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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 신앙인의 모습 (창 26: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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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는 선교 100년 조금 넘는 역사 속에 1200만 성도를 자랑하는 큰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이는 국민의 25%에 달하는 숫자입니다. 우리 국민 네 명 가운데 한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장은 했는데 성숙의 면에 있어서는 문제가 많은 것으로 지적이 되고 있습니다. 이토록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땅에 살아가지만 우리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심히 미미한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신앙인들이 이 사회에 본이 되고 덕이 될 만한 변화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14~16)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비춰볼 때 이 땅위의 기독교인의 일원인 우리들은 자신의 신앙모습을 돌아보며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등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섯 명은 등과 기름을 가졌으므로 불을 밝혔는데 다섯은 불 꺼진 등을 들고 있다가 신랑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버림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빛 즉 등불이란 세상에 본이 되는 성도다운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삶의 뒷받침이 없는 신앙을 가리켜 죽은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안양지방회에서 주관하는 캄보디아와 베트남 선교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 나라에 이틀씩 머문 짧은 기간이라 많은 곳을 돌아볼 여유는 없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베트남을 통일시킨 호치민(호지명)을 영웅으로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는 죽고 없지만 그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여 지하궁전에 모시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진심으로 가슴으로 호치민을 우러러 본다는 것입니다. 호치민은 베트남을 독립시켰을 뿐만 아니라 통일을 이룬 진정한 민족지도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하게 그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키 160cm가 못되는 작은 체구의 지도자를 온 국민들이 그토록 우러러 보는 것은 그의 삶이었습니다. 호치민은 나라를 위해 봉사하느라 일생 독신으로 지냈고, 한 끼에 세 가지 이상의 반찬을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이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데 내가 편안하게 앉아 맛있는 반찬으로 밥을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프랑스가 총독부로 쓰던 건물을 주석궁으로 사용했는데 호치민은 그곳에 단 하루도 머물지 않고 조그만 집을 집무실로 삼았으며, 주석궁에는 호치민을 도와 일하는 국가 관료들이 사용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호치민의 전용차가 있었지만 호치민은 그 차를 한 번도 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의 신발은 평생 패 타이어로 만든 센달을 신었다고 합니다. 그가 죽고 난후 그에게 남은 것은 집무실의 낡은 책상, 패 타이어로 만든 센달과 낡은 옷 몇 벌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하는 삶이 국민들로 하여금 그를 그토록 신뢰하며 따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호치민이 그러한 마음의 자세로 남쪽 베트남과 미국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펴고 하고 있을 때, 남베트남의 티우 대통령은 호의호식(好衣好食)을 하며 지낸다는 소문은 제가 1971년 월남에 파병되어 근무하던 주월 한국군 사이에 파다하게 퍼져있었습니다. 심지어 수도 사이공에서 수 백킬로 떨러진 항구 도시 다낭까지 헬리콥터를 타고 점심식사를 하러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남베트남 가정에는 티우의 지도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형제가운데도 한사람은 베트콩이 되고 한 사람은 베트남 군인이 되어 싸웠습니다. 베트남 군인인 형제가 베트콩 형제에게 무기를 몰래 넘겨주었습니다. 베트콩을 생포하고 보면 그들이 가진 무기는 거의가 미군들이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전쟁은 질 수 밖에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지상군을 54만 명이나 파견했으며, 전쟁 비용을 288억 달러를 쏟아 부었지만 결국 패하고 말았습니다.

베트남의 티우 대통령이 민주주의 우월성을 얼마나 외쳤겠습니까? 그래서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백성들이 그를 지도자로 삼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입술의 외침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이란 입술의 고백만이 아니라 변화된 삶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식적인 인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도의 빛 된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빛 된 삶을 살아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본문에 기록된 아브라함이 백세에 낳은 기적의 아들인 이삭입니다. 이삭의 삶을 통해 참 신앙인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一.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삭은 몰아닥친 흉년을 피하여 물 많고 양식 넉넉한 이집트로 이사를 가려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곳에 가면 양식이 많아 육신의 생활에는 유익이 되겠지만 신앙생활에 지장이 되므로 그곳으로 가지 말고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님을 잘 섬겨라. 그리하면 내가 때가 되면 네게 복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이삭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육신의 생활은 흉년 까닭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입니다. 굶주린 식구들의 힘없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삶을 한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도의 위치를 굳게 지켰습니다. 육신보다 영혼을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생각보다 더 귀중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믿고 이내하며 묵묵히 순종했습니다.

