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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창 8: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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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그 명령대로 노아는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노아는 그 가족과 함께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그 방주는 노아와 그의 가족을 사망의 홍수에서 생명을 보존케 했습니다. 이를테면 노아의 방주는 오직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총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노아의 방주는 이 지상의 주님의 몸된 교회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생 주시기로 작정 된 자는 다 교회로 나와서 믿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행 13:4; 요 3:15, 36; 5:24; 10:28).

Ⅰ. 방주에 들어가는 것은 첫째 부활의 상징입니다.

  창세기 7장 7절에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와 자부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라고 했습니다.

  첫째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교리적인 용어로 말하면 중생(거듭남)입니다.
홍수시작 120년 전에 하나님께서 극에 달하는 인간의 부패로 인하여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실 것을 노아에게 계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하셨습니다(창 6:14). 그 방주가 완성되었을 때 노아와 그 가족과 모든 짐승들이 홍수 7일전에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노아 나이 600세 되던 해 2월 17일 하나님께서 방주의 문을 닫으시고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렸다고 했습니다(창 7:11).
40일 동안 비가 주야로 땅에 쏟아졌습니다. 이때 생명 있는 모든 것이 다 죽었습니다. 모든 생물을 쓸어 버렸습니다(창 7:23). 이 비는 2월 17일에서 3월 26일까지 내렸습니다.

비는 그쳤지만 천하의 높은 산이 다 덮이고 물은 계속 불어났습니다. 물이 150일을 땅에 창일했다고 했습니다(창 7:24).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는 말은 생명의 근원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방주 안에 들어간 노아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중생 받은 사람입니다(요 3:3). 오직 성령으로 새롭게 된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3절에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남입니다. 이것은 변화가 아니고 창조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20-21절에 『…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거듭난다(중생)는 것에 대해서 고 박윤선 박사는 말하기를 두 가지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존재케 되어 진다”는 것이고

둘째는 “중생된 심령에는 새로운 변화가 있다. 중생이라는 것은 파상된 고물을 겨우 수선하는 것과 같이 죄과로 더러워지고 파손된 사람을 겨우 개량시키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만일 그런 것이라면 거기에 중생이라든가 혹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명사가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실 때 우리의 동의를 구하거나 우리의 능력을 사용함이 없이 순전히 자신의 뜻만을 성취시키십니다.

알고 보면 방주(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문을 열고 나갈 수 조차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온전히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이루어 가시는 성령의 사역은 사람의 의지나 능력에 의하여 변조되거나 취소될 수 없는 것입니다(시 33:11; 잠 19:21; 사 46:10).


Ⅱ. 방주에서 나온 것은 중생 받은 자의 생활상입니다.

본문 8장 16-17절에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물이 급속히 땅에서 빠지도록 했습니다(창 8:3). 하나님은 10월 10일에 노아에게 창을 통해서 산들의 봉우리를 보여 주었습니다(창 8:5).
노아가 방주에서 40일간을 기다리니 물은 계속 줄어들었고 40일 후에 처음으로 까마귀를 날려 보냈으나 돌아오지 아니했습니다(창 8:7). 이를테면 노아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까마귀입니다.

7일 후에 노아가 첫 번째 비둘기를 내어 보냈으나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그냥 돌아왔습니다(창 8:9).
노아가 7일 후인 11월 25일 두 번째 비둘기를 날려 보내니 저녁 무렵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돌아왔습니다(창 8:11). 참으로 노아에게 기쁨을 제공한 비둘기입니다.
세 번째 비둘기를 날려 보냈을 때 지면이 말랐기 때문에 돌아오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29일을 더 기다리게 했습니다. 노아 601세 되던 해 1월 1일 방주 덮개를 열고 노아가 주위를 살펴보니 지면에 물이 걷혔으나 하나님은 56일을 더 기다리게 했습니다.

창세기 8장 13절에 『육백일년 정월 곧 그 달 일일에 지면에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 물이 걷혔더니』라고 했습니다.

홍수 시작 후 1년 10일이 지난 2월 27일 하나님은 노아 일행을 방주에서 나오도록 하였습니다.
창세기 8장 18절에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새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새 세상에 나온 노아의 삶을 주관하셨습니다.
노아가 방주 공사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그의 삶의 주관자였습니다. 

