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시게 (시 33:10~22)

  • 잡초 잡초
  • 408
  • 0

첨부 1



우리의 구호

엊그제 금요일 저희 교회 교역자 전체와 전도부원, 전도대원 등 31명이 서울에 있는 상도중앙교회를 다녀왔습니다. 우리 교회 건너편에 곧 입주할 SK아파트와 코아루 아파트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도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아파트 전도를 7년 간 연구하고 실행해서 귀한 노하우를 가진 상도중앙교회에 가서 함께 전도 현장에도 나가보고 강의도 들으면서 하루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참 뜻 깊은 시간을 가지고 많은 것을 배워 왔습니다. 특히 상도중앙교회는 저의 모교회이기도 합니다. 제가 다른 교회 교육전도사로 나가면서 모 교회를 떠난 것이 1989년이니까 거의 20년 만에 모 교회를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세월 탓인지 교회 모습이 너무 달라지고 모르는 분들도 많이 있었지만 예전에 함께 교회를 섬겼던 분들이 반겨주시고 저 개인적으로는 참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모 교회를 방문하면서 문득 제가 학생 때, 그리고 청년 때 모 교회를 담임하셨던 목사님 생각이 났습니다. 그분 모습이나 하셨던 일이 떠오른 것이 아니라 그 분이 늘 설교 때마다 기도회 때마다 그토록 강조하던 구호가 생각났던 것입니다. 그 구호란 다름 아닌 “하나님 제일주의! 하나님 우선주의! 하나님 중심주의!”입니다. 목사님이 그토록 이 구호를 강조하고 또 강조했기 때문에 지금도 이 말들이 제 귀에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어렸을 때나 젊었을 때 많이 듣던 말이 평생 남는 법이기 때문에 우리 어린이들이나 청소년 청년들에게 교회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듣게 하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그들이 모 교회에서 듣고 배운 것들이 모 교회를 떠나서 다른 지역에서 다른 교회를 섬기더라도 평생 기억에 분명히 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지금 목회를 하지만 제 마음 속에는 늘 이 말이 분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 하나님 우선주의! 하나님 중심주의!” 그 뿐 아니라 저도 모르게 이 구호가 제 목회의 가장 중요한 방향이 되고 있고, 저는 성도 여러분이 철저하게 하나님 제일주의, 하나님 우선주의, 하나님 중심주의의 신앙생활을 하게 해달라고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시게

오늘 설교제목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시게” 사실 저는 이 설교제목을 정하면서 적지 않게 고민했습니다. 설교제목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시게”라니요. 대체 누가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한다는 말입니까? 혹시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하나님 되실 수 없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고민한 것입니다. 목사는 설교를 하면서 설교제목 하나도 쉽게 정하지 않습니다. 설교제목 하나도 참 중요하기 때문에 때로는 제목 하나를 놓고도 오랜 시간 고민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긴 고민 끝에 이 설교제목을 그대로 쓰기로 했습니다. 제목이 좀 이상하지만 실제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신앙생활을 바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하지 않고, 다른 것들로 내 하나님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말입니다.

