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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쇠고랑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행 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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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느끼는 가장 큰 상실감은 가까운 사람과의 신뢰와 사랑이 깨어질 때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할 때 삶은 새로운 고통을 맞이한다. 부모와 자녀간의 갈등은 부모로하여금 삶의 의미를 잃게 하기도 한다. 친구들로부터 멀어짐을 느낄 때 그 상실감은 당해내기 힘들 것이다.  교회에서 겪는 성도들간의 갈등의 문제는 내 신앙에 심각한 문제를 가져 온다. 가장 큰 인생의 위기는 나와 주님과의 믿음의 문제가 갈등이 있을 때이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의 인생이 가장 행복하고 삶의 생기가 넘치는 때는 나와 내 이웃과의 넘치는 사랑의 관계이다. 가장 위대한 행복과 만족은 주님과의 관계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넘치는 때이다. 여러분들 중에 인간 관계가 깨어져 마음을 아프게 하는 상처로 인해 잠못 이루는 사람이 있는가?

바울은 당신이 겪을 미래의 고통을 알고 그 길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믿음을 보여 준다. 
바울이 잠못 이루며 아파해야 할 그런 심각한 문제가 있음에도 바울은 아파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님 때문에 당할 쇠고랑을 차고 감옥에 가는 일을 믿음으로 나아가는 놀라운 결단으로 사용한다. 오직 주를 향한 사랑과 헌신만이 있을 뿐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오늘 우리의 마음에 새로운 불을 지피는 산 믿음이 소생하는 흘러 넘침의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일에 목숨을 걸고 헌신하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는 쇠고랑이다. 바울은 성령의 힘을 입고 가르치심을 받아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올라가는 길목에서 그에게 들리는 성령의 예언의 가르침은 감옥이 그를 기다린 다는 것이다. 이때 당시 유대를 지배했던 로마에 자신이 쇠고랑을 차고 넘겨 진다는 것이다. 이미 예루살렘에서 있을 고난을 생각하며 급히 가는 여행이다. 그의 마음이 참으로 무겁고 스트레스로 인해 신경질적인 분위기가 나올 수도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과 비교하면서 오늘 바울이 여행하는 예루살렘의 여행 길에 같이 가보기를 바란다.

적극적으로 여러 제자들과의 만남
(두로의 제자들)
행21: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바울이 먼저 제자들을 찾는다. 제자들이 먼저 찾아와서 바울을 맞아 주는 것은 바울에게 굉장한 위로가 될 수가 있다. 그러나 바울이 친히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찾는다. 성령으로 가르쳐 준 예루살렘의 여행길이 그의 삶에 우울한 감정을 만들지 않는다. 얼마나 적극적인 하나님의 사람인가? 그가 찾아 갈수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는 자존심을 버린다. 그가 대 사도라고 해서 그가 세웠던 제자들이 찾아와 위로를 기다리는 그런 고압적인 사도가 아니다. 겸손한 주의 종이다. 내가 묵을 장소가 필요하면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몸소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이다. 나는 바울의 위대성을 이런 나눔 가운데서 통찰력을 얻는다. 바울이 찾아서 만난 제자들은 바울과 그의 일행들을 섬김으로 대접한다. 사실 나는 이 부분이 그렇게 쉽지 않다. 그러나 과거에 비교해보면 많이 나아졌음을 내 스스로가 안다. 우리는 이 세상을 혼자 살지 못한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라. 내가 직접 친구를 만들고 찾아가는 활발한 주의 종들이 되는 것이다. 우울한가? 스트레스가 있는가? 지금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움직이는 주의 종들이 되라. 

(돌레마이의 형제들7)
행21:7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돌레마이에서도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안부를 묻는다. 비록 두로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의 위험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던 바울이지만 그는 두로를 떠나 목적지로 항해한다. 그리고 돌레마이에 도착해서 여기서도 하루를 머문다. 그는 도무지 우울해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성도들의 안부가 중요하다.

