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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 (눅 9:5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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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친정어머니처럼 모시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하루는 밭에서 김을 매고 있는데 시누이가 달려왔습니다. 손에는 먹던 참외가 들려 있었습니다.
  “엄마, 엄마, 이것 좀 잡숴봐. 내가 먹다가 너무 달아서 엄마 생각나 가져왔어.”
  “오냐, 오냐, 역시 내 딸이다”
  며느리는 ‘바로 저거구나’ 싶었습니다. 어느 날 참외를 먹는데 아주 달았습니다. 시어머니께 달려갔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이 참외 좀 잡숴봐요…”
  며느리는 준비한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싸늘한 시어머니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습니다.
  “너 먹던 걸 나보고 먹으라고? 시어미한테 버릇없이…”
  갈등을 줄이고 원만하게 지내는 고부간, 남들 보기에 친 모녀같이 사는 비결은 서로 남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선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내면서 상당한 세월이 흘러야 한 가족으로 동화될 수 있습니다. 함께 산다고 행복하고 생산적인 삶이 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올바른 관계는 다름을 인정하면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다름의 인정은 차이를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지켜야 할 선이 있어야 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에 100% 합당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딘가는 부족하고 참고 배려하면서 살 뿐입니다. 부모, 자식, 부부, 성도, 목회자, 친구로서 나는 합당한가를 깊이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에게 합당한가 보다는 내가 남에게 합당한 존재인가를 생각할 때 성숙하고 화목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방해나 걸림돌이 되거나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아니라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깊은 은혜와 깨달음과 변화의 역사가 임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고난을 극복하라

  본문 57-58절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이 지원자는 예수님의 권능에 매력을 느꼈을 것이고 능력 많으신 분을 수행하는 제자들의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에 부러움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영광에 동반되는 아픔과 가난함의 의미를 알고 지원을 했어야 했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결심은 자기 부정의 의미를 알고 난 다음에 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원자의 의도를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으며 그런 생각으로 제자가 되려는 것은 모두를 위해서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권력이나 부, 명예 따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도리어 여우나 새와 같은 짐승들에게도 허락된 최소한의 삶의 터전 또한 보장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의식주 문제가 안정적으로 확보되고 거기에 덧붙여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지향하는 출세주의가 아니라 때로는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며 안정된 삶의 거처도 없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자기를 희생시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허영심에 사로잡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했던 이 서기관은 아마도 예수님의 숙연한 말씀을 듣고 제자가 되기를 포기했을 것입니다. 제자의 길은 박수와 갈채의 꽃길이 아니라 고난과 가난과 눈물의 길입니다.

  사람은 음식을 먹지 않고서도 40일을 살 수 있고, 물을 마시지 않고서는 3일을 살 수 있으며, 공기를 마시지 않고도 8분을 살 수 있지만 소망이 없이는 단 1분도 살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코넬대학의 어느 연구원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쟁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 가운데 2만5천명을 대상으로 연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소망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은 거의 어떤 시련도 다 감당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모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것에 기초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위적이고 바람을 넣어 부풀린 소망도 있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것들에 ­ 증권시세, 아름다운 외모, 높은 봉급, 좋은 직장, 행복한 가정 등에 소망을 두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일시적인 것들이며 어느 순간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사라지게 될 때는 그들의 소망도 함께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기쁨은 소망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모든 상황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3절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이루는 줄 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환난’이라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고뇌’를 뜻하는 말로, 우리에게 중압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시험’, ‘고난’, ‘곤고’, ‘힘든 일’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됩니다. 문젯거리들을 해결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숨을 쉬고 살아있는 한, 우리의 모든 문젯거리들을 결코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심각한 문제를 제거하고 나면 그 문제에 몰두하느라 보지 못하고 있었던 사소한 문제들이 드러나게 되는 것을 경험해보았을 것입니다. 기뻐하는 것은 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기쁨은 고통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사도가 우리는 환난 가운데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여러 가지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을 극복해야 합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뻐해야 합니다. 내 힘만으로는 고난을 극복할 수 없으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힘주시면 넉넉히 이기게 됩니다. 모든 고난을 극복함으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일꾼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영적 우선 순위를 지키라

