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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창 5: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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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에는 아벨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라 하시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비록 그가 가인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나 지금도 믿음의 위인으로서 후대의 신자들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아담의 칠 대 손인 에녹에 관해서 말씀해 드리려고 합니다.

에녹에 대한 성경의 증언은 이와 같습니다.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한 사람의 생애를 언급한 것치고는 표현이 너무 간략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대단한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둘째로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심으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로 옮겨갔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동행’이란 단어를 문자대로 해석하면 함께 걷는 것을 말합니다. 이 동행이라는 말은 동무, 동반자, 동역자, 동업자 등과 같은 말들을 연상하게 합니다. 여행을 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동행자입니다. 누구와 함께 여행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여행이 즐거울 수도 있고 지루할 수도 있습니다. 누구와 친구가 되느냐, 누구와 손을 잡느냐, 누구와 함께 살아가느냐 하는 것 역시 행복한 삶을 위해서 매우 중요합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본 바와 같이, 아벨은 가인으로 인해 억울한 죽임을 당했습니다. 만일 아벨이 가인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더라면 그런 비극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나 그 둘은 숙명적으로 가까이 지내야 하는 형제지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생은 누구를 만나느냐가 아주 중요합니다. 선량한 친구를 만나 감화를 받아 선하게 사는가 하면, 악한 친구를 만나 함께 타락하여 인생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안드레와 그 형제 시몬이 예수님을 만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도님들께서도 아시는 대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백성 앞에 소개하는 일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루는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님이 다니시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했습니다. 이에 두 제자가 스승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이켜 따라오는 두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두 사람이 말하기를 “랍비여 어디 계십니까?” 하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와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 날 두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그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머물렀습니다. 그 두 사람 중 하나가 안드레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본 안드레는 제일먼저 자기의 형제인 시몬을 찾아가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시몬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때에 예수님께서 시몬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날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그 얼마 후에 안드레와 시몬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예수님과 동행하게 되었고 사도로서 영원히 빛나는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만나 인생길을 함께 걸었습니다. 그러나 날 때부터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5장에 보니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365해를 사는 동안 처음 65해는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65세에 첫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후부터 삼백년은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이후에 에녹의 삶은 전환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에녹처럼 우리에게도 이따금 삶을 새롭게 할 특별한 기회가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심각한 병에 걸린 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사업의 실패가 주님을 만나 새로운 인생의 시작하게 하는 전환점이 되기도 합니다.

또는 가족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외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에 따라서 다양한 방법으로 새로운 삶의 기회를 부여하십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가 할 일은 기회를 놓치지 말고 선용하는 것입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삶의 전환기를 맞이했습니다. 이전에도 하나님을 섬기긴 했지만 전적으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서 산 것이 아니었으나 므두셀라를 낳은 이후부터는 하나님이 그의 삶의 중심이 되셨습니다. 그렇다고 일상생활을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에녹이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다고 증언합니다.

간혹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데 열심을 내면 삶의 행복을 포기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는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겨서 가정생활이 불행하게 되거나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는 법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길수록 가정이 행복하게 되고, 사회에서도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우리가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려면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개별적으로 만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처음 만나는 경험을 회심이라고 합니다. 교회에 출석하면서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지 못한 체 형식적인 종교생활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 “1)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 55:)고 부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먼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고 하셨습니다.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별개의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각 자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세상에 미련을 갖고 있으면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합니다. 동행자들은 마음이 맞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길을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맞추어야 할까요?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하나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우리 인생 여정의 계획표를 짜시도록 맡겨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암송하는 시편 23편은 하나님과 동행한 다윗의 고백입니다.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목자와 양은 항상 동행하는 관계입니다. 푸른 초장 뿐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목자는 양과 함께 합니다. 이 때 목자와 양은 동행하는 관계지만 목자가 양을 위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인도합니다. 이 시편에서 다윗은 자신을 양으로, 하나님을 목자에 비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다윗을 보시고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삼상 13:14).

