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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주일] 생기의 성령 (겔 37:9-14, 행 2:1-13, 요 16: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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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성령 강림주일 시작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은혜를 받고 방언도 하고 하나님의 능력도 보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날입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성령임재가 여러분의 성령 강림절 되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오순절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이전에도 성령이 역사했습니다. 구약에 에스겔을 여러분께서 봉독해서 들으셨는데 에스겔은 성령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계곡마다 가득 찬 마른 뼈들이 성령이 주시는 생기를 불어 받았더니 뼈마디가 우두둑 소리를 내며 살이 붙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났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이야기를 설명했습니다. 뼈 마디마디로 화장을 하는데 생기만 불어넣으면 뼛가루든 뼈마디든 우두둑 소리를 내며 다시 소생하고 살이 붙고 살아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살아 움직이는 살리는 영이 성령입니다. 에스겔서 말씀은 살리는 영, 죽은 자도 살리고 힘든 것도 풀고 살리는 영이 성령입니다. 그러면서 에스겔이 오늘 본 이야기를 우리한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 이후에 남과 북으로 분단됐습니다. 분단된 북쪽을 이스라엘 그렇게 불렀는데 이스라엘은 이미 앗시리아란 나라한테 망했고 한 백년이 더 지난 다음에 망한 나라가 있는데 남쪽에 유다입니다.

단순한 것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남쪽나라 유다가 새로 등장한 바빌론 이라 이름 하는 큰 나라한테 망했습니다. 망한 해가 BC 586년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586년 전 예루살렘 성전에 완전히 돌짝하나 남기지 않고 파괴가 됐고 성전 안에서 수많은 지도자와 사람들이 칼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짐승의 피로 제단에서 제사를 드리고 죄 사함을 받던 성전 지성소 앞에서 바빌론 왕의 군대가 와서 사람들 모아놓고 목을 치고 다리를 자르고 참수형에 처하는 것이 성전이 됐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이 참수의 현장이 되더니 완전히 파괴시켜서 돌짝 하나도 성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때가 586년입니다. 그러기 11년 전 BC 597년에 이미 예루살렘은 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 이전부터 망하기 시작했지만 특별한 사건이 생겼습니다. 마지막에 바로전인 유다 왕 여호야긴 이라는 왕이 11년 전인 BC 597년에 느브갓네살의 군대에 포위가 돼서 포로가 돼서 손을 쇠사슬에 결박된 체 바빌론으로 끌려갑니다.

당시 뭐 자동차도 없었을 거구요 질질 모래밭을 끌고 갔을 겁니다. 그 뒤로 관리들과 수많은 지도자들이 함께 쇠사슬에 묶인 체 바빌론으로 끌려갑니다. 그 광경을 보는 유다 백성들의 마음은 오죽했겠습니까? 몽땅 끌려갑니다.

여호야긴 왕의 아들인 히스기야가 등장해서 이제 마지막 용트림을 합니다. 그래서 바빌론 제국에 대해서 반기도 들고 구석구석에서 독립투쟁이 생겨나고 분노와 폭발이 됩니다. 조직화 됩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느브갓네살 왕의 바빌론 군대는 더욱 압박하여 사람을 죽이기 시작하는데 일부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전 지성소에서 참수형에 처합니다. 이걸로 이스라엘은 끝장을 보았습니다. 근데 오늘 성경말씀을 쓴 에스겔 선지자 역시 종교지도자의 한사람으로 뽑혀서 포로로 바빌론으로 끌려갑니다.

바빌론에 가서 현장을 봤더니 계속에 마른 뼈들이 수북이 쌓여있습니다. 무슨 뼈냐 하면 거기서 강제 노역을 당하다가 죽은 사람들, 반항하다가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죽은 지 오래됐는지 살은 하나도 없고 뼈가 완전히 말라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었습니다. 말랐습니다.