첫째 부활에 참예한 자들의 삶은 이제까지의 자기중심의 생활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로 변하게 됩니다.
따라서 첫째 부활에 참예한 자는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방주 안에 들어간 노아는 전혀 새로운 감각이었습니다.
다시는 옛날의 것을 구경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방주는 하나님의 공작에 의하여 빚어진 신적인 작품입니다.

그 방주 안에서 불평이 없었습니다. 더 좋은 것을 약속받은 노아에게 근본적으로 부족함이나 불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방주 생활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목적이 달성되면 끝나는 방주생활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갇혀있는 것 같고 통제 받는 것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를 버리고 어디론가 박차고 나가고 싶습니까?
그것은 마치 방주의 문을 열고 온 세상이 홍수로 인하여 사망의 잠을 자고 있는 죽음의 바다로 뛰어 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죽음을 통과한 노아가 제일 먼저 한 일에 대해 관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가 방주에서 나와 제일 먼저 한 일은 하나님 앞에 단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1) 예배하는 인격자로서의 삶입니다.

본문 8장 20절에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라고 했습니다.

새 사람, 새 생활의 첫 번째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생활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는 예배적인 인격자의 삶입니다.

2) 문화적인 인격자로서의 삶입니다.

창세기 9장 1절에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 28절에 첫 사람 아담에게 말씀하신 언약의 재확인입니다.

문화에 대한 사전적인 의미는 인간의 교양적 행동의 향상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정신적 도덕적 생활적인 국면에 세련된 진보를 의미합니다.

(1) 통치의 사명입니다(왕적 사명).

시편 8편 6절에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2장 8절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에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2) 개발의 사명입니다(선지자적 사명).

창세기 1장 28절에 『…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3) 바치는(드림)사명입니다(제사장적 사명).

베드로전서 2장 5절에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8장 3절에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만물은 다 우리의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 3:22-23). 새 생명을 얻은 자의 생활은 언제나 주를 위해 사는 삶입니다. 자기의 존재의의와 특수한 사명을 자각하고 자기의 선 자리에서 맡은 일에 충성하는 문화적인 인격자의 삶입니다. 만물은 다 너희의 것이요(고전 3:21)라고 했습니다. 

3) 인화협동적인 인격자의 삶입니다.

창세기 9장 9-10절에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물을 다시는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언약의 증거로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두었다고 했습니다(창 9:13).
구름 사이에 있는 무지개를 보고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창 9:16).

창세기 9장 17절에 『…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고 했습니다.
새 역사 창조를 위하여 노아는 방주 안에서 나와야만 했습니다. 이제 노아의 삶은 땅에 충만한 삶입니다.

노아에게 보여준 무지개 언약,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생명의 언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있는 모든 생명의 보증이 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이 땅에 있는 인간은 만물을 관리해야 할 의무까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이 땅의 진정한 환경론자들이며 인간의 생명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아가 그 사랑이 이 땅에 사는 모든 생명체에게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마침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도우며 그리스도를 전하는 희생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1-3절에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라고 했습니다.                     

4) 정예적인 삶입니다.

  그것은 excellent 한 삶입니다. 
 

Ⅲ. 방주에서 나온 것은 둘째 부활의  예표입니다.

본문 8장 18-19절에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7-18절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저들은 1년 10일 동안의 방주생활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땅을 밟게 되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부활은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것은 장차 있을 부활의 상징입니다.
홍수가 시작된 날부터 150일 동안 노아는 사망의 물 속에서 살았습니다. 따라서 노아 가족은 부활의 산 증인이 되었습니다.

둘째 부활을 가리켜 히브리서 11장 35절에서 『…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부활은 더 좋은 부활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운동은 방주 운동입니다. 방주는 구원 받은 택자들을 싣고 사망의 곡성이 진동하는 물위로 떠올라 항해하는 오늘의 교회운동입니다.

사망의 홍수가 끝이 나고 노아의 가족이 방주에서 나왔다는 것은 장차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의 마지막 부활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방주 외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방주 밖에 있었던 자들은 예외 없이 모두 죽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교회) 밖에 있는 자는 결국 멸망입니다.
요한복음 3장 36절에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2절에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롬 5:21, 6:21,2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첫째부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삶(증인의 생활)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장차 영원한 부활(둘째부활)의 소망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금세지상주의를 부르짖는 이 타락한 세상과는 달라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과 비슷해져도 안됩니다.
오늘의 교회는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심판의 장소이어야 하고 영생과 영벌의 확실한 표징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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