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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그리스도의 일군 (고전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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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그리스도의 일군(고린도전서 4:1-5절)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사람은 모두가 자신에 대하여 올바른 평가와 인정을 받기를 원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업적이나 노력이보다 더 인정을 받게 되면 감격해 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가 된다면 대부분 실망을 하거나 그 일에 관심이 멀어지게 마련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누군가로부터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누군가로부터 모함을 받거나 욕을 먹거나 인정을 받지 못할 때 이 역시 얼마나 큰 고통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나 칭찬 받기를 기대하고 삽니다. 자신의 수고와 업적에 대하여 인정을 받기를 원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기 위해서 땀을 흘리며 힘을 일을 감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일하고 땀을 흘리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생계의 유지를 위해서 자신의 수고와 노력과 헌신에 대해 보람을 느끼기 위해서 또한 자기의 업적을 위해서 이런 저런 일에 열심을 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일한 수고에 대해서 칭찬과 인정이 없을 때 아주 속상해하고 낙심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교회 안에서도 많이 보여집니다.

여러분이 교회 일을 할 때 제일 속상한 경우가 언제입니까? 실컷 땀을 흘리며 수고하고 노력해서 뭔가를 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트집을 잡고 인정을 안 해줄 때입니다. 그때는 정말 일하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 버리는 경험을 다 해보셨을 것입니다. 반대로 잘한다고 칭찬해주면서 "역시 우리 교회는 집사님이 필요합니다. 장로님, 권사님이 계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라고 인정해 줄 때 그 기분은 하늘을 나는 것 같으며 계속해서 내 돈과 내 노력을 쏟아 부으면서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제가 해보니가 그렇더라고요.

인정을 안 해주면 일을 안하고, 인정을 해주면 일을 열심히 한다면 그것은 과연 누구 때문에 일하는 것이고 누구를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까? 모두가 자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까? 신자가 뭔가를 한다면 그것은 모두 주님 때문에 스스로 자원해서 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자원해서 하는 일이라면 사람이 그 일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를 하든 그것은 관계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살기보다는 사람을 보고 사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느냐가 관심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 일을 가지고 뭐라고 할 것인가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하는 사람으로서 버리기 힘든 유혹 가운데 하나가 설교를 잘해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소위 인기 있는 설교를 해보려고 합니다. 설교자로서 자기가 한 설교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것은 영화배우가 자신이 출연한 영화가 인기 있는 것만큼이나 기분 좋은 일입니다. 이 유혹에 빠져있을 때는 자연히 사람을 보고 설교를 하게 됩니다. 목적이 설교를 잘한다는 인정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인기에 손상이 갈 수 있는 말은 삼가 하게 됩니다. 이러한 설교자의 심정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저도 한 때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기 있는 설교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주신 사명을 바로 감당했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성도여러분에게 인정을 받는 설교를 하려고 하기보다는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평가받을 때를 염두에 두고 설교를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설교를 하고자 하니까 설교에 대한 여러분의 반응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을 제대로 했는지에 대한 사명 점검이 먼저 일어나게 됩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의 일꾼은 올바른 신앙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무슨 일을 해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해야 합니다.

본문 3~4절에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였을 때 그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고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신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고 최선을 다했다면 사람들이 그 결과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하거나 심지어 욕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판단을 받는 것이 때로는 참으로 힘들겠지만 신자가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자연히 사람의 반응을 초월하여 믿음으로 사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만 바라보고 일한다는 것이 사람들은 아예 무시해 버리고 자기 생각대로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는 무엇을 해도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를 위해서 하는 일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체의 유익을 위해서 일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지체에게 유익이 되는 것인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지체를 생각하며 열심히 했는데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시비를 거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낙심하지 말고 '이젠 아무것도 안 한다.'라는 쪽으로 나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 좋은 대로 할 수 없고, 자기감정대로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시고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교회에서 주로 헌신예배에 잘 인용되는 구절이기도 하며, 장로, 권사취임식, 집사 임직식 같은 경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 충성할 것을 권하는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미국 대 강철 회사 사장인 카네기가 후계자를 지명하게 되자 전 세계의 눈이 그 쪽으로 쏠렸습니다. 그 회사의 중역들 중에는 탁월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누가 후계자가 될 것인지가 관심의 초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카네기는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쉬브’라는 사람을 후계자로 지명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쉬브는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쉬브는 원래 정원 청소부로 입사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정원 청소뿐 아니라 공장 안까지도 말끔히 청소를 하곤 했습니다. 그의 성실과 근면이 눈에 띄어 그는 청소부에서 정식 직공으로 채용되었습니다. 그러다 사무원으로 승진되었고 마침내는 카네기의 비서로 발탁되었던 것입니다. 카네기의 비서가 된 쉬브는 메모지와 펜을 들고 마치 카네기의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를 보좌했습니다. 그의 손에는 항상 메모지가 들려 있었고, 사장인 카네기의 지시를 일일이 받아 적고 체크했습니다.