민족이 통째로 마른 뼈가 됐습니다. 이런 현실을 보고 오늘 에스겔이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마른 뼈 계곡에 좌절과 분노와 절망 실망만 온통 계곡을 덮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나님이 마지막 에스겔을 통해서 주시는 성령축복의 말씀입니다. 마른 뼈들에게 내 말을 전해라.

내가 생기를 불어넣을 테니 뼈들이 살아서 마디가 서로 우두둑 소리를 내며 맞춰지고 살이 붙고 생겨나는 일을 시작할 테니 가서 성령의 임재를 갈구 하라고 하여라. 너희 민족이 마른 뼈가 돼가지고 바빌론의 언덕에 수두룩이 쌓였으니 하나님의 성령의 생기를 불어넣음 받으면 다 살아난다.

사실 이렇게 에스겔이 예언을 했습니다. 이렇게 살아난 기간이 미안하지만 586년 완전히 망한 다음에 70년 지난 다음에야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가 한 70년쯤 계속되었습니다.

아주 머나먼 옛 이야기지요. 우리나라 이야기를 제가 이와 결부시켜서 하겠습니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1910년 한일 합방이 되면서 우리나라는 완전히 일본의 속국이 됩니다. 36년 식민지였지요.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실지로 일본의 속국이 되었을까 이렇게 질문을 제게 하면 역사학자 마다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습니다. 오늘 제가 아까 말씀드린 마지막 두 번째 왕인 여호야긴 왕이 쇠사슬에 결박되어 바빌론으로 질질 끌려가서 나중에 이분까지 마른 뼈의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는 사건과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는 1895년 민비가 왕궁에서 일본 사람한테 살해됩니다. 민비시해. 이것을 우리가 을미사변 이렇게 얘기합니다. 1910년에 합방됐다고 생각하고 1895년이면 15년 전 이야기입니다.

민비시해부터 시작해서 한일합방이 되기까지 우리가 15년 동안 받았던 고난 아픔 좌절, 민족의 운명.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야긴 왕이 쇠사슬에 결박돼 질질 끌려간 다음에 초토화돼서 망하기 까지 11년 아마 비슷한 기간 동안에 유대 땅 백성이나 우리 백성이나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당시 우리가 보고 민비도 시해 당했고 그 다음에 와서는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이 내려졌고 이런 저런 계기가 돼서 의병활동이 곳곳에서 번졌고 왕이 있으나 마나 힘이 없고 1907년 군대도 해산되고 의병은 당하고 힘은 없고 우리는 죽어가고 이런 상황에서 1910년 완전히 결판이 나서 식민지로 들어갑니다. 이때 우리 교회에서도 사건이 생겼습니다.

1907년 평양 대 부흥운동이라 이름 하는 부흥운동이 발발 합니다. 회계하는 운동이긴 하나 나라도 빼앗겼지요 민비도 시해 당하지요 의병은 일어나지요 호소할 때 없는 교인들이 무릎 꿇고 새벽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그때 아마 오늘 에스겔서 많이 읽혀졌을 겁니다. 답은 하나입니다. 앙상하게 마른 뼈들한테 가서 내 말을 전해라.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뼈 마디마디 속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을 테니 성령을 불어넣을 테니 뼈마디가 제발 우두둑 소리가 나며 맞붙게 하라. 살이 붙게 하라.

우리는 그 일이 36년 이후에나 독립되어 왔다고 믿으면 됩니다. 우리의 과거 이야기와 유대 백성의 과거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민족단위로 집단적으로 이런 운명을 당할 때 우리가 기댈 곳은 한 군데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는 지금 다 말라빠진 뼈에 불과 합니다.

뼈로 만들어진 무덤. 뼈의 집산지. 아무것도 없습니다. 생기를 주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에게 우두둑 소리 나며 생기가 들어왔다고 했고 성령이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난 역사가 오늘 에스겔서 말씀입니다. 성령 강림절 이 기적을 믿으시렵니까?

