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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칼 (눅 22:3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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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35~36절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삶에 뭔가 심상치 않은 전환의 때가 왔음을 느끼게 합니다. 전에는 제자들끼리 전도하러 내보내실 때에도 전대나 배낭이나 여벌 신발도 가지고 가지 말라 하시던 예수님께서 “이제는” 전대도 갖고 배낭도 준비하라 명하신 것입니다. 특히 놀라운 것은 칼을 지녀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비상사태의 시기가 도래했다고 짐작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리라 봅니다.

  허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한 결정적인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일들이 앞서 일어났음을 우리는 이미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기록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의 마지막 유월절이 다가왔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를 본격적으로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눅22:1~2). 이에 때맞춰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가룟인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넘겨줄 방도를 함께 의논함으로써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음모는 급진전되고 있었습니다(눅22:3~6). 그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다 아시면서도 이를 피하려 하지 않으시며 태연히 제자들에게 유월절 준비를 하게 하시고 그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식사를 시작하시기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눅22:15~18)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만으로도 예수님과 또 제자들에게 곧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을 짐작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라”(눅22:21~22)는 말씀을 덧붙이심으로써 심각한 사태의 발생을 예고하신 바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예수님의 수제자로 자타가 인정하던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이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눅22:34).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정황에서 볼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제자들이 즉각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본문 38절) 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그러면 그렇지. 주님께서 드디어 칼을 뽑으시는구나. 이제 우리가 무기를 들고 일어나 싸울 때가 되었음을 알리시는 거야” 하는 생각에 “이미 우리에게 칼 두 자루는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이었을지 모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칼을 준비하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께서 무장봉기나 무력저항을 명하셨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와 연관해서 우리는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한 제자들의 말에 예수님께서 “족하다”(본문 38절) 하신 말씀의 뜻을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족하다”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장봉기나 무력저항을 명하신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장봉기나 무력저항을 명하면서 칼 두 자루로 족하다고 여길 지도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족하다” 하신 말씀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이야기는 그만 하자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도무지 바로 이해할 줄 모르는 제자들에게 실망하시며 더 이상 그 이야기를 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 47~50절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을 때 예수님을 붙잡으려는 무리가 유다를 앞세우고 예수님께 다가오자 제자 중 한 사람이 칼로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의 오른쪽 귀를 떨어뜨렸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무력저항의 지시로 이해했기에 거침없이 행한 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잘 했다. 바로 그거다. 이제는 그렇게 할 때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것까지 참어라” 하시고는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만져 낫게 해주셨습니다(본문 51절). 이 예수님의 행동은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하신 그의 말씀이 결코 무력사용을 지시하시거나 허용하신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 어느 때 그 어느 경우에도 무력의 사용을 칭찬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으실 것이라면 왜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사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우리에게 남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새로운 때의 도래를 알리신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상황의 변화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고난과 죽음과 핍박과 시험의 때가 이제 곧 시작될 것임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지극히 견디기 어려운 일들이 닥칠 것이며 이에 단단히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주의시키고자 하신 것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상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만큼 충격적이고 감내하기 힘든 일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또 실제로 유다는 배신했고 베드로까지 세 번 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으며 나머지 제자들마저 다 흩어져 도망쳤을 만큼 그들에게 닥친 시험은 크고 무서웠던 것입니다. 그렇게 전대나 배낭이나 여벌 신발 없이 다녀도 부족한 것이 없던 때와는 전혀 다른 고난과 시련의 때가 되었으므로 그 고난과 시련에 넘어가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야 할 것을 당부하신 말씀이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였던 것입니다. 겉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라는 것은 이제 닥칠 고난과 시련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실 때 제자들에게 닥칠 고난과 시련이 무엇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께서 약속된 메시야로서 보내시는 이시며 만인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데 따르는 핍박과 죽음의 위협 아니었겠습니까? 