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전도] 데살로니가 전도 (행 17:1~9)

  • 잡초 잡초
  • 265
  • 0

첨부 1


데살로니가 전도

어느 곳을 가든지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잇는가 하면 반대로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문제는 어떤 사실을 왜 누구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데 또 어떤 사람은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가 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의 차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을 따진다면 마음에 정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한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남부러울 것이 없이 살아가면서도 한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째질 듯이 가난하게 살아가면서도 마음에 정을 가득 품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왕이면 정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고 살아가는 것이 보다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비결이 아닐까요?

같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항상 부정적인 생각과 패배의식으로 가득해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왕이면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단 한 시간을 살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의 현장에서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두 가지 방식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울은 항상 하는 대로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을 때 거기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들어가 그곳에서 성경을 토론하며 복음을 전합니다. 그것은 자그마치 삼주동안이나 유대인들과 토론하는 시간으로 이어집니다. 그 토론을 통해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증명합니다. 그리고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고 있는 이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바울의 증거에 대한 두 가지 반응이 여기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중에 바울의 말에 설득되어 바울과 실라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많은 그리스인들과 적잖은 귀부인들도 바울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뮬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바울이 습관대로 회당에 들어가 삼 주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유대인들과 토론을 벌이며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증명하는 가운데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고 있는 이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말한 그 말을 듣고 설득된 사람들 다시 말해서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인들과 적잖은 귀부인들 가운데 있었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유대인들과 토론하는 가운데 전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여 믿는 사람이 생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같이 들었던 사람들이 모두가 다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 가운데 바울의 말에 설득되어 바울과 실라는 따르는 사람들이 생긴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마음에 역사하신 성령님이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이니 하나님이 보내신 자 메시아를 자기들이 십자가에 죽게 만들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들의 잘못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니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처음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을 때 그들은 두려운 나머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는 동산 숲 사이로 숨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것은 아담이 어디에 있는 것을 몰라서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 생각해서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자기들의 잘못을 시인하고 회개하는 그 모습을 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찌해서 내가 금한 그 열매를 먹었더냐?”고 물으시는 주님 앞에서 자기들의 잘못을 시인하기보다는 서로의 책임을 전가하기에 바빴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용서와 용서를 통한 회복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가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매우 화가 나서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네가 왜 화를 내느냐? 왜 안색이 변하느냐? 네가 좋은 마음을 품고 있다면 어찌 얼굴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좋은 마음을 품지 않으면 죄가 너를 지배하려 할 것이다. 죄는 너를 다스리고 싶어 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그 누구도 하나님의 법 앞에 자유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 가운데 죄의 뿌리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에 좋은 마음을 품지 않으면 여전히 죄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지 좋은 마음을 품고 선을 행하는 자로서 살아가야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좋은 마음을 품고 선을 행하려고 하기 보다는 우리의 욕심을 따라 내 생각대로 마음껏 살고자 하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예수님께서 탄식하셨던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치고 천국을 부인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입으로는 천국이 어디 있냐고 하면서 부인할지라도 천국과 지옥 가운데 어디로 가고 싶으냐고 하면 하나같이 천국으로 가고 싶다고 합니다. 우리는 장례식장에 가보게 되면 거기에 명복을 빈다는 글을 써 붙여 놓은 것을 흔히 볼 수 있고 보다 좋은 곳에서 편히 쉬시기 바란다는 말들을 하는 것도 근본적으로 우리네 마음에는 천국에 대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바르게 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나는 아마도 지옥으로 가고 말거라고 하지를 않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천국 가는 길을 아직도 모르고 있고 또 그 길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 얼마나 안타까운지요? 아니 그 길에 대해서 전해 들으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 때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느냔 말입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은 이미 예수님에 대해서 들었고 그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시오 구세주로 마음에 믿고 입으로 시인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먼저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으로만 믿는 사람이 아닌 이제는 우리의 삶으로 그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유대인 중에 그 말에 설득되어 바울과 실라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겼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많은 그리스인들과 적잖은 귀부인들도 바울을 따랐다고 말합니다. 여기 바울을 따랐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메시야로 그리고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삶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앞에서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던 가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네가 좋은 마음을 품고 있다면 어찌 얼굴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좋은 마음을 품지 않으면 죄가 너를 지배하려 할 것이다. 죄는 너를 다스리고 싶어 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우리가 가진 개역 개정 성경에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에는 우리를 죄 가운데로 이끌어 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함으로 생긴 결과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서 이 죄의 굴레에서 벗어났으니 이제부터는 우리의 마음에 있는 죄의 소원 다시 말해서 우리의 마음을 죄의 길로 이끌어 들이고자 하는 그 마음에 따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선을 행하는 자요 좋은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마음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항상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성도의 모습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결국 죄가 무엇입니까? 나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나만 위하는 것입니다. 