  본문 59-60절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죽은 이에 대한 예우를 갖춘 장례식은 우리 민족처럼 가정적, 종교적, 사회적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의무 가운데 하나입니다. 장례의 의무는 율법을 공부하는 일, 성전 예배, 유월절 제사, 할례 시행 등 보다도 우선권을 가졌습니다. 유대 사회의 장례 풍토에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룬 후 따르겠다는 이 사람의 명분은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죽은 자들로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라는 말씀의 의미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로 하여금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세상일은 세상 사람들에게 맡기고 오직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에 전심전력하라는 의미입니다. 성도들이 예수님을 좇음에 있어서 결정적인 우선 순위를 세상일과 하나님의 일 중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자세의 문제로서 그것은 뼈를 깎는 아픔을 동반하는 결단을 요청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의무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며 제자의 길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데 있음을 말해줍니다. 세상에 가정 중요하고 급한 것도 하나님 나라 확장에 먼저가 되거나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언제나 영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아니면 해결책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출 것인지에 대해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주는 나의 피난처」의 작가인 코리 텐 붐은 “밤이 어두울수록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밝고 더욱 참되며 더욱 아름답게 불타오른다”고 썼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면 우울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시선을 어디에 집중하는 지에 따라 우리의 내적 평안의 정도가 결정됩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춥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46:1)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시편 끝에서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46:10)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이 구절들의 시대적 배경은 흥미롭습니다. 이 구절들은 다윗이 쓴 것이 아니라, 다윗이 세상을 떠나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인 히스기야 왕 당시에 만들어졌습니다. 그 당시 유다는 앗수르 왕인 산헤립의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적군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곧 추격을 당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정오가 되기 5분전, 하나님은 역병으로 앗수르 군대를 치셨고, 그 결과 18만5천명의 앗수르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예루살렘은 구원받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즐거워했습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시시켜줍니다. 아무리 불가항력적인 것처럼 보이는 불행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 되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우리의 도움이십니다. 이 시편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만히 있다’라고 번역된 그 히브리어 단어에는 ‘완화시키다’, ‘손을 놓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문제는 가만히 있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마지막 때는 언제입니까? 지금 그렇게 해봅시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쉽시다. 그리고 당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합시다. 모든 결과와 미래는 하나님께 맡깁시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합시다. 영적 우선 순위를 지킴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하심을 체험하여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일꾼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쉬지 말고 전진하라

  본문 61-62절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이 사람의 마음은 가족에 대한 염려로 가득차 있었으며 작별인사 중 가족의 만류가 간절해질 경우에는 포기하고 주저앉을 가능성이 많은 사람입니다. 손에 쟁기를 들고 밭을 가는 자의 유일한 목적은 곧은 고랑을 내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는 일 외에 다른 일에 신경을 써서 뒤를 돌아본다면 고랑은 곧게 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르는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롯의 처와 같이 뒤를 돌아보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날마다 전진해야 합니다.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음박질해야 합니다. 더욱 발전하고 성장해야 합니다. 새로워지고 거룩해져야 합니다. 후퇴하거나 정체되는 것이 아닌 모든 면에서 끊임없는 전진이 있어야 합니다. 샌드위치의 삶이 아닌 좋은 영적인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애굽 사람들에게 내리신 열 가지 재앙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들 속에서 볼 수 있는 하나의 해학입니다. 그 각각의 재앙은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각각의 신을 조롱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애굽 사람들은 이를 숭배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섬길 수 있도록 엄청나게 많은 이를 그들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개구리 재앙도 있었습니다. 성경은 온 지경에서 개구리가 올라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의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개구리들을 사라지게 하도록 이제 그만 굴복하라고 압력을 가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바로가 모세를 불러 말했습니다. “모세, 이제 그만하게. 내가 졌어.” 그래서 모세는 “언제 개구리들을 사라지게 해드릴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내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합니다! 단 하루라도 개구리들과 같이 지내려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설교 가운데 ‘개구리들과 하룻밤 더’라는 제목의 꽤 잘 알려진 설교가 있는데, 바로 이 성경 본문을 기초로 한 것이었습니다. 개구리들과 하룻밤을 더 보내는 것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변화를 도대체 왜 미루려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바로가 “저 개구리들을 지금 당장 다 없애버려라!”하고 대답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내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도 늘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변화가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뒤로 미루면서 늑장을 부립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 만족에 빠져 있거나 너무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또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몰라 두렵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너무 교만하거나 고집스럽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우리는 꾸물거리며 뒤로 미루려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섬길 수 있는 기회를 미루지 맙시다. 쉬지 말고 전진함으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일꾼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일꾼이 필요합니다. 싸움꾼이나 방해꾼이 아닌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그립습니다. 고난을 극복하고 영적 우선 순위를 지키고 쉬지 말고 전진하여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일꾼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김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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