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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노아 (창 6: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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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노아에 대하여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서 시작한 인류는 노아의 시대에 이르러서 크게 번성하였습니다. 인류가 번성한 것은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인간들이 시조 아담의 범죄로 낙원에서 쫓겨나서 땀 흘려 수고하는 삶을 살게 되었지만 인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변함이 없었음을 보여 줍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아담의 첫 아들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죽인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아벨 대신 셋이라는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인류는 셋의 후예와 가인의 후예로 크게 나뉘었습니다. 전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족속을, 후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타락한 족속을 말합니다. 이 두 족속은 오랜 세월 동안 교류가 없이 떨어져서 살아왔는데, 노아 시대에 이르러 두 족속이 급속도로 가까워졌습니다.

창세기 6장 1절과 2절 말씀이 이 사실을 언급합니다. “1)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기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셋의 족속을 말하고, “사람의 딸들”은 가인 족속을 말합니다. 타락한 가인 족속과 상종하지 않고 경건성을 지켜왔던 셋 자손들이 혼인을 통해서 섞이게 되었고 그 결과 경건한 자들마저 겉잡을 수 없이 세속화되어 갔습니다. 그리하여 노아 시대에 와서는 경건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6장을 보면, 당시 인간들의 타락한 실상을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3) 하였는가 하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5-6)고 했습니다. 창조 당시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기뻐하셨던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동일한 사람으로 인해 탄식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더 이상 손쓸 수 없으리만치 타락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지으신 인간들을 멸하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그러나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장에 인류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120년의 유예기간을 두셨습니다.

한편, 온 세상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그 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노아였습니다. 창세기 6장 8절에 보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9절에는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까닭에 대하여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노아는 에녹과 같이 의인이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지면에서 쓸어버리시는 가운데서 노아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노아에게 거대한 방주를 지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창세기 6장 22절에 보니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온 세상을 멸하였던 홍수 심판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이 구출을 받았고, 노아로 말미암아 인류가 새로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첫 번째로,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것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노아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대신, 감각적인 쾌락을 위해서만 살았습니다. 그들은 영혼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고 온통 세상에 속한 것만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육체가 되었다’는 말씀은 당시 사람들의 수준이 얼마나 저급했는가를 보여줍니다.

성경은 믿는 자들에게 육신대로 살지 말고 성령을 따라 살라고 권면합니다. “1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은 하나님의 영과 같은 말로서 성령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그 속에 성령을 모신 사람입니다. 성령을 모신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사람이 다른 피조물들보다 존귀한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다면 존귀한 존재로 대접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온 인류를 지면에서 쓸어버리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라는 말이 있습니다.

외모가 잘 생겼다고 해서 또는 돈이 많고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해서 존경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다워야 존경을 받습니다. 우리는 힘이 있다고 약한 자들을 괴롭히고 착취하는 자를 보고 ‘저 사람은 인간 이하’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창조주 하나님을 망각하고 제 잘난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육체에 불과합니다. 사람이 사람다우려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 영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됩니다. 거듭난 사람이라야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의롭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창세기 6장 9절에 보니 “노아는 의인이요” 라고 했습니다. 이는 노아는 전혀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창세기 9장에 보면,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고 잠드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는 노아와 같은 사람도 허물과 실수가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면 노아를 의인이라고 한 근거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노아가 믿음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신구약 성경이 일관되게 말씀하는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사람들입니다. 노아는 불신앙의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에녹처럼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었습니다(히 11:6).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전도서 12장 13절에 보니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 이사야 선지자는 탄식하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2)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사 1:) 그러므로 사람이 짓는 죄 중에서 가장 큰 죄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죄입니다. 제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할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면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노아 시대와 같이 오늘날 우리는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바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라고 권면하면 너무 바쁘기 때문에 믿을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저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기독교인 가운데도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일이 바빠서 주일성수를 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주일에 엿새 동안은 우리의 일을 하고 나머지 하루는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안식을 취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엿새 일하고 하루 쉬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창조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성수를 통해서 영혼 뿐 아니라 몸의 건강도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녀들에게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성도님들의 자녀들이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것인데, 주일에도 교회에 보내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고 학원에 공부하러 보내는 것은 큰 잘못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을 보세요.