내 몸만 위하는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러다보니까 남을 생각지를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나만 편하면 되고 나만 좋으면 되고 그저 나, 나만 생각합니다. 이기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좋은 마음을 품어 선을 행한다고 하는 것은 나보다 먼저 남을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아니 남을 먼저 생각한다면 나는 어떻게 된다는 말이냐고 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을 바꾸어서 우리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나도 좋고 남도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남에게는 좋으나 나에게는 안 좋은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때 지금 당장은 내게 손해인 것 같으나 결과적으로는 그 모든 것이 내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원리입니다. 아무리 많이 심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거둘 수가 없습니다. 돕는 배필을 지으신 하나님의 원리는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마음을 품어 선을 행하는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요 먼저 남을 생각할 때 그것이 갑절로 나를 위하는 것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제는 믿음 안에서 형제요 자매된 우리 모두를 위해서 먼저 섬기는 자요 베푸는 자로서 살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로 거두게 되는 갑절의 기쁨을 누리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반면에 우리가 또 하나 생각할 것을 훼방하는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이들을 시기하여 시장에서 불량배들을 모아 폭동을 일으켜 도시를 혼란에 빠지게 합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군중 앞으로 끌어내려고 야손의 집으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를 찾지 못하자, 그들은 야손과 다른 형제 몇 사람을 마을의 관원들에게 끌고 가서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던 사람들이 여기에도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야손이 그들을 자기 집으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가이사의 법을 어겨가며 예수라 하는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하면서 황제의 명령을 거스르는 행동을 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말을 듣고 마음에 싫어하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당연히 바울의 말을 따르는 사람도 있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우리는 당신네가 전하는 말을 믿지 않소. 우리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라고 젊잖게 말하면 안 되는가요? 아주 경우 바르게 반대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여기 보십시오. 이들은 마음에 시기가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시장에서 불량배들을 모아 폭동을 일으켜 도시를 혼란에 빠지게 했다고 합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군중 앞으로 끌어내려고 야손의 집으로 쳐들어갑니다. 하지만 거기서 바울과 실라를 찾지 못하자 야손과 다른 형제 몇 사람을 마을의 관원에게 끌고 가서 큰 소리로 외치는데 그 말이 또한 거짓입니다. 언제 바울과 실라가 가이사의 법을 어겼습니까? 언제 예수라 하는 다른 왕이 있다고 말했습니까? 언제 황제의 명령을 거스르는 행동을 했단 말입니까? 이들은 이렇듯 자기들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서 거짓 증거를 대면서까지 바울과 실라를 모함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패거리를 지어서 폭력을 휘두르면서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훼방하는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난폭성입니다. 폭력으로가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까? 그것도 혼자서가 아닌 떼거리로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회를 어지럽힌 적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 적이 있던가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있습니까? 우리들이 사회를 어지럽힌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흔히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사회를 어지럽힌다고 말합니다. 조상도 몰라본다고 말합니다. 사회의 질서를 문란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 사회 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어지럽힌 적이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그들에게 해를 끼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게 말들을 합니다. 그러면서 말로 폭력을 휘두릅니다. 해서는 안 될 말까지 서슴지 않고 마구잡이로 해댑니다. 더 나아가서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아주 고통을 안겨줍니다. 실제 폭력을 휘두른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비단 사회와 교회의 마찰뿐만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의 다툼도 보면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은 결코 무리를 짓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리를 진다면 그것은 함께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결코 폭력을 휘두르지 않습니다. 거짓말로 사람들을 선동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나타나는 결과만 가지고도 무엇이 바른지 잘못됐는지를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서로 제대로 어울리지도 않던 사람들까지도 은혜를 헤치는 일에는 어쩌면 그렇게도 힘을 잘 모으는지 모릅니다. 모여서 기도하자 전도하자고 할 때는 잘 안 모이던 사람들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정죄하는 일에는 어쩌면 그렇게도 잘 모입니까? 그리고 해결하는 방식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하면서 해결해 나가기보다는 힘으로 폭력으로 물불 가리지 않고 대들어가면서 자기들의 뜻대로만 이루려고 하지를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이것을 바로 분별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흥분해서 뜻을 이루려고 할 때 그 마음이 어떻습디까? 신나고 즐겁습니까? 마음에 상대방에 대한 정말로 안타까워하면서 바로 세워주려고 하는 마음입니까? 아니면 저런 놈을 죽여 버려야 돼 하고 정죄하는 마음입니까? 오히려 어떤 일이 생길 때 모든 것이 기도하지 못한 내 탓이라고 자기 가슴을 쳤던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우리 교회 성도들은 모두가 은혜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서로의 어려움을 내 일처럼 알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는 마음들을 가지고 있고 조은 마음을 품어 선을 행하고자 하는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어쨌든 이렇듯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 앞에서 야손과 그 집안사람들은 전혀 대거리를 하지 않습니다. 마주 싸우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단 한 마디 변명도 하지를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 역시 지금까지 함께 지내던 이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 구원해야 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이 결국 하나님의 역사를 불러오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사람들의 다툼이 아닌 그 뒤에서 조종하는 악한 세력이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문제가 있을 때 더욱 눈물로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 마음으로 용서하고 품어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요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도우시는 귀한 역사가 더욱 넘쳐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무리와 마을의 관원들은 고발자들의 말을 듣고는, 당황하였습니다. 하지만 관원들도 무엇이 문제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렇기에 마을의 관원들은 야손과 다른 신자들에게서 보석금을 받고 그들을 풀어 주었던 것입니다. 당장은 왜 우리가 보석금을 내면서까지 풀려나야 하느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야손과 다른 신자들은 조금도 거기에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비록 보석금을 내기는 했지만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서로 다툼이 생길 때 마주 싸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럴 때 조용히 하나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십시오. 누구 때문에 문제라고 하지 말고 그 사람을 위해서 중보하며 축복하기를 계속하십시오. 내가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시도록 하나님께 맡겨 드리십시오.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언제든지 우리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좋은 마음을 품고 선을 행함으로 오히려 악을 이기는 귀한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축복자요 중보자된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