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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악의 상황에서 (시 4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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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살면서 만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들

살다보면 뜻하지 않은 위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1999년 11월 미국에서 발간된 후,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과 각종 언론이 정한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인 『최악의 상황에서 살아남는 법(The Worst-Case Scenario Survival Handbook)』이라는 책이 그와 같은 경우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 열쇠를 잃어버려 열쇠 없이 시동을 걸어야 할 때,
물에 가라앉고 있는 자동차 안에 갇혔을 때 탈출해야 할 때,
독사에게 물렸을 때 응급처치법,
지금 달려드는 상어나 악어의 공격을 피하려면,
상대방이 날리는 주먹을 막으려면,
다리나 절벽에서 강으로 뛰어내리고나, 높은 빌딩에서 뛰어내려야 할 때,
달리는 자동차에서 뛰어내리려면, 혹은 달리는 오토바이에서 자동차로 옮겨 타려면,
택시에서 출산하게 된다면,
바다에서 표류하게 되었을 때,
사막에서 길을 잃는다면,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렸는데 그 낙하산이 펴지지 않으면, … 등의 경우입니다. 이런 일들이 여러분에게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요, 여러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사건들만이 아닙니다. <낫싱 투 루즈>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유명 광고회사의 잘 나가는 중역인 주인공이 어느 날 거래처와의 저녁 약속이 취소되어 모처럼 아내와 오붓한 시간을 갖기 위해 일찍 퇴근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자기 집에서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고, 더구나 그 상대가 바로 자신의 직장의 상사였습니다. 배신감과 허탈감에 넋이 나간 주인공은 무작정 차를 몰고 집을 나섰는데, 주인공의 차에 느닷없이 강도가 올라타서는 그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돈을 요구합니다. 이 영화의 제목처럼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상황”,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 아닙니까?

언젠가 어느 TV 드라마를 보니까, 암으로 죽어가는 한 부인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임종을 앞두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데, 남편이 그만 자동차 사고로 죽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뒤에 남겨질 세 아이는 어디 맡길 데가 없습니다.

『좋은 생각』이라는 잡지에 소개된 하나의 ‘최악의 상황’은, 명예퇴직한 남편이 사업을 하다가 사기를 당하고 부도가 났는데, 남편이 이것을 견디지 못하고 가출하여 행방불명이 됩니다. 수중에 동전 한 푼 없이 기름이 떨어진 냉방에서 굶고 있는 상황을 견디지 못한 부인 역시 자살을 결심합니다.

이상과 같은 최악의 상황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최악의 상황을 어떻게 하면 이겨낼 수 있을까요?

2. 성경이 말하는 최악의 상황은?

