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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 (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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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5:13,14,16)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영향을 끼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어떤 역할과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 이 세상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과 동떨어져 사는 고립된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 적극적으로 뛰어 들어 관계하면서 영향을 주며 살아야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할 때에, 가나안 문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거친 광야의 삶을 살아왔던 이스라엘 민족은 부유하고 안정된 가나안 문화를 접하면서 그들이 이전까지 겪었던 광야의 생활보다는 가나안 생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광야에서 함께 하셨던 야훼 하나님 보다 가나안의 부유한 문화를 만들었다고 여겨지는 바알과 아세라 우상이 더 위대하게 생각된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정착 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는 야훼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숭배하는 신앙에 흡수되어 버리는 형태가 나타났습니다. 그런가 하면, 홍해와 요단강을 가르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메추라기와 만나로 먹여 주시고, 반석을 쳐서 시원한 물이 솟게 하여 목마르지 않게 하시고,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게 하신 야훼 하나님을 버릴 수는 없어, 야훼 하나님과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함께 섬기는 혼합주의적이고 타협적인 신앙의 형태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와는 달리 가나안 문화는 바알과 아세라 우상의 것이기에 야훼 하나님과 적대적인 것으로 보고 가나안 문화의 생활을 거부하고 광야로 나가 동굴에서 살면서 야훼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배타적이고 도피적인 신앙의 형태도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중에 선지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가나안 농경문화의 부유도 하나님이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우상이 가나안의 부유를 준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바알과 아세라는 신이 아니고 우상일 뿐,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이것은 가나안 문화의 잘못된 신앙을 개혁하는 변혁의 신앙입니다. 흡수와 타협의 신앙을 바로 잡아주고 배타와 도피의 신앙에서 포용과 참여의 영향을 끼침으로 변화를 만드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본질적으로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선지자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향한 소금과 빛의 삶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소금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먼저 방부제의 역할입니다. 이것은 오염시키며 썩게 하는 나쁜 균들을 죽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단의 역사를 막는 것이며 세상에 만연하고 있는 죄의 번식을 막고 악의 활동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방부제적인역할과 함께 맛을 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소금과 같이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와 보람을 주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세상은 쾌락을 추구함으로 맛을 주고 있으나 그리스도인은 의미와 보람을 추구함으로 맛을 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이 나누어지기에 평안과 기쁨과 즐거움의 맛이 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인간내면의 영적 만족의 맛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한 소금의 역할은 치료와 함께 화목의 역할입니다. 소금은 치료제로도 쓰입니다. 상처와 고통 속에 잇는 세상 사람들을 치료하는 역할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9장 5절에서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소금의 역할을 다하여 화목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소금이 제물로 쓰임같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이웃과 화목하게 하는 역할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소금의 역할과 함께 빛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빛의 역할은 어두움을 밝혀주고, 길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도심 한 복판의 건널목,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인지라 길을 건너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빨간 불은 파란 불로 바뀔 줄을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신호등을 거듭 쳐다보며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사람이 지나가는 차가 없자 아직도 빨간 불임에도 재빨리 건너갔습니다. 그러자 뒤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따라 길을 건넜습니다. 그 때 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있던 사내아이도 길을 건너려고 할머니를 잡아끌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움직일 줄을 몰랐고 도리어 손자의 손을 잡아 당겼습니다. 손자가 “다른 사람은 다 지나가잖아요. 우리도 건너가요.” 하고 조르자 할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 사람들을 보지 말아라. 불빛을 바라보고 그대로 따라야지” 그리고 난 뒤 곧 신호등은 파란불로 바뀌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신호등을 무시하고 걸어가는 불법의 선동자가 아닙니다. 신호등과 같이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삶의 표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십니까? 우리의 삶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여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소금과 빛의 삶을 살아야 함을 분명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빛과 짠맛을 가질 수 잇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한다.”