(가이사랴의 빌립 집사의 집8)
행21: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니라”
21: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빌립의 집에 들어가 머무는데 여러날 머물렀다고 말한다. 두로에서도 제자들과 이레를 머물렀다. 하루 이틀이 아닌 여러 날들을 제자들과 머물고 또한 빌립의 집에서는 여러날 을 머문다. 여러 날 머물 수 있는 집이라면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잘 섬기는 집임을 알 수 있다. 가이사랴에 가면 빌립의 집에 머물러야겠다. 이런 편안한 마음으로 찾은 빌립 집사의 집이다. 빌립의 집이 하나님의 일꾼들을 섬기는 귀한 장소로 제공되는 것이다. 내가 5학년 때 처음으로 서울이라는 곳을 가 보았다. 그때 우리 시골교회에 자매결연을 일방적으로 맺고 우리를 인도하였던 최일도 목사님과 오류동 동산 교회였다. 우리 시골 아이들은 각 성도들의 집으로 인도되어 일주일을 그분들과 함께 홈스테이를 했다. 잊을 수 없는 홈 스테이였고 그분들의 사랑과 헌신에 감사드릴뿐이다. 나는 우리교회 성도들이 환경에 지배되어 여유와 사랑을 잃어버리는 그런 교회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어떻게 하면 나를 통하여 내 이웃들이 축복과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우리들의 고민이 되기를 바란다.
지금부터 우리에게 불편함들이 있어도 나의 집을 제공할 수 있는 그런 여유를 가진 진정한 섬김이 있는 교회를 그려 본다. 우리교회는 분명히 건강한 교회가 되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열매 맺는 교회가 될 줄로 믿는다. 내가 하나님의 종이고 이 세상에서 주님께 빛 진 자로서 섬기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빌립의 전도자의 삶과 하나님께 드려지는 이 아름다운 인생은 그의 자녀들 모두가 예언자들이 되는 놀라운 축복을 알 수 있다. 자녀 모두가 선지자가 되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성경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빌립의 자녀는 네 명이었는데 네명 모두가 선지자들이 된다. 결혼하지 않는 여 선지자들이다. 하나님께 자녀 모두가 예언자로 쓰임 받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영적인 아버지 빌립의 헌신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자녀들이 본 받는 것이다. 이 보다 더 낳은 영적인 자녀로의 성장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는 것이다. 영적인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나님께 헌신하게 한다. 한 사람의 영향력이 이렇게 위대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와서 마음껏 묵을 수 있는 이 귀한 섬김의 삶을 네명의 자녀들이 본 것이다. 이것이 아버지가 믿는 사랑의 주님이라는 것을 그들이 배운 것이다. 이런 큰 집을 가질 수 있다면 나는 우리교회 성도들이 축복의 가정들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선교사들이 와서 쉬고, 복음전도자들이 와서 쉬면서 그 가정을 의해 비는 축복이 얼마나 크겠는가?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나의 자녀 모두에게 전해지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가?

(쇠고랑이 나를 기다린다 하나)
20: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1: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니”
21: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 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은 이미 전에 에베소 장로들과의 고별 설교에서 자신의 결연한 예루살렘 행을 말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면 생명조차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고 그는 고별 설교에서 밝혔다(20:24). 이 고백과 각오는 성령으로 붙잡힌 하나님의 종의 고백이었다.
이 흔들림이 없는 각오로 주의 길을 가는 하나님의 종이다. 이런 바울이 두로에서 제자들을 만났는데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환란이 기다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동역자들이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교만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과 지내면서 여러날 지낸 후 작별하고 두로를 떠난다.

그런데 빌립의 집에서 가장 측근에서 바울과 동역하며 사역을 도왔던 동역자들도 바울에 당할 환란을 생각하며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을 것을 말한다. 가장 가까이 있는 자들의 권면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서로의 관계가 소원해 질 수도 있다. 나는 여기서 하나님의 사람들의 높고 깊은 그들의 사랑의 관계를 확인 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꼭 배워야 한다.