창세기 6장 4절에 보니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셋의 자손들이 가인의 자손들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았더니 다 용사요 유명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어도 얼마든지 성공하고 잘되더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사가 되고 유명한 사람이 되었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고 멸망하였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려서부터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면 하나님께서 노아와 함께 하셨듯이 그들의 일평생을 함께 하시면서 바른 길로 평강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도 노아처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니, 노아 당시 사람들의 실상에 대하여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였고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었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도를 무시하고 저마다 제 소견에 좋은 대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제 마음에 좋은 대로 행동하면 그 결과는 비극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생각이 항상 악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은 항상 악한 생각만 하는 것은 아니고 선한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그 선한 생각이 계속 선한 생각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악한 경향으로 기울고 만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선을 행하려는 인간의 결심은 종종 작심삼일로 끝나는데 이는 인간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을 만치 죄에 깊이 감염된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9절에 보니,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성도로서 구별된 생활을 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떠나서 세속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아마  노아는 사람들에게서 많은 배척과 수모를 겪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믿는 자들이 반성해야 할 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핍박을 너무 겁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하나님과 동행하기 어렵습니다. 믿지 않는 가족이나 동료가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해하고 도와줄 것을 기대하면 오산입니다. 저들은 할 수 있는 대로 트집을 잡아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려고 하지 변함없는 후원자가 되지 못합니다.

성도들이 불신자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 신앙생활의 자유를 양보하기 시작하면 저들은 우리의 신앙이 파선할 때까지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양보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핍박을 각오해야 합니다. 다른 것은 다 양보할지라도 신앙을 양보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하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힘써야지,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한번은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을 전하는 일로 붙잡혀서 공회로 끌려갔습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의 권력자들이 두 사도를 협박하면서 “이 후에는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행 4:19-20).

간혹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일가친척이나 동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면 어쩌나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마는 그것은 괜한 걱정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시는데 외로울 리가 만무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노아와 동행하시면서 120년 동안 방주를 지을 수 있도록 사람들의 방해와 위협으로부터 지켜주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자신이 계획한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편 118편을 지은 성도는 이 같이 말했습니다. “6)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7)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8)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9)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은 그런 걱정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노아는 홍수로 세상이 멸망할 것을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근래에 어느 재벌 회장이 술집에서 그의 아들을 폭행한 종업원들을 응징하기 위해서 조직폭력배들과 동행했다가 큰 망신을 당했습니다. 불의한 자와 동행하면 결국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성도들이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마귀의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가 노리는 대상은 불신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권면하기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 5:8-9)고 했습니다. 그런즉 우리도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노아처럼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 마귀와 세상을 이겨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증언합니다. 어떻게 이 같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노아가 방주를 지은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이 같이 명하셨습니다.

“13)…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14)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15)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16)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찌니라 17)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18)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19)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 수 한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20)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21)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

그리고 22절에 보니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인정받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이 믿음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저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신 것을 인정하는 것을 믿음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믿음의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믿음의 전부는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일 뿐 아니라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에 대하여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고 하였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고 하였습니다.

귀신들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나 귀신들은 그 같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귀신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항상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마귀와 귀신들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세력입니다. 구원 받는 믿음이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실생활 가운데서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는 것은 죽은 믿음으로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한편,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면 반드시 감수해야 할 어려움이 있습니다. 노아를 보십시오. 대홍수 이전에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았고 이슬과 안개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지구의 대기권 바깥을 감싸는 물보가 있어서 태양빛이 직접적으로 지구에 이르지 않았으므로 기후가 항상 온화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홍수를 대비하여 거대한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으니 납득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노아가 120년에 걸쳐서 큰 배를 짓는 것을 보고는 바보짓을 한다고 비웃었을 것입니다. 미친 사람 취급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런 방해에 동요하지 않고 묵묵히 방주를 지었습니다. 현대와 같이 기중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전기톱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사람 손으로 나무를 베어내고 옮겨다가 배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그 수고가 얼마나 컸을까요?

그런 점에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노아를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약한 상태를 벗어던지고 영적으로 더 강해져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비난에 너무나 민감하게 반응하다보니 소신 있게 믿음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노아처럼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칭찬만 들으려고 하면 바로 믿지 못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적대하던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보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게 지폈다고 하였는가 하면, 예수님의 친속들조차 예수님을  미쳤다고 했습니다.

오순절 성령 충만 받은 사도들이 나가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더니 사람들이 하는 말이 “저들이 대낮부터 새 술에 취했다”고 빈정댔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미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총독 베스도는 바울이 재판정에서 자신을 변호해야 할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을 보고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했습니다(행 26:24).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예수님에게 미쳤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예수에게 미쳤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성도들이 도덕적인 비난을 받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적으로 올발라야 합니다. 법과 질서와 도덕과 양심을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비난을 받는 것은 도덕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만일 저들과 어울려서 세속적인 생활을 한다면 저들이 우리를 반기고 친구로서 받아줄 것이나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노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나의 생각과 내 경험으로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순종해야 합니다. “8)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서 망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서 흥한 사람들에 대한 증언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도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37)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노아의 때와 비교해 볼 때 더 했으면 더했지 낫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그만큼 주님의 강림이 가깝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으나 앞으로는 불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님들께서는 이 시대를 본받지 마시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 궁극적인 구원에 참여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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