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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물을 통과한 사명 (느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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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국제영화제(Canne Film Festival)’에서 영화배우 전도연 씨가 여우주연상을 탄 일이 세간의 화재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출연한 ‘밀양’이라는 영화가 기독교 신앙을 다루었다는 사실 때문에 신앙인들에게도 굉장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한 여인 안에 맺혀졌던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인은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와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사랑하는 아들까지 유괴범에 납치되어 살해를 당하는 슬픔과 비극을 경험합니다. 절망에 빠진 이 여인은 이웃 사람의 전도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잠시 평화를 얻는 것 같이 보입니다. 여인은 일시적으로 평화를 누리는 것 같지만 여인의 마음은 자기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향한 끊임없는 미움과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신앙인으로서 마음속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유괴범을 직접 만나 용서하겠다는 각오를 하고 교도소로 향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기가 용서해주려고 했던 유괴범이 아주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용서하기 전에 이미 교도소에 있는 유괴범이 하나님 앞에 죄 용서를 받았다고 고백하는 것을 듣는 순간, 여인은 피가 거꾸로 도는 경험을 합니다. 범인에게서 뻔뻔함을 느낀 나머지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는 자기 파괴적인 소리가 가슴속에서부터 솟구치는 것을 듣게 됩니다. 원초적인 미움과 분노와 증오가 여인을 사로잡았습니다. “나는 내 아들을 죽인 이 유괴범을 겨우 용서를 하려고 하는데 이 범인은 벌써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니 이해가 되십니까?”

여인은 유괴범을 용서할 수 없다는 배신감과 반역감에 사로잡힙니다. 그녀는 이 사실 때문에 자기가 믿었던 하나님께 저항하고, 교회 나와서 분노의 슬픈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향해서 배신감을 토로한 후 교회를 떠납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이렇게 반항을 하다가 밀양에 처음 도착할 때부터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한 남자의 전적인 용납과 사랑에 의해서 치유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잠깐 보여줍니다. 그래서 “Secret Sunshine(密陽)”즉 감추어진 햇빛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영화를 반 기독교적인 영화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용서와 구원을 증거 하는 기독교 신앙을“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하는 노래를 틀면서 조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면으로 보면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애통이 어떻게 치유되는지의 측면에서 보면 기독교 신앙에서 늘 갖고 있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다룬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 안에는 기독교 신앙이 오랫동안 고통 받았던 신정론이라는 신학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올바르신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 세상에 수없이 생겨나는 고통과 아픔, 고난의 역사에 왜 하나님이 방치하시고 침묵하시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이 고난을 정말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다만 이 영화를 보면서 아쉬운 것은 기독교 신앙이 갖고 있는 십자가 복음의 값 비싼 은혜를 너무 값싼 용서로 쉽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용서하시고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아들을 안타까워 통곡하시며 눈물 흘리시는 위대한 복음의 역사를 단순히 한 여인의 저항과 분노의 눈물만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독교인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불편해 하는 것입니다. 여인은 분노의 눈물을 흘리지만 그 눈물은 여인을 치유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흘리는 눈물은 굉장한 것입니다. 인간의 눈물이 또 다른 영향을 끼친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지난 해 한국을 방문했던 하인즈 워드(Hines Ward)라는 미식 축구선수는 한국인 혼혈아였습니다. 그는 작년에 40회 수퍼볼에서 피츠버그 스틸러스가 우승하면서 최우수 선수로 뽑혔습니다. 그런 하인즈 워드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피부색이 검은 사람들과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조그만 동양 여자가 자기에게 와서 ‘내가 어머니란다’ 라고 말 하더군요. 그래서 어머니를 아주 싫어했습니다. 피부색이 다른 어머니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친구들이 나를 혼혈아라고 손가락질 하는 게 싫었어요.”

