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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칼빈의 5대교리(4) :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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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어떤 똘똘한 아이가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처음 들어본 신기한 표현이라 한 번 써먹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뜻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들었기 때문에 어느 날 밥상 앞에 앉아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밥 먹을 때는 개다.” 칼빈주의 5대 교리도 그 뜻을 충분히 생각하지 않으면 오히려 어설프게 잘못 말할 수 있습니다. 설교문과 참고자료들을 여러 번 읽어보면서 확실히 소화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태신자인 어떤 쌍둥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먼 나라에 이민을 와서 축산업과 농업에 종사하시는 신앙 좋은 부모의 양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하루는 복음 전도자의 설교를 함께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동생은 진리의 말씀에 감격하여 하나님을 영접하고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형은 허무맹랑한 소리로 여겨 오히려 부모님이 믿는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현대식으로 꾸며본 내용입니다. 왜 똑같은 환경과 조건에서 그들은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을까요? 왜 동일한 조건에서 동일한 설교를 듣고서도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반면에 다른 사람은 오히려 더 싫어하게 될까요?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인 대답이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입니다.

‘은혜’란 값없이 주는 선물입니다. 은혜는 아무런 대가 없이 거저 주어집니다. 은혜는 내가 노력해서 얻을 수 없는 무엇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에 거지 한 사람이 큰 부잣집 앞에서 자다가 얼어서 심장과 호흡이 멎었습니다. 집 주인이 그를 발견하고는 급히 인공호흡과 심장 소생술을 시행해서 겨우 다시 살렸습니다. 주인은 그에게 따뜻한 방을 내어주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히고 음식을 대접하며 정성껏 치료했습니다. 그런데 회복된 거지는 그 집에 눌러 살면서 날마다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주인에게 욕하고 때리고 창문을 깨뜨리고 이불에 불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주인은 그가 거지 삶의 살면서 받은 정신적 충격과 고통을 이해하고 모두 참아주었습니다. 하루는 주인집 외아들이 성탄 선물을 주었는데, 거지는 오히려 화를 내며 아들을 잔인하게 죽여 버렸습니다. 동네 사람들 모두가 저런 거지는 사형시켜야 한다고 난리였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고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온전한 새사람으로 회복되기까지 변함없이 치료해주고 끝까지 보살펴주다가 마침내 막대한 재산까지 모두 물려주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면 불가항력이란 무슨 뜻입니까? 국어사전에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힘’이라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고자 하시면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시면 반드시 그 뜻을 이루십니다. 인간이 어떻게 반응할지라도 하나님의 계획이나 뜻을 실패하게 하거나 무효로 만들지 못합니다. 그래서 불가항력입니다.

불가항력이라는 단어 자체는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감당이 불감당이다’라고 말하면, 도저히 고집을 꺾을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을 뜻합니다. 그래서 불가항력이라는 말도 고집불통을 연상하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는 뜻은 내가 하기 싫은데 강제로, 억지로, 마구잡이로 밀어붙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고집이 불가항력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항력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가로막혀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못하게 되거나 싫어하는 일을 강제적으로 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과 저것을 상황을 따져보지만 결국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때로는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 같을 때도 있지만, 그 순간조차도 그것을 하지 않을 때 생기는 결과가 더 싫거나, 그것보다 더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 합니다. 그런데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에 있는 자연인은 언제나 자기 원하는 대로 하지만 언제나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일을 행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는 마치 알콜 중독자가 참으로 원해서 술을 마시지만 결국 몸을 망치는 것과 같습니다. 죄인도 자기가 원해서 죄를 짓습니다. 그는 죄의 낙을 참으로 즐거워하며 죄를 그리워합니다. 죄를 사랑하고 죄를 소망합니다. 죄가 행복을 준다고 믿습니다. 결코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죄인은 오히려 하나님을 조롱하며 모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그의 본성이 변합니다. 그는 죄 대신에 의로움을 사랑합니다. 죄로 인해 마음 아파하고 하나님 앞에 정결한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좋아지고, 예수님을 위해 살고 싶어 합니다. 비록 지금은 죄를 벗하며 살 지라도 그 마음은 주님 곁에 함께 있습니다. 연약함으로 인해 또 다시 죄에 빠져도 몸까지도 거룩하게 변화되어 영원히 주님과 함께 거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을 찾으며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을 갈망합니다. 주님 다시 오실 그 날을 고대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습니까? 이런 일이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은혜는 거지에게 베푼 주인의 은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지금의 성도도 이전에는 하나님을 조롱하고 예수님을 무시하고 성령님을 대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을 베푸심으로 성도가 된 후에도 실상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인내하심을 너무 많이 무시하며 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죄의 낙을 즐기기 위해서 살 때가 많고, 썩어질 양식을 위해서 일하느라 그를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을 짓밟을 때 또한 많습니다(요 6:27). 중생 이후의 삶만 헤아려보아도 상 받을 일보다는 형벌 받아야 될 일들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양자 삼으신 후에 결코 그를 포기하시지도 않고 버리시지도 않습니다. 그 어느 것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사랑에서 끊어내지 못합니다(롬 8:35-37). 끝내 그를 의롭게 변화시키시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은혜는 이처럼 불가항력적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한치 앞도 모르기 때문에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생기면 계획을 변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일을 정하신 분입니다. 그분께서 정하지 않은 어떤 일이 갑자기 발생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깜짝 놀랄 뉴스가 있지만, 하나님께서도 모르시는 깜짝 놀랄 뉴스는 전혀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경악할 만한 죄를 저질러도 하나님께서 ‘네가 그럴 줄 몰랐다’고 하실 일은 없다는 뜻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자에게는 불가항력으로 그 뜻이 이루어집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가 유효하기 때문에 불가항력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가능성만 제공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주님의 보혈은 죄를 사하는 문만 열어놓으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죄를 사했습니다. 그분은 성도의 죄를 대속해 주실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실제로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자에게는 불가항력으로 그분의 죽으심의 효력이 나타납니다.

셋째로 성령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뜻을 반드시 성취하시기 때문에 불가항력입니다. 짧게 보면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반항도 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주께서 위하여 죽으신 자에게 역사하십니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어 놓으심이 불가항력입니다.

넷째로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이기 때문에 불가항력입니다. 인간은 구원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전혀 협력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반항할 수조차도 없습니다.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아니고서는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 구원 사건이 발생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6:37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는 다 예수님을 의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쫒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으로 예정된 자 중에 한 사람이라도 제외하시지 않고 다 영접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44).

만약 하나님의 은혜가 가항력적인 것이었다면, 만약 저항할 수 있고 거절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언제든지 다시 반항하면서 주신 은혜를 거절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의 구원은 죽을 때까지 불안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이라는 사실 자체가 또 다시 은혜입니다.

저 사람이 변할까라는 의구심이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소망이 생기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무지 내 힘으로는 감당이 불감당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그 사람도 변합니다. 마니교라는 이단에 심취했던 어거스틴도 변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희한하게도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를 사용하셔서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펼쳐진 성경을 읽게 하셨고 마침내 그 순간에 탕자인 그를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면 사람을 살인하고 인육을 먹었던 흉악한 사람도 예수님의 양으로 변합니다. 숨넘어가기 직전에 고집을 꺾고 예수님을 영접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불가항력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변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저도 변하고 여러분도 변할 수 있습니다. 한량없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영광을 온전히 돌려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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