이렇게 참고 견딘 보람이 있었습니다.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본문 12절~14절에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아.....”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드디어 넘치는 축복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니 흉년이 변하여 풍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니 가난이 변하여 거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니 실패가 변하여 성공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입니다. 순종은 이와 같이 축복을 받아 누리는 길인 것입니다. 순종은 이와 같이 삶을 윤택하게 하는 길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현실이 때로는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의 위치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성도위에 하나님의 축복은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서울남대문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97세의 한정원 권사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아홉 살 때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후 90년 가까운 긴 세월동안 단 한 번도 주일예배에 빠진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매일 성경을 10장씩 읽어 지금은 신구약 성경을 백번 이상 통독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조실부모(早失父母)한 후 일제 식민지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남편까지 북한으로 납치되어 갔습니다. 그 후 혼자서 7남매를 키우기 위해 날품팔이, 품앗이, 바느질 등 안 해 본 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숱한 고생을 했습니다. 그는 어떤 절망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아니하지 않고 기도하고 성경을 보며 용기와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는 훗날 말하기를 “참으로 눈물겨운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좋으신 분이어서 기도할 때마다 용기를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셨어요. 또 삶에 지쳐 쓰러졌다가도 성경을 읽으면 희망과 감사가 솟아났지요.”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살아온 그에게 지금은 7남매 중 3명의 박사와 4명의 박사 사위를 두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중에는 대학교수가 다섯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는 지금도 매주 3일씩 이대 부속병원에 나가 수술용 가제 접는 일과 대면구 소면구를 만들어 주기도하고 환자들을 찾아다니며 기도해주고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누구에게나 어려워도 성도의 위치를 지키며 순종하는 사람에게 축복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二. 이삭은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거부가 되자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여 우물을 빼앗고 흙으로 메웠습니다. 이들과 다투기를 싫어한 이삭은 다른 곳으로 옮겨 우물을 팠는데 물이 솟아났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또 와서 우물을 빼앗았습니다.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 우물을 팠는데  거기에도 물이 솟아났습니다. 또다시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습니다. 네 번째 옮겨 우물을 팠는데 거기서도 물이 솟아났습니다. 이때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다투지 않았기에 그곳에 머물며 살게 되었습니다.

물이 흔한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 일입니다만 중동 지역은 사막이기에 물이 매우 귀합니다. 오늘날도 사우디아라비아 사람들은 영국에 와서 물을 사가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물은 흔한데 석유는 나지 않습니다. 중동지역은 기름은 물처럼 흔한데 물은 매우 귀합니다. 그래서 성공한 이삭을 시기하여 해를 끼치는 방법이 우물을 빼앗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세 번씩이나 생명줄과 같은 우물을 빼앗기면서도 이삭은 다투지 않고 다른 곳으로 옮겨 우물을 팠습니다. 이것은 이삭에게 싸울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공박할만한 구변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오직 그는 온유하여 항거하지 아니하고 양보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 번씩이나 그 귀한 우물을 힘없이 빼앗긴 이삭의 모습은 못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삭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이삭을 시기하여 우물을 빼앗았던 블레셋의 추장 아비멜렉이 보니 이삭은 어디서나 우물을 파면 물이 솟아남을 알았습니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하시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자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와 화해를 요청하는 말이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28절~29절)고 했습니다.

이삭의 우물을 빼앗으며 가세 등등했던 사람이 이제는 두려워하며 해치지 말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온유함의 힘입니다. 온유한 이삭은 시기하던 블레셋을 이겼습니다. 온유한 이삭은 강한 자 블레셋을 이겼습니다. 온유한 이삭은 포학한 블레셋을 이겼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의 온유함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로마의 군병들에게 뺨을 맞으시면서,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시면서, 벌거벗기는 수모를 겪으시면서 묵묵히 참고 기도하셨습니다. 참으로 무능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수모 속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고 인류의 무릎을 예수님 앞에 꿇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온유한 사람 편에 계셔서 역사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이르시기를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5)라고 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할 수 있거든이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마서 12:18~21)하셨습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양보하는 것은 잃는 것이 아니라 더 귀한 것을 얻는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양보하는 것은 약한 것 같으나 가장 강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유한 자와 함께 하셔서 양보한 것 보다 더 귀한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자를 해치는 자를 이기도록 하십니다.

중국의 유명한 노자는 상창이라는 스승에게서 도를 배웠습니다. 어느 날 상창이 늙어서 죽게 된 것을 안 노자는 스승을 찾아가서 “사부님, 사부님께서 세상을 뜨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게 마지막 가르침을 주십시오.” 하고 부탁하자, 상창은 얼마 동안 노자의 얼굴을 보더니 입을 열고는 “내 이빨이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노자가  “사부님 혀는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상창은 “자, 이제 알겠느냐?”고 했습니다. 노자는 “사부님 알겠습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하고 큰절을 그리고는 물러 나왔다고 합니다. 이들이 주고받은 이야기는 간단명료합니다.