‘우상숭배’란 정확히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것, 하나님만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을 내 하나님 되시게 하지 않고 다른 어떤 것이라 해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귀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만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우상숭배’라는 말을 두려워하면서도 정작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하지 않고 다른 어떤 것들로 하나님 삼고 살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하나님 제일주의! 하나님 우선주의! 하나님 중심주의!”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신앙입니다. 명백한 우상숭배입니다. 이런 태도는 우리의 신앙이 자라고 성화되는 것을 가로막게 됩니다.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시편 33:10~22입니다. 본문 중에서 먼저 16절과 17절을 봅니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끊임없이 이런 유혹을 받았습니다. 좀 더 많은 군사를 양성하고, 더 힘센 용사들로 군대를 조직하고, 말들을 더 많이 사들여 강력한 군대를 만들고자 하는 욕심입니다. 세상 어느 왕이 이런 욕심이 없겠습니까? 내가 다스리는 나라가 부국강병을 이루어 대대손손 훌륭한 왕으로 칭송 받고 싶은 유혹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욕심과 계획이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10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여기 나오는 나라와 민족들은 모두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이방 민족들을 뜻합니다. 많은 군사와 군마를 갖추고 강력한 군대를 만들면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력한 나라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모두가 이방나라 임금들의 계획이라는 말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에게도 왕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 까닭은 이웃 나라 블레셋 때문이었습니다. 블레셋 민족은 오랜 세월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못살게 군 철천지원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 싸우기만 했다 하면 백전백패 맥을 못 춥니다. 심지어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면 이겨볼 수 있을까 싶어 메고 나갔다가 블레셋에게 패하고 두 아들도 죽고 언약궤마저 빼앗겼으니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얼마나 증오하며 또 두려워했겠습니까? 한데 “왜 이렇게 우리는 블레셋만 만나면 백전백패 할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블레셋 민족은 강력한 왕의 지도력 아래 군대를 조직하고 좋은 무기를 갖추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우리 이스라엘 민족은 왕도 없고, 군대도 조직되어 있지 않아서 전쟁이 나면 그제야 농사꾼들 모아 곡괭이와 삽 들고 싸우러 나가니 어떻게 블레셋 군대를 이길 수 있겠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에게도 왕을 달라고, 왕만 있으면 블레셋을 속 시원하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모릅니다. 이스라엘은 사사시대에 어떤 경험을 뼈저리게 했습니까? 전쟁은 왕이나 군대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디 왕이 있어서 그 강한 이방민족들을 이겼습니까? 사사들이 어디 군대가 많아 전쟁에서 이겼습니까? 이방민족이 쳐들어오면 그제야 하나님이 농사짓거나 소 몰던 사람을 사사로 불러 백성들을 모아 싸우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겼습니다. 기드온은 3만 2천의 군사를 모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이 숫자도 너무 많다며 그들을 줄이고 줄여 딱 3백 명을 데리고 나가 싸우게 하십니다. 그런데도 미디안의 대군에게 승리합니다. 어디 이 때뿐입니까? 이스라엘은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전쟁을 군대의 숫자나 무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 군대를 도우실 때 승리했고, 반대로 군대의 숫자나 무기를 의지하면 반드시 진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도 어리석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 선지자에게 왕을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왕만 있으면, 그래서 왕이 군대를 잘 조직하고 훈련하기만 한다면 반드시 블레셋에게 이긴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런 생각이 얼마나 이방인적인 것인지를 깨닫게 하고 이런 이방인의 계획과 사상(사고방식)을 무효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말씀이 12절입니다. 중요하므로 함께 읽습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즉 많은 군대와 말을 의지하지 않고, 힘센 용사도 의지하지 않고, 그 어떤 인간적인 힘이나 권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만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그런 백성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들을 ‘기업’으로 삼으시기 때문입니다. ‘기업’(基業)이란 ‘재산’이라는 뜻입니다. 즉 여호와만을 내 하나님으로 섬기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가장 소중한 소유요 재산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집에 도둑이 들어와 물건을 훔치려고 할 때 가만히 앉아 당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경찰을 부르거나 심지어 목숨 걸고 맞서 싸워서라도 도둑을 쫒아내려 합니다. 남의 재산이 아니라 내 소중한 소유요 재산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여호와를 내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만 주인으로 섬기기로 작정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가장 소중한 재산이요 소유가 되어 하나님이 나를 소중히 여기시고 지켜 보호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그 누구도 누릴 수 없는 참된 복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너무 귀한 말씀이므로 12절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이 복이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배를 하나님으로 삼은 자들

이렇게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만을 하나님으로 삼고, 하나님을 진정 내 하나님 되시게 할 때 놀라운 축복과 보호하심이 주어진다고 분명히 약속하는데도 여전히 다른 것들을 하나님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아니라 분명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말입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누군가? 빌립보서 3:19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여기에 어떤 사람들이 나옵니까? 자기 배를 신으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자기 배를 하나님 삼고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배’란 이 배(가리키며)입니다. ‘배’란 ‘자기만족’을 뜻합니다. 즉 모든 삶의 목적과 가치를 오직 자기 배부른 것, 자기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 살아가는 부류들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여호와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배가 하나님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자기 배를 신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신자가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예수 믿고 교회에서 남을 가르치는 교사까지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만 오직 자기의 이익을 위해, 자기만족을 위해 사람들에게 거짓된 가르침을 주던 거짓 교사들입니다. 빌립보서 3:19에서 바울은 이들이 크리스천이긴 하지만 하나님이 아닌 자기 배와 자기만족을 하나님 삼고 살아가는 자들이기에 우상숭배자와 똑같은 자들이므로 결코 구원 받을 수 없으며 그 마침(결국)은 멸망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어떤 배를 내 하나님 삼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돈과 재물이라는 배를, 또 어떤 사람들은 지위나 권력이나 출세라는 배를, 혹은 내 가족과 자녀라는 배만 불리기 위해 그 배를 하나님 삼아 살고 있습니다. 분명히 크리스천이지만 여호와가 아니라 내 배를, 나의 만족을 하나님 삼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족을 위해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해야 하고, 교회가 나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내 마음에 안 들고 내 뜻대로 안 되면 금세 신앙생활에 싫증을 내고 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쉽게 떠나버립니다. 그렇다면 이런 분들은 비록 교회를 다니더라도 하나님 아닌 내 배를 하나님 삼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불상 앞에 절하고 무당과 푸닥거리 하는 사람만 우상숭배자가 아니라 이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우상숭배자라는 것입니다.

