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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 찾아야 할 우리 가족 (마 18: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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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동에 가면 한옥 집을 개조한 허름한 냉면 집이 있습니다. 그 집 벽에는 빛바 랜 소년 사진 하나가 걸려 있는데 그 사진이 바로 1·4후퇴 때 잃어버린 이 집 주인 할머니의 셋째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 노파는 아들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서울역 부근에서 냉면집을 시작한 것입 니다. 이 할머니는 6남매를 두었는데 셋째 아들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지금도 문득 문득 아들이 생 각나면 빛바랜 사진에 세월의 연륜 만큼이나 깊게 파인 얼굴을 묻고 이제 더 흐를 것도 없이 말라 버린 눈으로 흐느끼고 있다고 합니다. 세계 그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도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장면입니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직접 지음 받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특별한 하나님의 소유 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생사는 인간 스스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엄숙한 이유 때문에 인간의 생명은 경시되거나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비유는 누가복음 15장 4-7절 사이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언 급되고 있습니다. 본문의 비유는 겸손과 사랑이란 맥락에서 기록되었고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죄인의 회개라는 맥락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은 소자 하나에 대한 소중함 을 설명하기 위해서 동원된 비유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비유는 목자로 비유된 사람이 일백 마리의 양 중에 아흔 아 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잃어버린 한 마리 의 양에 대한 관심이 어떠한가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본래 백 마리의 양은 같이 있었습 니다. 말하자면 한 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 마리가 어디론가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양은 찾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잃은 양은 처음부터 양의 한 무 리요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Ⅰ. 육신(혈육, 골육)의 가족을 찾아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5장 8절에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 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자기 가족 “톤이디온(τωνιδιων)”은 자기의 직계 가족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Guthrie). 돌아본다는 말 “프로노에이(προνοει)”는 생각한다, 준비 한다, 공급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가족을 마땅히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자는 믿음을 배반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교회법이나 성경에서 가족을 돌보지 아 니해도 된다고 가르치지 아니했다는 말입니다.

  안정되고 건강한 가정이 생산적인 가정입니다. 교회는 건강한 가정 가꾸기 운동을 태만히 해서는 안됩니다.

  신명기 27장 16절에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 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127편 3-4절에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 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잠언 17장 6절에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고 했습니다.

  시편 128편 3절에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 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5월이 오면 딱히 가정의 달이 아니라고 해도 가족들과 옛 추억이 담긴 고향이 그리워지는 때입니다. 더욱이 콘크리트와 철근 구조물로 지어진 빌딩 숲에서 느껴지는 사향심과 가족에 대한 동경은 간절하기까지 합니다.

  우리나라는 한 민족이라는 민족적 전통성과 동질성을 자랑하면서 살아왔습 니다. 더우기 씨족이라는 단위로 집단을 구성하고 보통 3대 4대 심지어 5대에 이르기까지 한 지붕 아래서 살아왔습니다. 남녀노유가 혈통이라는 명분으로 그림 같은 초가집에서 불편한 줄 모르고 운 명처럼 살아온 세계 유일의 거주문화를 가지고 있는 민족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서구 문화의 바람이 한반도에 거세게 불어 닥쳤습니다. 의식구조적인 면에서 볼 때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왔 던 우리 민족은 비약적으로 서구의 발달된 문화를 수용하는데 능동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농경시대 의 자취는 차츰 없어지고 공업화, 산업화의 문화구조로 급선회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가족들 은 비록 좁은 땅이지만 흩어져 살아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사회가 첨단화, 고도화되면서 갈수록 사람들의 사고와 능력의 난이도가 높은 것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이쯤 되고 보니 가족(부모, 형제)들을 자기의 필요에 따라 서 상대하는 참으로 기막힌 이기주의 가족환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경직되고 동면(冬眠)처 럼 정체된 가족 문화 속에서 가족의 안부, 특히 그들의 영혼을 생각한다는 것은 여유 있는 자들의 사치처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를 경홀히 여긴다는 말은 반드시 도덕적이고 일반 윤리적인 차 원에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독교윤리 (Christian Ethics)차원에서 생각해야만 합니다. 