21:4절에서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권면했지만 바울은 더 머물면서 그들과 지내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그런데 올라갈 때 그들의 부인들까지도 다 나와서 바울과 함께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내가 권면하는 것이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고 해서 화 내고 돌아서는 그런 자들이 아니다. 두로의 제자들은 함께 그룹으로 권면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당할 바울의 환란은 성령의 능력으로 알게 되었다고 기록한다.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고집으로 볼 수도 있다. 그들의 제안을 거절한 바울의 사역에 도움을 안 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동안 머물면서 함께 하는 바울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을 그렇게 대하지 않는다. 교회가 왜 시끄러운가? 내 생각이 잘 반영되지 않을 때 섭섭함이 편을 가르는 이상한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두로의 제자들은 바울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다.

그들은 바울이 당할 예루살렘의 고통을 성령께서 보여 주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고통은 바울이 당해야 하는 하나님의 뜻으로 아는 바울의 결정에 그들의 목소리를 낮추는 것이다. 내가 받은 성령의 알려 주심을 내 방식으로만 결정하고 생각하는 그런 자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자인 바울의 고난을 대하는 결정이 성령의 역사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의 환란은 정확히 맞는 성령의 보여주심이다. 그러나 그 환란을 비켜 가느냐 정면으로 받느냐는 또 다른 문제임을 우리가 볼 수 있다.

때로 우리는 내가 배우고 알고 있는 것에 대하여 너무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진리에 대해서는 정확한 앎이 중요하다. 그러나 내가 알고 깨달은 방식으로 절대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 좋겠다.

우리는 그러지 않아야 한다. 두로의 제자들도 그렇지만 오늘 우리는 바울과 함께 했던 그의 동역자들의 태도를 볼 수 있다.
빌립의 집에 머물고 있는데 유대로부터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내려왔다. 그리고 바울의 띠를 가져가 그들에게 보여주면서 이 띠 임자가 예루살렘에서 결박 당하여 쇠고랑을 차고 이방인에게 넘겨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12절을 우리가 읽은 바대로 바울의 선교여행 동참자들과 거기에 함께 있었던 자들이 이번에는 성령께서 이 사실을 알려 주심이 피하라고 보여주심으로 알고 바울을 권면한다. 올라가지 말라는 것이다. 바울은 거절하고 올라간다는 것이다.
이 동역자들도 그들이 바울과 반대되는 권면을 하고 바울이 받지 않지만 바울을 신뢰한다. 그들의 성령으로 보여 주신 것이 고난을 알고 받는 바울의 해석이 옳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목숨 걸고 다투지 않는다. 이제 너와 나 끝이라는 이런 경솔한 헤어짐의 길을 걷지 않는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14)
행20: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주님의 인도와 주의 뜻이 꼭 이루어짐을 그들은 신뢰한다. 이 제자들은 주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믿는다. 그리고 사도 바울을 통해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주님께 맡긴다. 이 제자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위대한 종인 바울의 결박은 대단한 손실이 있기에 친히 유대에서 선지자인 아가보가 내려왔다고 생각했다. 이 일은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로서 바울을 피난 시키려는 성령의 역사로 본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해석은 달랐다. 거기에서 환란을 당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으나 본인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을 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제자들은 더 이상 바울에게 그들의 생각을 강조하지 않는다. 주의 뜻이 계시면 주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직무유기 아닌가? 이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는 주의 종들의 믿음의 태도를 볼 수 있다. 전적으로 모든 일들은 주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가 무엇 해보려는 열정 가운데 성령의 역사로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은 우리의 생각을 강력하게 고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것을 내려 놓는 연습이 필요하다.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은 주님이고 이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일을 인도하신다.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그쳤노라14)
그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말로 은혜의 사람들이 아닐까? 내가 주장하는 일이 성령으로 예언 된 일이었다 하더라도 끝까지 나를 주장하기 보다는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이런 양보는 나의 정체성에 자존심에 상처를 낼 수도 있다. 나를 포기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그것도 옳다고 인정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바울의 동역자들은 이 일을 전적으로 주님의 뜻에 맡긴다. 내가 하지 못하는 일 주님이 하게하면 안 될까? 꼭 내가 생각하고 내가 그 일을 처리해야만 그 일이 옳게 되는 것일까? 나는 굉장히 교만한 사람들이 이런 생각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하지 못하는 일 주님이 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내가 아니어도 주님이 계획하신 모든 일들을 다 이루어 가실 수 있다. 나는 다만 주님의 도구일 뿐이다. 주님이 나를 사용하고 계시는 것뿐이다. 바울의 사역의 축복은 이런 귀한 종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이런 믿음으로 주님을 신뢰하는 하나님의 종들의 사역 위에 어찌 놀라운 축복의 기름부음이 있지 않겠는가? 나는 이런 동역자들을 기대 한다. 때로 우리가 의견이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 같은 분명이 이것은 아닌데 하는 순간까지도 주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믿고 포기할 줄 아는 은혜의 종들이 되자.

