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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위로자, 예수 (눅 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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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인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협하는 것들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인 줄 알고 있습니까? 우울증, 심장 질환, 그리고 교통 사고라고 합니다. 머지 않아 우울증을 포함한 정신 질환이 전체 질병의 15% 이상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과학 기술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우울증 환자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자살하는 사람들 가운데 80%가 우울증 환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기독교인들 중에도 자살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적을 비관하여 자살한 아들을 그리워하던 어떤 아버지가 주일 예배를 드린 후 자살한 사건이 최근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자살한 탤런트 정다빈 씨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과 같은 각종 정신 질환에 시달리고 있습니까? 어째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자살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까?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참된 위로를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참된 위로자를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심한 고통을 받고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때문에 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 방법은 참된 위로를 받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참된 위로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독자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는 한 과부를 만나서 위로하시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죽은 그 청년을 다시 살려 주시는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을 잃어버린 과부는 울면서 무덤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과부를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죽은 청년은 독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습니다. 독자와 함께 살던 과부에게 있어서 그 아들은 남편 이상의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과부인 그 어머니는 이미 남편의 죽음을 경험한 바 있었습니다. 그 당시 사회적으로 남편의 죽음이란 아내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와도 같았습니다. 대부분의 과부들은 경제력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어머니에게 있어서 그 독자는 삶의 유일한 위로요 또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었습니다. 유일한 위로와 소망이었던 아들이 죽었을 때 그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참으로 비통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살아갈 의욕이 없었을 것입니다. 슬픔과 탄식, 그리고 절망뿐이었을 것입니다. 그 절망은 바로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죽음은 여인에게서 사랑하는 남편을 빼앗아갔습니다. 죽음은 행복한 가정을 파괴해버렸습니다. 죽음은 이제 독자까지 데려감으로써 마침내 여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고 말았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한계 상황에서 여인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아니 사실은 주님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찾아 오셨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만남을 통해서 어떤 일이 발생했습니까? 누가복음 기자는 비록 짧지만 분명하게 그 상황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눅 7:13)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 과부를 보셨습니다. 주님이 그 여인을 보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주님이 보셨다는 것은 그 여인의 형편과 처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여인의 슬픔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여인은 일찍이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독자까지 잃어버렸습니다. 그 슬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 여인으로서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죽은 아들과 함께 죽고만 싶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 여인의 비통한 심정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또한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창자가 끊어지는 것과 같은 깊은 아픔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과부의 슬픔을 보시고 주님은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슬퍼하는 그 여인의 슬픔을 남의 일처럼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여인의 슬픔이 곧 주님의 슬픔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불쌍해서 주님도 자신의 창자가 끊어지는 것과 같은 고통을 그 여인과 함께 느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과부를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울지 말라!” 주님은 그 여인을 위로하셨습니다. 과부는 독자의 죽음 때문에 매우 서럽게 울고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동네 사람들도 과부를 위로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운다고 죽은 아들이 돌아오겠는가? 그냥 운명으로 받아들이라.”고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신 위로의 말씀의 의미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울 필요가 없다. 내가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 그런 의미가 담겨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참된 위로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가 한 고백입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 1:4~5) 그렇습니다! 주님은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한계를 잘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인간의 삶의 애환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때로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기도조차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슬픔이 극에 달하고 가슴이 무너져 내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참된 위로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위로의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보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두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상처 받은 마음이 고침을 받고 회복되는 것은 우리의 열심이나 몸부림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위로하시는 주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절망하고 탄식할 때에도 위로의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며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라!” 주님의 그 음성을 들을 때 비로소 우리는 참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신 후에 무엇을 하셨습니까?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눅 7:14 상반절) 유대인들은 죽은 자의 관에 손이 닿으면 부정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죽음은 곧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은 자에게 손을 대셨습니다. 참 사랑으로 율법을 초월하셨던 것입니다. 말로만 울지 말라고 하셨으면 그것은 참된 위로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의 입에 발린 위로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을 테니까...

  주님이 관에 손을 대시자 관을 멘 사람들이 멈췄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죽은 청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 7:14 하반절) 주님은 누워 있는 청년에게 마치 그가 듣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싸늘한 시체를 향해서 주님이 말씀하시자 놀랍게도 그가 곧 일어났습니다. 일어나 앉고 말도 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주님의 말씀은 능력의 말씀이고 또한 생명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생명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때문에 주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 5:21)

  주님은 살아난 그 청년을 어머니에게 되돌려 주셨습니다. 그 과부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주님은 무덤으로 향해서 가던 과부와 모든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슬픔과 절망으로 서럽게 흐느끼는 여인과 그 여인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참으로 놀라운 기쁨을 안겨 주셨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 이름을 높여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눅 7:16~17)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시고 그 행렬을 생명의 행진으로 바꿔 주신 주님의 위로가 하나님을 잊고 지내던 사람들 모두에게 다시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은 누구나 삶의 한계 상황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죽음과 같은 한계 상황은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실존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과연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 방안입니다. 참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주님 밖에 없습니다. 참된 소망을 선물로 주시는 분도 오직 주님 밖에 없습니다. 그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나인 성 과부의 독자를 살려 주신 주님은 어저께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주님과 늘 함께 동행하면서 인생의 참된 위로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고 증거하는 일에 온 몸과 마음을 바치는 참으로 충성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강석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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