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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순교자 김관주 목사의 삶과 죽음 이야기 (계 2:10, 요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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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강변교회에서 설교하면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해왔습니다. 길선주 목사님, 이기풍 목사님, 윤함애 사모님, 최권능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조만식 장로님, 손양원 목사님,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 등등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의 선배들에 대한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순교하신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오래 전에 출판한 「영몰라 통 몰라」라는 제목의 책 가운데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김관주 목사”라는 제목의 글을 쓴 일이 있는데 그 글을 중심으로 김관주 목사님의 삶과 죽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북한에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진실하게 목회 하시다가 46세에 순교하신 분이 바로 저의 아버지 김관주(金冠柱) 목사님입니다. 참고로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은 모두 48세에 순교하셨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함께 가지지는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목회 일에 바쁘셨을 뿐 아니라 신의주에 계실 때나 평양에 계실 때 주로 감옥에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아기 때부터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평안북도 신의주에 있었는데 아버지가 이따금씩 저를 칭찬해 주시던 모습이 눈에 아물거립니다. 무엇을 물어보시면 제가 대답을 하곤 했는데 대답을 아주 잘했다고 칭찬을 해 주시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한경직 목사님과 함께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부 목사로 나중에는 담임 목사로 한 9년 동안 목회를 하였습니다. 후에는 평양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신의주나 평양에 계실 때 자주 감옥에 가시곤 했습니다. 신의주에서 감옥에 갇혀 계시던 아버지를 뵙기 위해 저는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감옥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아버지를 직접 뵙지는 못했고 감옥의 벽돌담 밖에 서서 목소리를 돋우어 노래를 부르거나 소리쳐 아버지를 부르곤 했습니다.

평양에서는 서문밖교회에서 목회를 했는데 목회를 하시다가 곧 감옥으로 잡혀가셨습니다. 평양 외각에 있는 사동 탄광에서 감옥살이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동 탄광을 자주 찾아가곤 했습니다. 죄수 복을 입으신 아버지를 몇 번 만나 본 기억이 납니다. 저는 아버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아버지로부터 신앙적인 감화를 은은하게 받았습니다. 일본 통치나 공산 통치에 타협하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고난을 감수하시며 감옥살이를 하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나도 저렇게 신앙의 절개를 지켜야 한다는 감화를 은은하게 받았습니다. 제가 평양 제5 인민학교를 다닐 때 벌을 받고 정학을 당하면서도 주일성수를 끝까지 고수했던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은은한 신앙의 감화와 교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사이 개인적인 사정들 때문에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신자들을 바라볼 때 저는 기가 막히는 서글픔을 느끼곤 합니다.