1) 시인의 상황

오늘 본문을 지은 사람은 고라 집안의 한 사람입니다. ‘고라’는 과거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나올 때, 모세와 아론에게 도전하여 반역을 일으켰던 사람인데, 사실 그 일은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정말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습니다(민 16). 이것은 그 사람이나 그의 가문으로 볼 때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조상이 이렇게 부끄러운 과거를 가졌다는 것은 그 후손들에게 ‘을사오적‘의 후손처럼 얼굴을 들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부끄러운 과거가 있었지만, 고라의 후손들은 다윗의 시대에 이르러 가장 유명한 지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전문 종교집단인 레위인으로서의 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순종하는 일에 누구보다도 앞장을 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에 세우셔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을 지지하고 수호하는 일에 가장 헌신적으로 앞장섰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위기를 당했을 때, 칼과 상관없는 종교인이었지만, 칼을 들고 다윗을 보호하여 그의 왕위를 지켰습니다(대상 12:6). 즉 그들은 레위인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성전 봉사에만 전념해야할 사람들이었지만, 필요한 경우에는 칼을 들고 왕을 보호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헌신적으로 살았지만 그들에게도 최악의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을 지은 사람은 다윗이 <왕자의 난>, 즉 압살롬의 반란으로 도피를 할 때, 그를 따라갔던 사람입니다. 압살롬이 반란을 치밀하게 준비했고 또 거사를 거의 완벽하게 해냈기 때문에, 다윗이 예루살렘 궁을 빠져나오자 사람들은 전부 다 ‘모든 것은 끝이 났다’, ‘하나님도 다윗을 버리셨다’, ‘다윗은 다시 회복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을 지지하여 그의 피난길에 따라 나선 시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도 다윗과 모든 것을 같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이 왕위에 복권될 수 없는 것처럼, 이 사람도 다시 예루살렘으로 성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며, 그의 가정이 회복될 수 없을 것이고, 자녀들이나 가족들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단계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전에 그는 예루살렘과 성소에서 하나님과 함께 안전하게 있었으나, 지금 그는 악인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의 대적들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놀려댔습니다. ‘다윗은 지는 해이고, 그 아들 압살롬은 떠오르는 해인데, 왜 지는 해를 잡아서는 다윗과 함께 사서 고생을 하냐’고 놀려대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이 괴로워하고 있는 것은 아직 성전이 지어지기 전이지만, 성막에서 성대한 예배가 드려질 때에 그것을 섬기면서 찬양으로 예배를 봉사하던 찬양대 지휘자로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를 짓고 거기에 곡을 붙였으며, 그것을 직접 지휘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던 그가, 그것을 천직으로 알았을 뿐 아니라, 그 일이 기쁨이고 행복이었던 그가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괴로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인이 괴로워하는 또 다른 이유는 전에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드리기를 즐기는 무리들과 함께 동행하면서 그들과 기쁘게 찬양하면서,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했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일을 떠올리면서 무척이나 마음이 상했습니다. ‘마음이 상한다’는 것은 마치 음식물이나 피를 토하듯 마음에 있는 모든 내용물을 다 쏟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즉 시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는 것을 즐기는 무리들과 함께 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면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 예배드리지 못하는 것이 한없이 슬펐습니다. 경건한 무리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그를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시인을 괴롭게 만드는 또 다른 상황이 있었습니다. 시인은 지금 원수들의 추적을 받고 있었으며, 가는 곳마다 감시자들의 눈이 번떡이고 있었습니다. 늘 감시를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다윗이 자기 아들에게 쫓겨서 피난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온 종일토록, 즉 가는 곳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님이 그를 버렸다고 비난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다윗을 버리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 즉 하나님은 이제 다윗을 포기했고, 다윗을 따라나선 사람들 역시 다윗처럼 하나님이 버린 사람들, 하나님이 포기한 사람들이라고 단정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상황은 이러한 비난이 옳은 것처럼 보여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가망성도, 어떤 소망도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이러한 상황도 최악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괴롭고 힘들고 배고픈 도망자 신세, 대적들이 언제 들이닥쳐 자신을 죽일지 모르는 상황, 주변 모든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 그리고 소망의 빛이라는 단 한 줄기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황도 시인에게는 최악의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시인이 최악의 상황이라고 생각한 것은 어떤 경우일까요?

2) 시인이 최악의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것

1, 2절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남 앞에 뵈올꼬!”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그가 최악이라고 생각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문 종교인인 그가 성전을 떠나 있으며, 예배를 드리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의 왕인 다윗이 다시는 복권될 수 없는 길로 가고 있으며, 이제는 회복에 대한 소망을 완전히 버려야 할 상황, 이런 것들보다 더 고통스러워하고, 견디기 힘든 것은 하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신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체험하여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인생 최고의 즐거움임을 아는 성도라면, 만약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당하는 그 어떤 어려움이나 역경도 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성도라면, 여러분들도 여기에 동의하실 것입니다.

시인의 최대의 위기, 그가 만난 최악의 상황은 고통의 때에, 하나님마저 침묵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등을 돌리는 상황,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의지할 데라고는 하나도 없는 상황, 모든 일들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그것은 쉽고 간단하게 역전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최악의 상황에, 하나님마저 침묵하시니, 이것은 정말 끝이었습니다.

성도는 모든 것이 다 없어지고 사라져도 하나님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최후의 순간, 오직 하나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최후의 보루인 하나님, 모든 것의 뿌리요 근거인 하나님, 시작점이 되고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그 모습과 그 흔적이 전혀 보이지도 않는 상황, 불러도 불러도 외치고 또 외쳐도 도무지 응답이 없는 상황, 이것이야말로 성도가 만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입니다.