바울의 울음과 십자가의 사랑(13)
고후15:16 “우리의 겉 사람은 날로 낡아지나 우리의 겉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사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하나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바울은 그를 말리는 동료 동역자들을 보면서 바울의 마음이 아프다고 말한다. 자신의 고통을 염려하는 진실한 마음을 가진 가장 가까운 사역자들과의 관계를 볼 수 있다.
고후2: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 하느니라”.
바울의 한 편의 마음은 이런 행복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이었다. 자신의 아픔을 울면서 말리는 진정한 형제애를 볼 수 있다. 나는 이런 목회를 하고 싶다. 이런 섬김으로 주의 교회가 세워졌으면 좋겠다. 마음이 진심으로 함께가는 공동체이다. 우리도 얼마든지 이런 공동체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통하는 교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이 우는 또 하나의 울음은 마음의 울음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뜻을 잘 모르는 제자들을 향한 울음이었다. 이 두 가지의 울음 모두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준다. 동역자들의 자신을 향한 진정 어린 아낌과 사랑이다. 바울은 제자들과의 관계가 이토록 아름다운 신뢰와 사랑의 관계였다. 그의 가까이에 있는 동역자들로부터 받는 마음이 진심으로 오가는 아낌이 풍성하게 넘치는 그런 관계 였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흔들림 없는 바울의 헌신이다. 바울은 주님과의 피 값으로 맺어 진 가장 소중한 주인과 종의 관계로 절대 충성으로 그의 인생을 드린다. 죽음을 불 사르는 생명조차고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십자가의 복음의 사도가 된 것이다.

나는 진정으로 이 땅에서 성공한 사람은 이 두 부분에서 승리하는 자들이라고 믿는다.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와 동료들이 나를 사랑하고 이끼고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이 죽음을 각오한 믿음이라면 그는 이 땅에서 주의 놀라운 일을 이루고 있는 하나님의 진정한 사역자라고 나는 믿는다. 이 바울의 주님을 향한 죽음을 각오한 믿음을 보면서 이들의 믿음이 얼마나 큰 감명이 있었겠는가? 생명을 각오하는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배우고 실천해야 할 각오요 결단임을 저들이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이 땅에서 당하는 예루살렘의 쇠고랑을 이 엄청난 갈등의 문제를 바울은 갈등으로 보지 않는다. 바울이 지금 걷고 잇는 인생은 주님이 참으로 기뻐하는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본인이 확신하며 가는 길이다. 때문에 우리가 볼 때 이것은 죽음으로 갈 수 있는 갈등이지만 죽음을 넘어서는 믿음 때문에 오히려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행은 기쁨의 여행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기쁘고 행복한 인생을 이런 힘찬 삶을 살 수 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닌 희망에 이르는 축복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부여된 주님의 분명한 뜻을 알고 사는 인생이 될 때 나는 그 어떤 갈등도 은혜로 받아들이는 능력의 종이 되는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주님 아래 놓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님이 내 앞에서 마음 껏 일 할 수 있도록 주님의 자리를 항상 비워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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