실제로 뼈가 생기가 띄면 살아날 수 있습니까? 그런 질문보다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오면 마른 뼈도 살아나게 됩니다. 죽은 자도 살리신 하나님 성령을 통해서 병자도 고치신 하나님이 아무것도 없는 마른 뼈들 생기만 불어넣으면 살리십니다. 생기가 때로는 비가 되어 우리한테 쏟아집니다. 비를 먹고 식물도 자랍니다.

저희들이 설교 끝나면 부를 찬송 있습니다. 빈들에 마른풀 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주님의 성령을 우박처럼 비처럼 주시면 살아나겠습니다. 들판에 핀 백합, 잡초, 꽃들, 가뭄이 나면 완전 시들어서 메말라 버립니다. 죽음입니다. 마른 뼈와 같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우박같이 비만 쏟아지면 완전히 메말랐던 빈들의 마른 풀들이 다시 소생해 살아납니다. 기적입니까? 우리 주변에는 매일같이 경험할 수 있는 이야기. 왜 식물은 단비를 맞으면 살아나는데 왜 동물은 마른 뼈가 됐다고 살나나지 못하게 합니까?

식물에게는 물이 필요하지만 우리에게는 생기만 있으면 살아날 수 있답니다. 기적은 우리가 바라는 최고의 희망사항이지만 우리가 마른 뼈일 때 생기만 오면 살아날 수 있습니다.

빈들에 마른풀이 아니라 시든 나의 영혼도 메말라 버린 뼈도 주님의 생기만 있으면 살아납니다. 본래 사람 만들 때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거기에 갈비뼈로 하와까지 만든 다음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고 기록 돼있습니다.

천지창조하고 인간 창조 때 역사했던 생기가 오늘 마른 뼈 속에도 들어와서 생기를 불어넣으면 다시 살아난답니다. 성령이 뭐냐고 물으면 살리는 기입니다. 성령은 죽은 것들을 살리고 메마른 것도 살리고 제가 타락한 것도 다시 살리고 저한테 마른 뼈라 이름 하는 온갖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사는 사람을 다시 살리는 기가 성령입니다.

에스겔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생기가 오늘 우리 민족에게 주셨고 저한테 주신 걸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이제부터 성령은 생기, 살리는 기. 여기서 우리 죽은 것이 뭔지 하나님께 자부하십시다.

성령은 살릴 때 그냥 살리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영은 모든 인간과 모든 피조물에게 전제 없이 차별 없이 부어지지만 그때 부어지는 하나님의 성령은 모두가 다 받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마른풀을 살릴 수는 있지만 모든 뼈가 다 해당이 되는 건 아닙니다.

이유는 하나님은 생기를 모든 뼈에게 불어넣지만 생기를 받는 뼈만 하나님의 생기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다 역사하지만 하나님은 햇빛을 다 주시지만 비를 다 주시지만 비를 필요한 사람에게 햇빛을 필요한 사람이 햇빛을 받지 햇빛을 피하는 사람에게 해를 주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만민을 사랑하시지만 사랑을 받는 자만 사랑의 혜택을 받습니다. 만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생기는 모두를 위한 가능성입니다. 하나님은 가능성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가능성은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은 가능성으로만 머물고 실현성, 현실성이 없습니다. 신앙이 뭐냐 하면 모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모두 속에 내가 포함돼 있으니 저한테 생기를 주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역사를 하나님의 생기를 받는 결단을 믿음이라 합니다. 신앙이 다른 게 아니고 생기를 받겠다는 결단 그래서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사랑을 먹고 자랄 수 있습니다.

왜 신앙하느냐 하면 신앙 없어도 하나님의 사랑은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기는 세상을 점령하고 계시니 하나님의 사랑은 온 우주에 똑같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제약을 제가 받아서 제 속에 받아들이는 그래서 마른 뼈가 살아나는 경험이 바로 우리의 신앙적 결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다. 생기가 되는 이야기는 나라나 집단만 있을게 아닐 개인적인 작은이야기 그러나 큰이야기 하나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그제 언론 보도를 통해서 읽은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들을 주인공은 여학생인데요, 이희아라고 하는 21살 된 여학생입니다. 나면서부터 선천성 사지 기형 1급. 현재 국립한국재활복지 대학에 멀티미디어 학과에 제학중인 학생입니다.