흔히 현대를 다원주의 사회라고 부릅니다. ‘개성, 자율성, 다양성, 대중성’을 중시하는 사회라는 뜻입니다. 개인의 생각과 행복 추구권을 지극히 존중해 줍니다. 그러다보니 오늘날 사회에는 너무도 많은 신들이 존재합니다. 개인을 너무 존중해 주다 보니 각자 자신의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모두 신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세상의 많은 것들이 자기를 하나님 삼아 달라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방심하면 이런 것들로 하나님을 대신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시험 받던 주님께 마귀가 돌로 떡덩이를 만들어보라고 유혹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먹을 것만 가지고 시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대신 먹는 것, 의식주와 내 생계와 육신적인 것들을 가장 귀하게 여기도록, 즉 내 배와 자기만족을 하나님 삼도록 유혹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바닥에 부딪치지 않게 받들 것이라는 유혹은 하나님 대신 내가 스타가 되고,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 받으라는 유혹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만이 영광 받으셔야 하는 곳에서 내가 스타가 되라는 이 유혹은 오늘날도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 받으려는 유혹으로 나타납니다. 세 번째 마귀는 자신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천하만국과 그 영광 모두를 주겠다고 유혹하는데, 단순히 마귀가 “나에게 절하면”이라고 말하지 않고 분명히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경배하다’란 ‘예배하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 대신 마귀를 섬기고 예배하면 천하만국의 모든 영광을 주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대신 내 배가 하나님 되라는 첫 번째 유혹과, 나 자신이 하나님 되라는 두 번째 유혹은 결국 하나님 대신 마귀를 섬기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가치관이 혼란스러운 때 더욱 철저히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고 그 분만이 내 하나님 되시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신앙의 순결을 지킬 수 있고 이런 사람만이 하나님께 참된 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지난 4월에 예배를 모두 마친 후 헤어지기 전에 우리는 이런 파송의 찬송을 불렀습니다.

  ♫주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주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

그런데 이 후렴보다 앞에 나오는 가사가 더 중요합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무슨 뜻입니까?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 분만을 내 주인으로, 내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주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주님만큼 사랑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결코 참될 수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하나님은 두 분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섬김과 사랑의 대상은 결코 둘일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이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얻은 금쪽같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신 것도, 그래서 순종하여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한 아브라함에게 “네가 네 아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씀하신 것도 아브라함에게 재물도 아들도 그 누구도 하나님을 대신 할 수 없다는 믿음이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내 마음을 가장 강하게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가장 애착을 갖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늘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만 하나님 되시게 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것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하나님만 받으셔야 할 영광과 내 사랑을 받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은 내가 별로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없어도 별로 아쉽지 않은 그런 것들로 나를 시험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고 집착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아시고 바로 그것으로 나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1924년 파리올림픽 육상 400m에 출전한 에릭 리델은 예선에서 최고 기록을 세워 결승에서 금메달 획득이 유력했습니다. 그런데 대망의 결승전이 주일에 열리기로 결정됐습니다. 그러자 리델은 주저 없이 출전을 포기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주일성수의 원칙을 지키며 살아왔다.”는 말을 남기고 말입니다. 리델은 후에 중국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최근 독실한 크리스천인 여류 국수 조혜연 6단도 “주일에는 예배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신념을 깨지 않겠다.”며 바둑대회 출전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운동선수는 금메달이요 국수는 바둑대회 우승인데 이들은 신앙의 원칙 때문에 이것을 포기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신앙의 원칙이 있습니까? “하나님 제일주의! 하나님 우선주의! 하나님 중심주의!”의 원칙 말입니다. 나에게는 무엇이 가장 소중합니까? 하나님을 위해 이 소중한 것들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만을 진실하게 섬기는 것을 알고 기뻐하시며, 내가 포기한 것들을 더 귀한 것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