첫째, 저의 아버지는 기도의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후 목회의 길로 걸어갔습니다.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는 1905년 9월 25일 평안남도 안주에서 아버지 김현하씨와 어머니 김정숙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김정숙씨는 결혼하기 전부터 예수님을 믿었는데 불신앙의 가정으로 시집 온 후 한 평생 기도와 주일 성수의 신앙을 지키므로 시집의 온 가족을 모두 예수님에게로 인도했습니다. 새벽마다 산에 올라가 새벽기도를 평생토록 했습니다. 남편과 자녀들의 영혼을 구원해달라고 새벽마다 눈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는 평생토록 이어졌는데, 나중에는 비가 올 때 어린 손자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손자로 하여금 우산을 받혀 들게 하고 눈물의 기도를 새벽마다 드렸다고 합니다. 결국 남편을 회개시켰고 세 아들을 모두 예수 믿게 했습니다. 남편은 집사와 영수가 되었습니다. 맏아들인 저의 아버지는 나중에 목사가 되었고 둘째 아들은 나중에 집사가 되었고 셋째 아들은 나중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맏아들인 저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신앙과 성격을 빼어 닮았다고 며칠 전에 저의 사촌 형님인 김명길 목사가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때로는 박천 외할머니 집에 가서 지내기도 했고 때로는 안주 친할머니 집에 가서 지내기도 했는데, 지금도 캄캄한 수요일 밤 친 할머니와 온 가족들이 등불을 켜 들고 논밭 길을 걸어 멀리 있던 예배 처소에 가서 수요 예배를 드리곤 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저의 친 할머니 김정숙 권사님은 교회 봉사에 충성을 다했는데 때로는 수요일 저녁 예배와 주일저녁 예배 때 설교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일성수에 철저했다고 합니다. 주일에는 농사 일을 절대로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주일날 절대로 밭에 나가서 일을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추수 때가 되면 할머니 할아버지의 논과 밭의 추수가 제일 잘 되었다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또한 자녀와 손자들에게 거짓 말을 하면 하나님께 벌 받는다고 말하면서 절대로 거짓말을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결국 저의 아버지는 기도와 주일 성수의 신앙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고 그리고 강직하고 적극적이고 모험적이고 진실한 성격을 어머니로부터 그대로 빼어 닮았다고 사촌 형님이 말해주었습니다. 아마 그 신앙과 성격의 유산의 일부를 저도 불려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며칠 전 저의 사촌 형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강직하고 진실한 성격을 닮았지만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했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유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제가 어머니의 유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많이 닮았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저는 제가 부드럽다고 생각한적은 없습니다. 그저 사촌 형님이 한 말을 전하는 것뿐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중학교를 마치고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해서 공부하면서 선교사들과 사귀게 되었는데 선교사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동지사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는데 중간에 법학 공부를 중단하고 신학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일제하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것이 독립운동을 하는 애국자들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고 하나님만이 민족을 흑암과 절망에서 건지실 분이라는 확신에서 법학에서 신학으로 옮겼다고 생각합니다. 모세처럼 민족을 구하는 하나의 촛불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공부를 할 때 조선에서 온 유학생들을 돌아보고 돕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아마 유학생 모임의 총무의 일을 맡아 보았던 것 같습니다. 바로 그 즈음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던 한경직 목사님이 일본 동경에 잠깐 들렸는데 그 때 저의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아마 저의 아버지에 대한 인상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신의주 제이교회의 담임 목사로 부임한 후 일본에 연락을 해서 저의 아버지를 부 목사로 초청을 했습니다. 결국 저의 아버지는 한경직 목사님의 초청을 수락하여 1938년경부터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목회사역을 시작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김관주 전도사를 소개했다. 김전도사는 본래 일본 동경 일본신학교 (동경신학대학의 전신) 출신으로 내가 미국에서 나오는 길에 동경에 들러서 알게 된 사람이다. 김전도사는 일본에서 의학전문을 나온 여의사 부인과 함께 난지 얼마 안된 아들 (지금 합동신학교 교수인 김명혁 박사)과 함께 부임했다. 교회는 사택도 마련해주고 부인이 의사였기 때문에 병원도 마련해주어 애린의원이란 간판을 걸고 의료사업도 잘 했다. 일년이 지난 후 김목사는 열심히 교회를 받들어 유능한 설교자가 될 뿐 아니라 원래 장자의 풍이 있는데다가 강직하고 진실하고 능력도 있어서 일제 말기 때 당국과의 마찰에서 교회의 어려움을 잘 해결해서 교인들의 환영을 받았고 미일전쟁이 일어난 직후 내가 미국 출신이었기 때문에 교회를 돌보지 못하게 되자[1942년경], 그 뒤를 김목사가 맡아 평북교계를 이끌고 나가는 중심인물이 되었다.” (한경직, 「장로시무 핸드백」, pp. 317-318).

둘째,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였습니다.

신의주 제이교회 출신인 김치선 박사는 1996년 8월 24일 미국에서 저에게 보낸 팩스 편지에서 아버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김치선 박사는 서울대 법대 학장과 숭실대 총장을 역임했는데 편지에서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가 일본에서 법학과 신학을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 정신과 삶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던 것을 지적했습니다. “목사님의 음성을 전화로나마 들으니 부친 목사님 생각이 나는군요. 항상 건강하시고 주님의 진실된 일꾼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김관주 목사님께서 신의주 제 2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실 무렵, 저는 중학생이었으며 일본 총독정치가 점점 기독교를 탄압하고 교역자들의 목회활동을 감시 내지는 시찰을 강화하였습니다. 목사님께서는 가급적 일본어를 사용치 않으셨습니다. 그 당시 일본 (동경소재) 신학을 졸업하셨기에 일본어를 문법적으로 또는 발음에 있어 능하실 터인데도 의식적으로 부자유스럽게 표현하시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어로 설교와 기도를 하셨습니다. 목사님의 옷차림은 일요일은 물론 항상 한복을 착용하셨습니다. 심방 오실 때에도 꼭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고무신을 신으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외출복으로 양복과 구두를 착용하고 있었습니다. 1946년 3월에 소생의 결혼식을 주례해 주셨으며 그때에도 한복 차림으로 수고하셨는데 매우 뜻있게 생각했습니다. 1945년 8. 15 해방이 되고 공산군의 교회활동에 대한 감시가 시작될 때 약 2개월간 중. 고등학교 성경공부를 할 때에 교회 종각(4층) 밀실에서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습니다.”

