은 “하나님, 성령님”이 십니다. 우리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안정되어 복음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1. 우리는 주님과 한 배를 타고 갑니다.

성 패트릭은 15세 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뜨겁게 기도하다가 그의 생애와 나라를 변화시킨 놀라운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주님과 영원히 하나가 되었다는 깨달음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그리스도가 내 옆에, 그리스도가 내 뒤에, 그리스도가 내 주위에,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그리스도가 나의 생명, 그리스도만을 위하여”라는 그의 유명한 기도처럼 주님과 하나가 된 영적 황홀감으로 고향인 아일랜드로 돌아가 야만인처럼 살고 있던 주민들에게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교회를 세웠고 아일랜드는 4∼8세기 400년간 그의 영향으로 복음의 전성기를 경험했습니다. 단순한 믿음에는 생명이 있고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나는 영원히 하나이다. 예수님과 나는 영원히 한 배를 탔다.”라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눅8:22)라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우리 주님의 명령에 제자들은 무조건 순종하는 마음으로 배에 올랐습니다. 주님과 한배를 탔습니다.

러시아의 바이칼호수는 지구 담수의 4분의 1을 저장하고 있는 곳입니다. 바이칼호수의 수심은 1,620m에 달하는데, 이는 63빌딩 6개를 쌓아올린 것과 맞먹는 높이입니다. 2,400만 년 전 지각변동으로 생긴 이 호수의 면적은 남한 크기의 3분의 1이 넘는 3만1,500㎢입니다. 바이칼 호수는 거의 바다에 맞먹는 호수입니다.

바이칼 호수에 비하면 갈릴리 호수는 그 규모가 매우 작습니다. 갈릴리 호수를 성경에는 “갈릴리 바다”(마 4:18), “디베리야 바다”(요 6:1) , “게네사렛 호수”(눅 5:1), 또는 “긴네렛 바다”(민 34:11, 수 12:3, 13:27) 등으로 불리웁니다.  본래 히브리어 키노르 (kinnor)는 하프(harp))로 갈릴리 호수의 모양을 말해주고 있으며, 바다를 일컫는 얌(Yam)이 헬라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일부는 “바다”로, 일부는 “호수”로 번역되면서 “바다” 또는 “호수로 그 명칭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갈릴리호수는 바다가 아니라 호수입니다.

길이 21 Km, 폭 13 Km의 이 호수는 수면이 낮아 해발 -210 m 이고 호수의 수심은 약 44 m 에 이르고 있습니다. 수십 종의 고기들이 살고 있으며, 그중 속칭 “베드로 고기”는  유명하여 여행자들의 반찬이 되기도 합니다.

헤르몬 산으로부터 훌라 계곡 (Hulla Valley)을 따라 내려오는 물이 저장되어 있는 이 물은 현재 이스라엘 국민의 수원(水原)이 되고 있어 젖줄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 하구 지역은 예로부터 매우 기름진 땅과 풍부한 수량으로 농사에 적절한 지역이었으나, 그 이외의 지역들은 낮은 곳의 이 물을 끌어들여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던 이들로서는 별 효용가치가 없었다.

갈릴리의 중요한 산업으로 어업은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이 바다에서 잡히는 고기를 소금에 절여 말린 생선은 여러 지방으로 수출되었으며, 고기잡이 하던 배는 수없이 많았습니다. 1985 ~ 6 년 갈릴리 호수에서 발견된 BC 1 세기 ~ AD 1 세기의 나무로 만든 배는 예수님 당시의 바다에서의 생활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 활동을 바로 이곳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한 약 12개 마을을 중심으로 개시하셨으며, 그의 제자들 가운데 6명이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그리고 마태) 이곳 갈릴리 출신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과 한 배를 탔습니다. 호수의 물길을 가르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조상대대로 내려오던 뱃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눈감고라도 배를 몰고 갈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길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주님과 한 지구를 타고, 한 배를 타고, 주님과 한 자동차를 타고, 주님과 한 기차를 타고, 주님과 한 비행기를 타고 인생길을 가고 있는 중입니다.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상당히 안전한 길이며,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길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2. 그래도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승리의 날을 기념합니다. 실패한 날은 잊으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기쁘고 영광스런 날뿐만 아니라 패배한 날이나 굴욕스런 날을 더 기념합니다.