3) 그 최악의 상황에서 시인이 하는 것

시인은 이러한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했습니다. 그는 정말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았습니다. 마치 사슴이 목이 말라 크게 소리 지르며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이,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았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1).”

이것은 그가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는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갈급하다”는 말은 ‘크게 소리지르며 찾아 헤매는 것’을 뜻합니다. 사슴은 목이 마를 때에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이리 저리 헤맵니다. 어떨 때 사슴은 맨 땅이나 모래밭을 앞발로 정신없이 파기도 하는데요. 그 이유는 그곳을 우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목이 말랐든지 환상이 보였던 것이죠. 그런데 그가 울부짖으면서 물을 찾는 그 순간이 사냥군이나 사나운 맹수에게 잡히기 가장 쉬운 때라고 합니다. 시인은 목숨을 걸고 물을 찾는 사슴처럼, 지금 자신도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찾고 있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간절했든지 눈물로 음식을 삼았습니다. 밤낮없이 음식을 먹지 않고 눈물만 흘리고 있는 상황이었지요.

또 그는 최악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또 다른 노력도 해보았습니다. 자신들의 피난처인 요단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하나님을 기억해내려고 애를 써보았습니다. 자연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껴보려고 한 것이죠. 다윗과 그 일행이 피난한 곳에는 폭포들이 큰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시인은 큰 소리를 내며 흐르는 폭포를 보다가 그 물이 마치 자기 머리 위를 덮치는 불행의 물줄기처럼 느껴졌습니다. 폭포가 으르렁대는 소리를 들으면서 깊고 검푸른 바다의 해일이 일어나 자신과 온 세상을 삼킬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즉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찾으려했던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노력도 해 보았습니다. 사람들의 도움을 구한 것이죠.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못해 칼날처럼 매서웠습니다. 3절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 10절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이 말들은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의 말이었습니다. 그들이 조롱하며 비웃으면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소리는 자기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와도 같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계신다’, ‘하나님은 지금 내 고통과 형편을 아신다’,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구하여 내실 것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내가 잃은 것을 회복시키실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가면서 자신감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 말들이 다른 사람들의 소리가 아니라 그의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가 되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저 같으면 이 정도쯤에서 포기합니다. ‘하나님이고, 신앙이고, 기도고 찬송이고 다 소용없다.’ 어떻게 이렇게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간절히 하나님만 구하는데, 하나님이 침묵하실 수 있습니까?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이키게 해달라는 기도가 첫 번째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누리던 직위 회복도 우선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가정이나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우선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만 확인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면서 그렇게 부르짖었는데 그것마저도 침묵하시니 이제는 포기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이러한 최악의 상황에서도 시인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자신의 처지가 어떠할지라도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보겠다는 것입니다. 웨슬리 L. 듀웰이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시는 동안에 … 침묵 때문에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두운 침묵 때문에 당신이나 하나님이나 상황이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고 하면서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에는 다시 말씀하실 때까지 당신이 그대로 있어 줄 것을 하나님은 기대하신다”고 했습니다. 즉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고, 또 기다리면 반드시 하나님은 응답하시고 구원의 손길을 뻗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시인의 “그 이후”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시인이 그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았더니, 완벽해 보이던 압살롬의 반역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복권되어 다시 왕위에 앉았고, 시인 역시 성전으로 가정으로 자신의 천직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복을 누렸습니다.

3. 최악의 순간에서 우리가 할 일은?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를 처음으로 찾으신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살다보면 최악의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더 이상 나빠질 것이 없는 상황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한 최악의 상황에서 살아남는 법은 무엇일까요? 오늘 성경은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목마른 사슴은 자신이 물을 찾던 중에 맹수나 사냥군에게 잡힐 것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최악의 상황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이 단순해 보입니까? 좀 무식해 보입니까?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믿음의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인내하며 끈기있게 당신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믿음을 여러분에게 요구하시고 바로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찾아 그 사람을 축복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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