사랑하는 성도님들, 보람되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히브리서 11장은 믿음 장(章)이라고 하는데, 그 5절과 6절에 보면 에녹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본문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자기의 삶을 맡기지 못하기 때문에 애당초부터 동행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에녹은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생각은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언제나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말씀이 우리의 경험과 맞지 않고 우리의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이 순종보다 앞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믿음이 있고나서 그 다음에 순종이 따릅니다. 그런가하면, 순종하는 것을 보아서 그 사람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데는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여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입으로 아무리 자기 믿음에 대하여 말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약 2:17). 그래서는 결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여행을 떠났다고 합시다. 만일 두 사람의 마음이 맞고 의견의 일치를 본다면 즐거운 여행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사건건 마음이 맞지 않고 의견 대립을 한다면 일찌감치 헤어져서 혼자 여행하는 것이 훨씬 편할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마음이 맞으려면 서로를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믿을 만 하신 분이시므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동행의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니, 에녹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다고 증언합니다.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슨 큰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아무리 크고 위대한 일을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을 위하여 크고 아름다운 성전을 지어 봉헌했을 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것은 성전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솔로몬의 믿음과 사랑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큰 성전을 지은들 어찌 하나님을 그 곳에 모실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하여 이사야서 66장 1절에 보니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고 했습니다.

또 솔로몬이 기드온 산당에서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것은 많은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솔로몬의 믿음과 사랑이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을 거역하면서도 뻔질나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서 1장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믿음으로 드리지 아니한 제사는 아무리 많은 제물을 바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지 아니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말렉 족속을 쳐서 다 진멸하라고 하셨으나, 사울은 기름진 소와 양을 살렸습니다. 사무엘이 와서 그의 잘못을 지적하자 사울은 변명하기를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그 때 사무엘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할 때 가장 기뻐하십니다.

미가서 6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6)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여기서, 선지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방안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먼저, 일 년 된 송아지를 번제로 바치면 될까라고 묻습니다. 일년 된 송아지는 제물로서 가장 온전한 것입니다. 또 그는 천천의 수양을 바치면 될까 라고 묻습니다. 그것은 솔로몬이 드린 일천번제의 천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또 선지자는 하나님께 강수 같이 많은 기름을 바치면 기뻐하실까 라고 묻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아브라함처럼 맏아들을 아낌없이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앞에서 언급한 것들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음을 알아차립니다. 그 대신,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해서 공의를 행하고 인자한 태도를 갖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은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의로운 자라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원하십니까? 에녹처럼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에녹은 하나님을 상주시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창세기 5장 6절에 보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에녹이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로 거처를 옮겼다는 뜻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불말이 끄는 불수레를 타고 승천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에녹을 데려가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와 동행하였던 에녹에게 상을 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만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생명나무의 실과를 주어 영생을 누리게 하셨을 것입니다.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동행의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을 보지 않도록 데려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노아에게 홍수 심판에서 구원 받는 상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더니 의롭다 인정해 주시고 가나안을 상급으로 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영생과 부활과 천국과 같은 상급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상급을 기대하는 것은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보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두 가지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어야 하고, 다른 하나는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상급을 바라보시고 고난을 참으셨다고 증언합니다. “1)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서머나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에녹처럼 주님께서 주실 상급을 바라보고 믿음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상급을 바라는 사람이라야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가오는 여러 가지 핍박과 시련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의  영광스러움을 알수록 우리는 더 큰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하신 로마서 8장 18절 말씀이 이 사실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7)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고 했습니다. 경기에 출전한 선수가 상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최선을 다해 분발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상을 기대하는 선수는 혼신의 힘을 다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 믿는 자들에게도 해당하는 원칙입니다. 하나님을 상주시는 분으로 믿지 않는 사람은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지 못합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 힘쓰고 애쓰는 사람을 보면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에녹처럼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세상은 하나님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사상 속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 대신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화려함과 쾌락과 번영에 마음을 빼앗겨서 자기들의 영혼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님들께서는 이 시대를 본받지 마시고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할 뿐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림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생명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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