  II. 신령한(영적) 가족을 찾아야 합니다.

  본문 18장 12-14절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을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 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 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는 목자는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아흔 아홉 마리 양을 안전하게 보호할 만한 아무런 장치를 해두지 아니했습니다. 오직 잃은 양만을 위하여 있 는 목자처럼 그 양에게만 모든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잃은 양을 찾아가는 목자의 행위는 누가 보아 도 비생산적입니다. 합리적인 손익계산에 따라 평가할 때 대단히 어리석고 무모한 행위라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도는 경영의 합리화 차원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잃은 양에 대한 목자의 애타는 관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마리의 양을 찾기까지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들판에 그대로 두고 목자가 떠난다는 것은 그 양들이 잃은 양에 비해서 가 치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은 목장 안에 있는 아흔 아홉 마 리 양들에게 자신의 존재 가치가 어떠한가를 실물교훈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 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한 영혼이라도 소홀하게 취급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 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 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택자들은 한 가족입니다. 한 형제들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 를 마가복음 3장 35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했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 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피보다 더 진한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성도 중에 가장 미천하고 어린 소자라 할지라도 실족케하여 신앙의 길을 떠나게 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 용납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6절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 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3절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생존 원리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신이 살아남는 정글의 법칙이 진 리로 통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생존원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 하나님의 능력 을 덧입는 것입니다. 결코 이 세상은 스스로 의롭다하는 자들의 세상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는 겸손 한 자들의 세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 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들은 남을 위해 배려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자신 에게 손해가 올지라도 남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의식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즉 이 지상의 교회운동을 위해서 자기 자신이 좀 손해를 보 고 당하면서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희생정신입니다. 아무도 손해 보려고 하지 아니하고 아 무도 당하려고 하지 아니하면 교회는 세상과 결코 차별화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될 때 교회는 이 세상에서 영리 목적을 위하여 존재하는 단체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영적 가족을 찾는 일이 오늘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요, 우리의 삶의 의의입니다. 여기에서 궁극적으로 인간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얀마(버마 ) 반정부 지도자 아웅산 수지 여사의 남편 마이클 아리스는 전립선암 말기 환자였습니다. 그는 52 살의 일기로 몇년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임종할 때 그의 두 아들 곁에는 사랑하는 아내가 없 었습니다. 그는 평소에 미얀마(버마) 당국에 비자를 신청했으나 매번 거절당했습니다. 미얀마 정부 는 아리스를 서방의 밀사라며 4년 동안 그의 귀국을 막아왔습니다. 대신 부인이 남편 곁으로 가면 되지 않느냐는 미얀마 정부의 답변이었습니다. 수지 여사는 암세포가 남편의 척추와 폐까지 전이되 었다는 말을 듣고도 미얀마를 떠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가 남편 곁으로 한 번 가면 다시는 조국 미얀마 땅을 밟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편 아리스는 옥스퍼드대의 저명한 티베트 문제 전문가였고 수지 여사는 옥스퍼드대 유학 중에 있을 때 아리스의 열렬한 구애에 결혼했습니다. 이때 수지 여사는 언젠가 조 국이 나를 필요로 하면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조건을 달고 72년에 결혼을 승낙했습니다. 88년 수지 여사가 노모의 간병으로 미얀마로 돌아왔다가 그만 전 국민적 민주화 열기에 휩싸여 민중운동의 지 도자가 되었습니다. 아리스는 91년 노벨평화상 수상 때에도 고국을 떠나지 못하는 아내 대신 수상 식에 참석했고 그 외 수백 개의 인권상도 부인대신 받았습니다. 아웅산 수지여사는 남편 사망 소식 을 전해 듣고 말하기를  “그를 만난 것은 나에게 행운이었다. 그 무엇도 남편을 내게서 빼앗 아 갈수 없다. 투병중일 때 남편을 격려해주고 나와 우리 가족에게 사랑과 연민을 보내 준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드린다.” 고 했습니다. 최근에 미얀마 정부는 수지여사의 가택연금을 1년 더 연장한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가족을 버리고 청춘을 바쳐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사람들이라면 특히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아웅산 수지 여사인가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 리에게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들을 불행한 역사의 주인공으로 평가하는 시대입니다. 신앙 순결을 위해 목숨을 내 놓았던 순교자들의 신앙 무용담은 언제부터인가 전설처럼 희미해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의도적으로 생생한 사건을 소개함으로 희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한갓 민족주의자의 희생정신도 이러할진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삶은 어 떠합니까? 자신과 자기 가족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로 팽배해져서 교회를 위한 자기희생이 식어가 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아니라고 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한갓 자기 조국의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 한 노력이 이러할진데 하물며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을 찾는 교회운동이 이것만 못해서 되겠습니 까?

  Ⅲ. 찾지 않 으면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 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 』(ἐν τῇ σοφίᾳ τού θε ού)라는 말을 직역하면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혜를 세상에 나타내셨으나 이 세상은 하나 님을 알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1장 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 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고 했습니다.

  일반계시(자연계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고 했습니다.
  시편 19편 1절에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 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반계시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는 데는 충분하지만 그것으로 는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일반계시의 불충분성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일반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 수 있는 능 력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일반계시는 인간을 여전히 죄 가운데 둘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계시를 우리에게 허락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계시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 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전파 자체가 미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

  고린도전서 1장 27절에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 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택한 자들로 하여금 복음전파의 일을 하도록 하셨 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약한 자들과 어리석은 자들을 택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구 원이 외적인 조건이나 환경과는 상관이 없는 오직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 되 고 이방인들에게 미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보고 영원한 패배라고 하는 자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 니다. 

  고린도전서 1장 25절에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 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에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습니 다.

  인간의 영생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아래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작정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우리의 죄를 대속해 줄 그 어떤 신도 없 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14-15절에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 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 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복음전파의 단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① 선택(election) ② 부름(calling) ③ 믿음(believing) ④ 들음(hearing) ⑤ 전파(preaching) ⑥ 보냄(sending)입니 다.

  여기서 특별히 듣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그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기보다는 듣고 믿게 하기 위한 일종의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존재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지 못하면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들음의 종교입니 다. 복음을 들어야 주께로 나올 수 있습니다. 복음을 듣게 하는 것이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자 를 찾는 길은 오직 듣게 해주는 것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해에도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 새 교인들을 많이 보내주셨습니다. 그 리고 우리에게 주일마다 주님의 양들을 보내주시고 계십니다. 양들이 주님 앞에서 멀어질 때 달려 가야 합니다. 그리고 실족한 자들이 있으면 찾아 나가야 합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심정으로 찾아야 합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을 찾아갈 때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것 들과 결별을 불사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한사코 이 일에 대한 상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걱정 마십시오.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 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 니라』고 했습니다.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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