사춘기 무렵, 아주 힘든 시간을 보낸 그는 작은 사건 하나로 마음이 뒤 흔들렸습니다. 어머니가 늘 중고 자동차를 이끌고 아들을 학교까지 바래다 주었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이들 눈을 피해 얼른 내려 아이들 속으로 총총 사라지기 바빴다. 그러던 어느 날 차에서 내리는데 하필이면 그 차 앞으로 아이들이 무리지어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오, 이런!’나는 얼른 차창 밑으로 숨어 들어가 잠시 애들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에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몇 걸음 가다 우연히 뒤를 돌아봤는데 그때 바로 어머니가 고개를 묻고 흐느끼고 있었다. 참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그렇게도 부끄러워하고 달아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바로 내 어머니라니”

그날 저녁 어머니는 하인즈 워드 앞에서 통곡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를 떠나던지, 네가 나를 떠나던지.”
그 순간 그는 자기가 얼마나 잘못했는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절반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그 자리에서 확인합니다. 그때부터 그의 마음이 어머니의 헌신과 사랑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제 선수생활은 어머니의 인생과 비슷해요, 처음에는 마음대로 안 되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면 결국엔 잘 풀려요. 저는 제 어머니에게 포기하지 않는 근성과 끈기, 정직과 신뢰, 희생정신과 성실성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을 배웠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눈물을 보면서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을 받아들이면서 고난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인물로 성장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어머니의 눈물은 한 인간을 바꾸어 놓는 위대한 역사를 가능하게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느헤미야의 눈물은 영적으로 매우 성숙된 눈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 4~5백 년 전 느헤미야의 조국 이스라엘이 파괴당했습니다.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많은 지식인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느헤미야는 그곳에서 적응을 잘 해서 바벨론 왕의 술 관원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로 표현하면 일종의 왕의 호위대장이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자기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생각했고, 예루살렘의 형편이 어떠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유대에서 왔다는 소식을 듣고 물었습니다.
“유대에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느냐? 예루살렘 성은 어떻게 되었느냐?”그때 그는 이런 보고를 듣습니다. “큰 환란이 일어나 예루살렘 성은 무너졌고, 성문들은 다 불타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을 때 느헤미야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가슴에 불같은 고통이 솟아올라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수일동안 금식하면서 울고 슬퍼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눈물을 흘려보지 않으면 우리의 삶에 갈 길을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예수 믿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눈물로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애통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습니다. 그는 엄청난 사명으로 일생의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는 슬퍼해야할 권리가 있습니다. 어려움이 발생할 때 탄식하고 울어야 합니다. 몇 일 동안 우셔도 괜찮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슬픔과 아픔이 사라질 때까지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우리는 종종 자꾸만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억제합니다. 그러나 눈물은 우리를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학자들은 인간의 눈물은 눈물샘에서 분비되는 약한 알칼리성 액체라고 말합니다. 눈물의 성분은 98.5%의 수분과 아주 소량의 단백질과 염화나트륨과 염화칼륨입니다. 우리 눈 속에 눈물이 흐르면 각막에 영양소와 산소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항균작용도 합니다. 눈에 눈물이 흐르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눈물 없이는 하루도 눈을 뜨고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아름답고 찬란한 것들을 볼 수 있게 하는 것 그 축복은 눈물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을 보고, 사랑하는 남편의 얼굴을 보고, 사랑하는 자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매일매일 흘리는 이 눈물 때문이다”

눈물은 감정에 강력한 동기와 충동을 받으면 다량으로 쏟아집니다. 이렇게 눈물이 쏟아질 때 우리 몸에 쌓인 해로운 물질이 배출됩니다. 눈물은 몸의 육체적인 배설물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노폐물, 영적인 노폐물, 감정적인 노폐물까지도 모두 몸 밖으로 배출시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눈물 치료법’이라는 것도 개발되고 있습니다. 눈물의 효용성을 아는 의사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슬플 때 제때 울지 못하면 우리 몸에 다른 장기가 대신 운다.”
슬플 때는 그냥 우셔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다른 장기가 대신 울고 고통 받습니다. 눈물의 소중함을 알고 노래한 정호승 시인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시의 한 부분입니다.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이 없으면 사랑이 어디 있는가
 