어느 날 카네기가 밤늦도록 사무실에 있다가 집에 가려고 일어나 밖에 나와 보니 쉬브가 그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있었습니다. 놀란 카네기는 "왜 아직도 퇴근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사장님께서 저를 언제 부르실지 모르는데 어떻게 자리를 비울 수 있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쉬브는 카네기가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큰일까지 충성했기 때문에 후일에 카네기의 후계자가 되어 회사의 경영을 물려받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쉬브가 후계자로 임명받는 것이 당연하였다 봅니다. '사람들은 능력이나 학력이나 경험 혹은 재력을 기준으로 누가 후계자에 자리에 오를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카네기는 그에 대한 충성심을 기준으로 후계자를 선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이 뜻을 따라 회사를 성실하게 운영하는 것을 바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쓰시고자 하실 때도 그분에게 얼마나 충성된 종인가를 따져볼 것입니다. 하나님께 충성되지 못한 자신을 돌이키며 회개합시다.

충성을 하려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물질과 시간을 잘 선용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맡겨주신 직분에 맡도록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이름만 가지고 있는 직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더욱 큰 의미의 충성을 알려줍니다.

우선 '일군'이란 단어의 뜻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장로, 권사, 집사, 교사, 성가대원, 등의 직분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만을 일군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본문에 보면 누구를 일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1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일군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를 같은 의미로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일군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일군이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비밀을 맡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쉽게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의 비밀은 성경이니까 '성경을 맡아서 전하는 사람, 즉 목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고전 1:24절에서는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 하였고, 고전 2:7절에 보면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볼 때 <하나님의 비밀은 그리스도요, 십자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목사와 직분자만이 그리스도를 알고 십자가를 압니까? 아닙니다.

'성령을 받은 모든 신자가 되어야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십자가'의 의미를 성령의 조명과 역사로 참된 의미를 올바로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구주로 알고 믿으며,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모든 신자가 곧 그리스도의 일군이 될 수 밖에 없다.>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가 누군지 알고 있다는 차원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철저하게 복종까지 할 수 있어야 합니다.??그리스로를 터로 삼고 그 위에 세워져 가는 성전된 신자가 되어야 그리스도의 일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전 3:23절에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 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소유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진실로 그리스도를 아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소유로 살아가는 사람이 드러낼 것은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신자가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 일군이 할 일입니다.

수 없이 말씀드렸지만 신자가 모여서 할 일은 자기 자랑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소유하고 누리는 것들을 자랑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신자가 모이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비밀, 그리스도를 자랑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자랑한다는 것도 내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너보다 더 낫다는 식의 자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신자들이 모이면 세상 것으로 살아가고 세상 것을 힘으로 삼는 것이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힘으로 삼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것이 전부이지만, 그래서 세상 것이 있으면 웃고 없으면 낙심하고 염려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신자된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새하늘 새땅에서 영원히 살 존재들이기 때문에 세상 것으로 울거나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십자가는 어둠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전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비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충성하는 그리스도의 일군들이 되식를 복 빌어 드립니다.


2.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이기 때문에 '세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 1절의 "비밀을 맡은 자"란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천국의 '비밀(*,뮈스테리온)을 나타내시고 다른 자들에게는 숨기셨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마 13:11). "비밀"이라는 말은 '초대 교회 속에서 신성한 의식이나 성례전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관계된 엄밀한 지식이나 숨겨진 하나님의 경륜을 뜻하는 의미>로 쓰여졌습니다(골 1:26~27;2:2).

특별히 임무를 받은 자들 외에는 숨겨진 것이기에 비밀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비밀을 맡은 자들에게는 '계시된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과 같은 당시의 지도자들은 '계시된 진리의 교사들'이라고 칭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두려워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두려워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 되어야 합니다.

소비자는 왕이다.” 라는 말은 그가 처음 하였고, 사람을 비누에 비유한 그의 연설은 유명합니다. “비누는 쓸수록 물에 녹아 없어지는 하찮은 물건이지만 때를 씻어 줍니다. 물에 잘 녹지 않는 비누는 좋은 비누가 아닙니다. 자기를 희생하여 사회를 위해 일하려 하지 않고 자기 힘을 아끼는 사람은 나쁜 비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어릴 적에 그의 집은 무척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계속 다닐 형편이 되지 못해 벽돌 공장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교회가 낡아 다시 짓기로 했다는 광고를 했습니다. 어린 와나메이커도 교회를 위해서 무언가 바치고 싶었지만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하다가 그는 자기가 근무하는 벽돌 공장의 벽돌을 한 수레 바치기로 하고 아버지와 의논했습니다.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벽돌 한 수레를 싣고 목사님 사택을 방문했습니다.