나면서부터 사지기형 1급으로 태어났는데 두 손에 손가락이 두 개씩해서 네 개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무릎까지만 있고 무릎아래 다리가 없습니다. 이 아이는 태어나면서 죽는 게 아니고 살기위해서는 헬렌 켈러처럼 살고 싶다 하고 희망을 가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한테 헬렌 켈러한테 설리반이라는 선생님이 계셨듯이 희아한테도 피아노 선생님이 계셔서 지도를 잘했고 더 중요한 것은 이 아이에게 훌륭한 어머님이 계셨습니다. 어머님 이름이 우갑순씨 입니다.

두 개 손가락씩만 있고 무릎아래 다리도 없는 딸. 이 어머니는 유방암 수술환자입니다. 유방암 환자지만 선천성 사지기형 1급 장애자 딸을 실망이 아니라 희망을 갖고 기르기 시작해서 위로도 했을 거고 훈계도 했을 거고 그래서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길러 냅니다.

그 과정은 제가 잘 모르겠으나 여러분 상상 한번 해보십시오. 우수한 오케스트라와도 협연도 했고 심지어 CNN에도 소개가 됐고 아주 훌륭한 학생이라고 되겠습니다. 이거 소개한 작가가 그 아이 희아가 베토벤의 월광을 연주하는걸 보고 나는 열광했노라.

그렇게 썼습니다. 열손가락이 아니라 네 손 가락. 무릎 이하에 다리도 없지만 나는 오늘 성경 말씀 보면 나는 생기를 받아 음악을 연주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행복한 것은 뭐냐 하면 장애는 실제 불편합니다. 불편할 뿐 불가능은 아닙니다.

네 손가락으로 연주할 수 있으면 그게 행복할 수 있으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 겁니다. 이 희아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한테 중요한 질문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당신들 네 개도 아니고 열손가락 가지고 무슨 불평이 그리 많습니까?

암도 걸리지 않은 어머님이 계신데 왜 그렇게 불평이 많습니까? 노력해보지도 않고 감사할 줄도 모르고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생기를 받아서 음악도 연주할 수 있고 그림도 그릴 수 있고 시도 쓸 수 있다면 감사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어디까지 가야 당신들은 만족할 수 있습니까? 어디까지 가면 진실로 행복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 작업이나 우리가 내놓는 상품엔 끝이 없지만 저에게 주신 것만으로도 저는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하나님의 생기를 받으면 아름답게 제 생을 장식할 수 있습니다.

써보지도 않고 노력하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고 간구도 없이 언제까지 불평불만으로 지내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만 왜 이러냐고 지내시렵니까? 성령은 만민에게 다 은총을 부어 주셨는데 제가 선택도 안하고 제가 받는 결단도 안하고 생기도 안 받으면서 언제까지 제 사지를 들고 하늘 향하여 불평불만하고 사셔야 합니까?

성령은 언제까지 여러분 곁에 있어야 합니까? 성령은 언제까지 당신들 곁에 와서 움츠리고 기다려야 합니까? 오늘 우리 사회에는 이 어린 학생처럼 그런 사람에게도 성령은 자기 방식대로 역사합니다.

오늘 저에게 주시는 성령의 역사는 뭡니까? 이 민족에게 주신 역사는 뭡니까? 하나님의 역사는 불편부당하셔서 만민에게 항상 들어갈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결단만 필요합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또 다른 성령의 역사를 얘기하십니다. 수만 군데 사는 사람들이 유대 땅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각 지방의 말로 얘기하는데 도대체 기도하는 제자들은 뭐라고 기도를 하는데 각 지방 사람들이 다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방언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두 통했다고 했습니다. 도대체가 어찌된 상황이냐고 감탄사가 흘러나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두 술주정하고 있다. 술주정을 했든 통했던 하여튼 기도하면서 말하는 음성이 모두 다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의 생기가 뭐냐 하면 사랑하는 여러분 말을 하실 때 말을 알아듣게 하십시오. 우리가 한국말 쓰고 살아갑니다. 매일같이 한국말 씁니다.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언론에서도 정치에서도 경제에서도 다 통합니까?