마음이 슬플 때 너무 참지 말고 그냥 울도록 나 자신도 내버려두고, 남도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너무 억제하지 말고, 속에 있는 것들을 다 쏟아놓으며 통곡해야 합니다. ‘밀양’이라는 영화 속에 나타나는 여인은 아들이 유괴범에게 죽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울 시간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시어머니가 와서 아들이 죽었는데 울지도 않느냐고 말합니다. 여인은 아들을 잃은 순간 울지 않고, 범인을 용서할 수 없는 자리에 가서야 너무나 분하고 원통해서 울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때는 울기에 너무 늦은 때였습니다. 마음이 슬플 때 눈물을 흘려야 하는데 분노로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그의 모든 정신세계와 영적인 세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도 마음에 상처가 나면 어떤 사람은 너무 빨리 치료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있어도 마음속에 슬픔이 생기면 그냥 우셔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 상처가 있으면 그냥 토해 내야 합니다. 내 속에 아픔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 모든 눈물을 흘리면서 통곡하셔도 괜찮습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서둘러 치유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슬픔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인간에게는 아픔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인간에게는 통곡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인간에게는 쏟아놓을 시간이 필요합니다.
 
슬픈 눈물을 흘리는 시간이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마음속에 미움과 분노를 계속 갖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한이 풀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마음속에 맺혀진 것이 사라져야 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려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태복음 5:4)
 
눈물을 쏟아내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눈물을 쏟아내야 치유가 됩니다. 그러나 그냥 우는 것만으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은 울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치유됩니다.
 
느헤미야는 눈물로 통곡하고 금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의 가슴에 뜨거운 눈물을 흘린 것은 바로 지금까지 쌓였던 모든 슬픔으로부터 탈출하는 자리입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미움과 분노와 한 맺힘으로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자리가 바로 눈물과 함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신앙인들은 모두 눈물의 골짜기를 건너온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왔던 경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눈물의 골짜기 속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하나님만이 주시는 평화와 은혜의 역사를 경험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눈물의 골짜기를 넘어간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편 30:5)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편 30:11)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리다.”(시편 126:5-6)
 
느헤미야가 통곡 속에서 기도할 때 자신의 죄악과 민족의 죄악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우상 숭배했던 자기 민족의 엄청난 죄악을 보면서 통곡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금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고통과 고난의 현장에서 아파하는 자기 민족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시는 소명을 깨닫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처럼 “내가 누구를 보낼꼬?”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하는 심정으로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조국의 재건 역사에 참여합니다.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동시에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모된 것입니다.
진정으로 울 수 있는 사람, 통곡하면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까지의 환경에 연연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사실에 연연하지 않는 더 이상 외롭지 않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시대에 눈물이 메마르고 있습니다.
눈물이 없어진 부모들이 자녀를 버리고 있습니다.
눈물이 없어진 정치적 지도자들이 애국을 외치고 있습니다.
눈물이 없어진 교회, 눈물이 없어진 목사,
눈물이 없어진 성도는 재앙입니다.
 
주님은 애통하는 자들이 참된 위로를 받고, 하나님의 사명과 소명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여러분이 갖고 계신 아픔들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다 토해내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6월은 자기의 생명과 목숨을 걸고 이 나라와 민족을 지킨 우리 선열들을 생각하는 소중한 달입니다. 그들의 눈물, 그들의 헌신, 그들의 생명이 다 쏟아졌기에 지금 우리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물을 통해서 변화되고 새 생명이 나타나는 역사가 충만해지기를 원합니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들은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사람이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에 주님 앞에 왔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던 고통과 애통이 전체인 줄 알고 탄식하며 힘들어 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제 주님 앞에 다 내려놓고 통곡하게 하시고, 애통하며 눈물 흘리게 하옵소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게 하셔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말씀을 듣고 회복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다시 하나님이 쓰실만한 인물로 세워 주옵소서.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생명을 내놓은 우리의 선열들을 생각하면서 감사드립니다. 그 가족들을 지켜주시고, 우리 백성이 함께 복 받는 귀한 축복을 나누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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