그의 열심에 감동한 목사님은 그를 위해 뜨거운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는 가족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습니다. 23세 때 그는 조금씩 저축한 돈으로 사업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남과는 다르게 고객을 왕으로 받드는 방법으로 사업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정찰제 판매와 판매한 제품의 반품을 허용하는 제도를 실시했습니다. 왕으로 대접받는 고객들은 만족스러웠으며 사업은 날로 번창했습니다. 그리고 백화점의 왕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고 나중에는 미국의 10대 재벌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업이 크게 성공한 어느 날 와나메이커는 100만 달러를 들여 교회를 지을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헌당식에서 어렸을때 구차한 중에 헌금 대신 벽돌을 드린 그에게 큰돈을 낼 수 있게 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는 많은 돈을 선교비로 헌금하였습니다. 어느 날 선교비가 어떻게 쓰이고 있나 알아보려고 중국을 방문하였습니다. 그 곳에 있는 아름다운 교회를 보고 감격했습니다. 때마침 한노인이 소 한 마리와 한 젊은이가 함께 멍에를 메고 밭을 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와나메이커는 이상히 생각하여 왜 이렇게 하느냐고 그 뜻을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노인은 “우리가 저 예배당 건축에 헌금 할 돈이 없어 소를 팔아 헌금하고 그 소 대신 우리가 멍에를 맨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더욱 큰 헌신과 충성된 일꾼을 발견한 것입니다. 와나메이커는 그 자리에서  “주님! 나로 하여금 멍에를 메게 하사 저렇듯 희생적인 헌신의 즐거움을 알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와나메이커는 백화점 왕으로서 체신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습니다만 장관 때도 시골에 있는 유년 주일학교 교사를 계속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2절에서 말하는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Now it is required that those who have been given a trust must prove faithful)."는 말씀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저는 자신의 주엉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참된 충성이라고 믿습니다.

동시에 본문은 열심히 맡은 직분을 위해서 일하라거나 열심히 돈 바치고 시간바쳐라는 의미도 있지만 여기서 충성은 <하나님의 비밀을 드러내기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도 있습니다.

고전 1:23절에 보면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성경대로 드러낼 때 교회는 다니지만 십자가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 되기 때문에 반대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일성수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한 날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주님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날이 거룩하다는 말은 분명 거리끼는 말입니다.

'십일조도 드리지 않는 사람들에게 십일조 뿐만아니라 내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십일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이해가 되겠습니까?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면서 거룩하게 섬기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성전뿐만 아니라 우리 몸까지 성전으로 거룩함을 유지해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성숙하지 못한 신자들은 부담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세상의 것을 힘으로 삼고 있는 이방인들 앞에서도 세상 것을 욕심 내지 않고 주어진 대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미련하게 보일 것은 당연합니다. 보이지도 않는 새하늘 새땅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이 어리석게만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두려워서, 사람들의 반대를 받고 욕을 먹고 싫어할 것이 두려워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을 못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일군으로서 충성되지 못한 모습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도 세상에 뭔가를 두려워한다면 신자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즉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 삶속에서증거해야 할 부활의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이 11조를 드리지 못하고, 봉사를 못하고, 헌금을 못하는 것도 성경 말씀을 믿지 않거나 그 일을 함으로 손해를 볼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충성은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한 충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이고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할 뿐이다.'라는 청지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청지기는 주인 앞에서 신실한 자로 인정받아야 하며 완전히 신뢰할 수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특히 본분 2절의 "충성이니라."에서 수동형 '휴레데'를 사용하여 나타낸 것은 '충성되다.'라는 인정이 개인이나 인간들의 판단에 있지 아니하고 '주인이신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설령 충성 하다가 어떤 불이익을 당해도 나는 내가 깨달은 하나님의 비밀을 말할 뿐이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것을 매우 작은 일, 즉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습니다.

오직 주님만 판단하실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때 우리를 판단하실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본문 5절에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증거하였습니다.

그 무엇도 세상의 것이나 사람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심지어 특별히 사탄과 마귀도 두려워 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해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을 면류관을 바라보며 충성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충성의 '충'자는 한문으로' 중+심'이 합쳐진 합성어 입니다.

변함없는 중심을 가지고 '성'자의 '말씀 언'자와 '이룰 성'자의 합성어 이므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승리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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