똑같은 문법과 똑같은 구문과 똑같은 말을 하는데 통하고 사십니까? 부부사이에 상통합니까? 자식과 부모사이에 통합니까? 집단과 집단사이에 통합니까? 같은 말을 쓰는데 통합니까?

생기는 뭐냐 하면 당신들은 통해야 합니다. 언어가 달라도 방언이란 다른 언어를 써도 서로 통할 수 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이 됩니다. 그 뜻일 겁니다. 성령의 역사는 다른 게 사람이 살면 언어가 통합니다. 삶이 통합니다. 웃음이 통합니다. 표정이 통합니다.

통하지 않고 왜 그렇게 독백들만 하십니까? 성령의 역사란 통하게 하는 겁니다. 막힌 것을 뚫고 언덕을 넘고 어떤 방식이든 통하며 사는 사회 통하며 사는 공동체 그것이 생기의 역할입니다. 많은 사람이 놀랐습니다. 차라리 술 취했다고 했습니다.

술에 취했다고 할망정 통하는 방식으로 한번 취해 보십시다. 인간의 삶을 통하는 방식으로 한번 취했다고 얘기할 정도로 한번 소통해 보십시다. 성령을 받으신 분들은 다 통합니다.

우리도 한번 통해봅시다. 마른 뼈들도 통한다는데 살아있는 우리가 안통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성령 강림절 저의 절기로만 지키지 맙시다. 나는 통해야 한다. 말을 해야 한다.

서로 알아듣게 말해야 한다. 그리고 받아야 한다. 우리가 좀 어려운 얘기긴 합니다만 인생의 삶이 뭐냐고 물을 때 철학적으로 흔히 두 가지로 얘기합니다. 하나는 인간의 삶의 신조는 본래 인간의 존재라는 게 있고 존재하는 인간은 뭔가 표출합니다.

그것을 행위라고 표현합니다. 존재가 있고 나타나는 행위가 있고. 또 경제를 말하는 사람은 인간의 삶이라 이름 하는 존재가 있고 가진 게 있고. 존재라는 싸인이 있고 행이라 이름 하는 액트가 있고 합산하는 하빈 이라는 존재가 있고. 가진 것 존재. 행위와 존재. 저는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건 성령의 생기가 뭐냐 하면 당신이 어떻게 행위를 하시든지 얼마나 많이 가졌든지 얼마나 많이 벌었든지 그것은 당신의 업적으로 쌓으십시오.

성령의 역사는 당신의 기본적인 존재 삶의 한 가운데 오셔서 비를 주셔서 삶 자체 존재를 풍성하게 만드십니다. 그 말의 뜻은 제가 설교를 안 해도 저의 존재가 삶의 존재가 사실 그대로 설교일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부모가 부모의 딴 얘기를 안 하더라도 부모 됨이 자식들이 보기에 부모의 존재 자체가 이미 사랑의 화신입니다. 그럴 수 있으면 그것 자체가 생기를 발합니다.

어떤 사람의 존재 자체가 은혜요, 존재 자체가 음악이요, 존재함 자체가 소설이요, 존재함 자체가 그림이요, 존재함 자체가 설교요. 성령의 역사란 당신이 살아있고 움직이고 그 자체가 서있는 자체가 살아있는 자체가 바로 엄청난 그림이요 삶입니다.

나머지 그 것이 표출하는 방식이 다양할 수 있습니다. 가진 모습도 다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령의 말씀은 성령의 기가 우리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존재 중심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살아나십시오. 보증합니다. 성령은 생기입니다. 이 기를 오늘 풍성하게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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