이는 패배를 기억함으로써 새로운 힘이 생겨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지킬 때마다 이집트의 노예로 있을 때 먹었던 “맛소”라는 누룩 없는 빵을 기억합니다. 그것을 먹으며 당시의 굴욕을 맛보고, 쓴 나물을 먹으며 그때 겪었던 패배의 쓴 맛을 자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또 “삶은 계란과 아라차”라고 하는 술을 마시는데, 거기에는 뜻이 있습니다. 다른 음식은 찌면 찔수록 물러지지만 계란은 찔수록 단단해집니다. 그것은 고난과 패배는 거듭할수록 강해지지만 결국에는 승리할 것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성공은 사람을 오만하게 합니다. 그러나 실패는 사람에게 겸손한 지혜를 줍니다. 실패를 통해 얻은 체험은 인생의 위대한 자산입니다. 유대인들의 힘은 바로 이런 경험에서 나온 겁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모시고 자기들의 인생길을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데리시고 주님의 가시는 길을 가시고 계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은 행복한 길이요, 복된 길입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단단한 각오를 해야 합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천국을 이 땅위에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천국을 건설한다는 것은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의 저항을 받게 됩니다. 심지어는 자연 만물의 거센 저항도 받게 됩니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8:19-20)고 했습니다. 서기관이 지금의 그 자리보다 더 좋은 자리를 꿈꾸고 주님을 따르겠다면 일찍이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갈릴리 호수에는 태풍은 없습니다. 그러나 골란 고원에서 불어 내려오는 칼바람은 가끔 잔잔한 호수에 광풍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부들은 조상대대로 그러한 광풍을 체험해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광풍이 불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상당히 위태로웠습니다.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육신을 입고 계신 인성의 한 단면을 보여 주시고  계셨습니다.

주님과 한 배를 탔다 하더라도 언제나 고난을 피해 갈수는  없습니다.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시험과 환난이 배안에 까지, 집안까지, 직장까지, 사업장까지, 삶의 터전까지 들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항상 우리 옆에 계십니다.

우리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우리 주님은 늘 우리 옆에 계십니다.


3. 주님이 꾸짖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는 “기도를 잊지 말라. 기도는 그대에게 생생한 용기를 줄 것이며 이것이 곧 교육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괴테(1749~1832)”는 “불에 피운 향이 인간의 생명을 상쾌하게 하는 것처럼 기도는 인간의 마음에 희망을 북돋워 준다.”라고 말했습니다.

“버나드 쇼(아일랜드 극작가:1856~1950)”는 “보통 사람들은 기도를 하지 않고 구걸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구걸하는 기도는 5분을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는 평생을 해도 다 못합니다. 

광풍이 심하여 예삿 바람이 아닌 줄 안 제자들이 주님을 깨워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하면서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갈팡질팡했습니다.

우리들도 다급한 일을 만날 때에 “주여 내가 죽겠나이다.”라고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느슨할 때에 주님도 느슨하게 역사하십니다. 내가 다급할 때에 주님도 다급하게 역사하십니다.

제자들이 상당히 다급하게 매달릴 때에 주님도 급하게 일어나셔서 움직이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일어나셔서 당황해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신권을 발동하셨습니다.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 바람은 환난의 주원인이었습니다.①하나님에게서 온 바람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려야 합니다. ②사탄에게서 온 바람 일 수  있습니다. 꾸짖어야 합니다. ③단순한 의미 없는 자연의 현상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꾸짖고 지혜롭게 대처해야 합니다.

물결이 잔잔해 졌습니다. 바람이 멎으니 물결은 자연적으로 잔잔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원인을 제거할 때에 따르는 부수적인 요인도 사라집니다. 바다의 상처, 물결의 상처, 배의 상처, 마음의 상처, 믿음의 상처가 말끔히 아물어집니다.


끝맺는 말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믿음의 현주소를 물으신 겁니다. 간접적인 책망입니다. 우리의 미음의 현주소가 어디입니까? 세상입니까?  인간들입니까?  자기 자신입니까? 부귀영화입니까? 권력과 권세입니까?  세상의 것은 움직입니다. 변합니다. 흘러갑니다.

야고보는 야고보서 1:17절에서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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