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맛을 내야 할 우리자신이 맛을 지니고 있어야 하고, 비추어야 할 빛을 가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스스로 빛을 낼 수 없고 맛을 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주셔야 하고, 맛을 내도록 해 주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6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사건을 가리켜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라고 기록하여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아있는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빛은 어떻게 소유하는 것입니까?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 4절에서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의 빛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빛은 예수님의 생명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주신 이 예수님의 생명을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생명의 빛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빛을 가지는 데서 빛을 비추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가리켜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고 하셨습니다. 이 빛을 가진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갈 때 소금의 맛을 내게 되는데, 이 맛은 예수 안에서 나오는 맛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빛을 더욱 밝게 비추고 더욱 짠맛을 내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 안에서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겸손함과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며 소금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는 강한 빛과 짠맛의 능력을 간직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만과 불순종의 신앙의 태도는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쓸데없어 버려집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밟히고 무시 받게 됩니다. 교만과 불순종은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말 아래 두는 결과를 만듭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기이히 여길 정도로 칭찬하셨습니다. 백부장은 보잘 것 없는 하인의 질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께 간구하는 겸손함을 보였습니다. 당시 시대적 배경으로 볼 때에 하인의 목숨은 백부장에게 있어 하나의 소모품과 같았습니다. 더구나 백부장은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하기에 부끄러운 자라면서, 다만 말씀만 하시면 내 하인이 낫겠다고 했습니다. 최고의 겸손과 순종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이 겸손과 순종은 하인의 생명을 구원하고 예수님께 인정받는 큰 믿음이 되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빛을 비추며 맛을 내겠습니까? 겸손과 순종으로 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소금과 빛의 삶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소금은 음식물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해 냅니다. 음식물 속에서 녹아져 형체도 없이 사라짐으로서 제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소금이 소금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녹아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빛을 비추기 위해서는 우리가 불로 태워져야 합니다. 소금의 역사는 녹아져 희생하는 데서 나타나며 밝은 촛불은 붙여진 불을 태워주는 초의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은 이러한 희생의 삶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다이아몬드나 보석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소금같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희생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보석처럼 귀하게 대접받지 말고 더러운 곳, 추한 곳, 살맛 없는 곳에 녹아들어가 희생함으로 맛을 내고, 정화시키고 깨끗하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너무 살아있어서 자기를 자랑하며 과시하려고 하는 그곳에는 그리스도인이 맛을 잃어버려서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멸시받는 버려진 소금만 있을 뿐입니다.

  교만의 그릇으로 등불을 덮어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가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맛을 잃고 빛을 가리면 오히려 교회의 시험거리가 됩니다. 우리들의 행실이 착한 행실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위해서는 빛을 발하고 맛을 내도록 희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고 말씀하셨습니다.

  조류에 속하는 동물들은 날개가 있어 날 수 있습니다. 많이 날 수 있는 새들도 있고 조금 나는 새들도 있습니다. 독수리 같은 것은 높게 그리고 멀리 날 수 있으나, 칠면조와 타조 같은 것은 거의 뛰어 다니다시피 하고 급한 상황에 처할 때에는 몇 발자국정도 날기도 합니다. 그리고 새들 가운데는 아름답게 지저귀는 새들도 있습니다. 새들이 노래를 부른다고 하기도 하고 지저귄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새들이 다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독수리나 칠면조나 타조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며 작은 참새와 가냘픈 카나리아 같은 새들이 노래를 부를 뿐입니다. 작은 새일수록 더욱 아름다운 소리를 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는 예수 생명의 빛이나 향기와 맛이 우리에게서 나옵니다. 마치 작은 새들이 노래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독수리와 같은 큰 새들처럼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과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명의 빛을 비추고 예수님의 맛을 내는 노래를 부를 수 없습니다. 작고 겸손한 새들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듯이 자기를 낮추고 겸손히 희생하는 성도들이 예수님의 빛과 예수님의 맛을 드러내는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비추는 예수 생명의 빛, 우리가 내는 그리스도의 맛으로 이 세상을 그리스도의 나라로 구원하며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하십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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