핍박과 죽음의 위협을 못 이겨 그 믿음을 포기한다면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겉옷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 믿음은 모든 것을 잃더라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과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목숨을 잃는 일이 있더라도 그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사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비로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검이 육신을 지키기 위하여 싸우는 도구로서의 칼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영혼을 지키기 위한 영적 능력으로서의 칼임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칼은 과연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달리 말하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직면하게 될 온갖 고난과 시련을 이기게 하는 힘이 과연 무엇이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제는 칼을 준비하라” 말씀하신 이후의 예수님 자신의 언행 속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본문 3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하신 후 밖으로 나가셔서 습관을 따라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서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본문 40절)고 말씀하시고는 당신께서는 거기서 돌을 던지면 닿을만한 거리를 더 가셔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본문 41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칼을 사러 시장으로 가시거나 대장간을 찾으신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러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힘을 다하여 간절히 기도하셨는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될 정도였습니다(본문 44절). 그렇게 기도하시고 제자들에게 돌아와 보니 제자들은 잠들어 있었습니다(본문 45절). 그러자 제자들에게 다시 하신 말씀이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본문 46절)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차적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준비하라 하신 칼이 기도의 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단지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는 사실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무슨 기도를 하셨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본문 42절을 봅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였음을 눈여겨보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내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고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싶은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기를 구하는 기도,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과 치욕, 죽음의 공포, 그리고 그것들을 피하고 싶은 인간적 유혹에 맞서 비장하게 빼어 드신 칼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할 때 중요한 것이 무조건 많이 하고 크게 소리 지르며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진정으로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실히 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목 터지게 외치며 하루 종일 기도해도 그저 내 원대로 되기만을 구하는 기도는 참된 기도가 아니며, 비록 조용히 기도해도 오직 하나님의 원대로 되기를 진정으로 간구하는 기도가 참 기도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기도하신 후 당신을 잡으러 온 사람 중 하나가 제자 중 한 사람이 내려친 칼에 귀가 떨어지자 제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이것까지 참어라” 하시고는 곧 그 귀를 만져 원상으로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본문 52절에 따르면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들은 마치 강도를 잡으려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지만 검과 몽치를 향해 화해와 치유의 손길을 내미신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시고 선으로 대하시는 화해와 치유의 손길, 그것이 예수님께서 빼어 드신 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붙잡혀 가셔서 희롱을 당하시고 매를 맞으시며 많은 말로 욕을 들으셨지만(눅22:63-65)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겁에 질려 비굴해지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불리한 입장을 모면하시려 침묵을 지키신 것도 아닙니다. 붙잡혀 가신 다음날 공회에 모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심문하며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하자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셨으며(눅22:66-69), 그들이 다시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묻자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눅22:70)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이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는데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겠는가?” 할 정도로 분명하게 대답하셨습니다(눅22:71). 거짓증언들을 모아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려는 자들 앞에서, 진리대로 말하면 죽을 것이 뻔한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당당히 진리를 밝히신 것입니다. 거짓에 맞서 예수님께서 빼어 드신 칼, 그것은 곧 진리였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입으로부터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진술을 이끌어냄으로써 그를 신성모독죄로 처치할 명분을 확보한 유대인의 고위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로 끌고 갔습니다(눅23:1). 거기서 그들은 거짓말을 더 보태며 예수님을 고발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눅23:2).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책잡아 로마 총독에게 고발할 구실을 만들고자 간계를 부려 질문을 던지기를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했을 때 그 간계를 아시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답하신 적이 있지만(눅20:19~26)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들은 악의적으로 예수님의 발언을 왜곡시킨 것입니다. 그때 빌라도는 단도직입적으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때 예수님께서는 거침없이 대답하셨습니다: “네 말이 옳도다”(눅23:3). 빌라도는 처음에는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 확신하며(눅23:4, 14~15, 20, 22) 그를 석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지르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라고 계속하여 요구하자 그들의 뜻대로 하고 말았습니다(눅23:5, 18, 23). 자신의 정치적 야심 때문에 양심의 소리를 희생시킨 비열한 행위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거짓 증언과 악의적인 발언왜곡과 비양심적인 처신을 담담히 지켜보실 뿐이었습니다. 항변도 탈출의 시도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이루시도록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순종과 사랑과 희생, 그것이 예수님께서 빼어 드신 칼이었습니다.

  인류구원의 역사를 완수하시기 위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앞두시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준비하라고 명하시며 또 친히 보여주신 칼,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원대로 되기를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대하는 화해와 치유의 손길이었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거짓에 맞서 진리를 밝히는 용기였습니다.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라면 거짓 증언과 악의적인 발언왜곡과 비양심적인 처신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지킨 순종과 사랑과 희생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4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며 기도하실 때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칼이 아닌 예수님의 칼을 손에 잡고 이 세상과 싸울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돕는 천사를 하늘로부터 보내주시리라 믿습니다. 예수님의 칼을 잡고 하늘로부터 오는 도움을 받아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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