그렇다면 노자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일까요? 이 세상에서 이빨처럼 굳고 강하고 날카로워서 입술과 혀를 물어서 피를 내는 것은 부러지고 깨지고 빠져나가고 없어집니다. 정치권력, 무력, 돈으로 사람을 물어서 피를 내는 강하고 굳고 날카로운 것은 부러지고 빠져나가서 다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혀처럼 바보스럽게 물리고 피가 나는 것은 남아 있게 됩니다. 노자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만이 오래 남는다는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5)라고 하셨습니다. 시편 37:11에 말씀하시를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라고 하습니다. 온유함이 감함을 이깁니다. 하나님께서 온유한자 편에 계셔서 이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三. 이삭은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25절에 이삭의 생활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기를 “이삭이 그 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고 했습니다. 이삭은 오랫동안 이방에서 살다가 가나안 땅에 돌아오자 세 가지 일을 했습니다. 그것은 재단을 쌓고, 장막을 치고, 우물을 파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삭의 삶의 우선순위입니다. 먼저 제단 쌓는 일을 했고, 다음으로 거할 안식처 장막을 쳤고,  그 다음 우물을 팠습니다.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자기들이 살 장막을 치고 우물을 팠습니다. 이삭은 이렇게 먼저 할 것은 먼저하고 나중에 할 것은 나중에 하는 삶의 우선순위를 아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삶의 우선순위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고 하셨습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먼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한 번 생각해보십시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뜨면 무엇을 먼저 하십니까? 기쁜 일이 생겼을 때 무엇을 먼저 하십니까? 슬픈 일이 일어났을 때 무엇을 먼저 하십니까? 성공을 거두었을 때 무엇을 먼저 했습니까? 혹 실패 하였을 때에는 무엇을 먼저 하셨습니까?

몽골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용규 선교사가 쓴“내려놓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처럼 명예와 미래가 보장된 사람인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몽골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평신도 사역자입니다. 이분이 쓴“내려놓음”가운데 이러한 일화가 있습니다.

“나는 유학 생활과 몽골 선교를 통해, 내려놓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 의 것을 받는다는 사설을 지속적으로 체험했다. 2005년 봄, 몽골 이레교회에서 개척한 베르흐 지역의 예배 처소를 방문해서 예배드리던 중에 있었던 일이다. 벌러르라는 자매가 예배 시간에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교회에 들어왔다. 그녀는 몇 달 전 우리 팀의 기도를 통해, 듣지 못하던 귀가 열린 자매였다. 예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어버려서 소를 찾으러 뛰어다니다가 예배 시간이 임박한 것을 알고, 소를 버려두고 말씀을 들으려고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왔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하나님께 그녀가 소가 아닌 예배를 택한 그 믿음의 결단을 부끄럽게 하지 말아달라고, 그 자매가 소를 다시 찾을 수 있게 해달 라고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 힘을 의지하다가 안 되면 자신의 실패지만. 하나님께 의지하다가 실패한다면 하나님의 명예에 먹칠하는 것이라고 선포하고 기도했다. 예배를 마치자마자 밖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잃었던 소가 집이 아닌 예배 처소를 먼저 찾아온 것이다. 소가 아닌 예배의 기쁨을 선택한 소녀는 예배와 소. 두 가지를 함께 얻었다. 먼저 믿은 우리 중에는 소 대신 예배를 택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묻고 싶다.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은 단지 두 주인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금지의 뜻이 아니다. 그렇게 둘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세상과 하나님 둘 다 누리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잡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세상을 잡고 있는 것이다. 양쪽에 걸치려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결정적인 순간에는 십자가가 아닌 세상을 택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내려놓음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자기가 죽고,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는 과정 중에 꼭 거쳐야 할 단계이다. 세상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 일컬음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는 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께 사랑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하나님께 제단 쌓는 일을 먼저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드리는 정성어린 예배를 가장 기뻐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순서를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 사랑받는 삶의 비결을 알았습니다.

이삭은 순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불순종하여 애굽의 풍요로움을 취하기보다 가난과 굶주림의 고통이 있을지라도 주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에 머물렀습니다. 이를 보신 하나님은 백배나 축복하셨습니다.

이삭은 온유한 삶을 살았습니다. 세 번 씩이나 우물을 빼앗기면서 그는 다투지 아니하는 무저항 비폭력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퍅한 자의 무릎을 이삭 앞에 꿇도록 하셨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를 삶의 우선순위에 두었습니다. 가족을 위해 장막을 치고, 가족과 가축을 위해 우물을 파는 일도 급했을 터인데 하나님께 드리는 제단을 가장 우선적으로 행했습니다. 이 고귀한 참 성도 이삭의 삶이 우리 모두의 삶이되시길 바랍니다.

이로 인해 이삭이 받아 누렸던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이 우리 모두의 축복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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