김양선 목사는 그의 저서 「한국기독교 해방 십 년사」에서 저의 아버지가 신의주와 평양에서 기독교 지도자로 민족독립 운동과 남북통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사실을 기술했습니다. “1946년 해방 후 첫 번 3. 1절 행사를 신의주 동교회에서 수천 신도들이 모인 가운데 김석구 목사의 사회로 성대하게 거행했는데, 공산당들이 3. 1절 행사를 극심하게 반대했다. 공산도배들은 수천 군중을 이끌고 동교회로 달려들어 성단과 성경을 훼파한 후, 김석구 목사를 끌어내어 우차에 싣고 ‘민족 반역자’ ‘미국의 주구’ 등의 극악한 문구를 목에 걸어놓고 시내를 일주하며 갖은 야유와 모욕을 가하였다. 이러한 만행은 도처에서 일어났다. 의산 노회장 김관주 목사는 공산도배의 이와 같은 만행을 남한에 알리기 위하여 동 17일 신도대회를 소집하고 성토연설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저들은 이것을 이유로 본격적인 교회탄압을 시행하였으며 지목되는 지도 인물의 제거를 위하여는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한국기독교 해방 십 년사」, p. 67).

이 일로 인하여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는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심과 정의를 사랑하는 의협심이 강했던 것 같았습니다. 김양선 목사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해방직후 신의주에서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기독교 사회당이 결성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평양에서는 김화식 목사를 중심으로 기독교 자유당의 결성의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38선으로 남북이 분단되어 있으나 언제나 한번은 남북통일의 정부수립이 있을 것을 예상한 사회지도자들은 민주주의 정부의 수립을 확보하기 위하여 기독교인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민주주의 정당조직을 계획하고 있었다. 1947년 9월 23일 유엔 총회에서 한국문제의 토의가 결정되어 앞으로 미국의 한국 독립안이 상정될 것으로 보여지고, 그것이 원안대로 결정된다면 남북통일 정부의 수립은 목척 지간의 일로 보여지므로, 김화식 목사는 김관주 황봉찬 우경천 등 다수의 동지들과 고한규 장로를 당수로 한 기독교 자유당의 결성의 준비를 적극 추진하였고 1947년 11월 19일 결당식을 거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결당식을 하루 앞둔 11월 18일 내무서에 탐지된 바 되어 김화식 목사 이하 40여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검속 투옥되었다.” (「한국기독교 해방 십 년사」, pp. 64-65).

한경직 목사도 그의 저서 「장로시무 핸드백」에서 아버지의 기독교 자유당 결성준비 활동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해방 후 신의주에서 윤하영과 필자가 중심으로 한 한국 최초의 정당 기독교 사회당이 조직되었을 때 상해 임정 요인 이유필씨를 당수로 하고 조직되었으나 소련군 진주로 와해되었고, 평양에서 고당 조만식 장로를 중심으로 조선 민주당이 조직되었으나 소련정치에 협력하기를 거부하고 감금된 무렵 평양에서는 김화식 목사, 선천 동교회 김진수 목사, 신의주 김관주 목사를 중심으로 하여 장차 있을 남북통일 정부 수립을 대비하여 기독교 자유당을 세우려 획책할 때 고한규 장로를 당수로 추대했다.” (한경직, 「장로시무 핸드백」, pp. 313-314). 결국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는 이 일로 인해 1947년 11월 18일 평양에서 김화식 목사 등과 함께 투옥되었습니다. 김관주 목사는 그 후 평양 외곽에 있는 사동 탄광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복역하다가 1950년 6월 23일, 6. 25전쟁 이틀 전에 순교 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셋째,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는 교회와 주님을 사랑한 충성스러운 종이었습니다.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는 1938년경부터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부목사로 한경직 목사와 함께 목회하였고, 1942년부터 46년까지는 담임 목사로 목회를 했습니다.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요했을 때 아버지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펼쳤다고 합니다. 일제는 김관주 목사를 끌어다 회유도 하고 두들겨 패기도 하면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의 아버지는 신사참배를 거절했고 그 일로 감옥으로 끌려가서 1년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고 합니다. 1945년 해방을 맞았지만 또 다시 공산당의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저의 사촌 형님 김명길 목사가 학생시절 신의주에 와서 얼마 동안 저희와 함께 있었는데 김명길 목사는 1996년 9월 8일 저에게 보낸 글에서 그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일제 요시찰 인물로 설교권을 박탈당하자 김관주 목사님이 신의주 제이교회의 동사 목사로 목회를 하셨다. 김 목사님의 설교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강한 어조로 명령형이면서도 호소적이었는데 그때 받은 강한 인상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예배시간 30분전에는 강단 옆방에서 준비기도와 묵상으로 준비하고 있어 어떤 특별한 일이 아니면 만나기가 어려웠다.

설교시 애용하여 자주 인용하신 구절은 다음과 같은 구절들인데 전 절을 다 읽으시곤 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등등이었다. 또한 애창한 찬송가는 ‘환난과 핍박 중에도’(383장), ‘주안에 있는 나에게’(455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371장) 등이었다. 김 목사님이 의산 노회장으로 피선되었을 때 소련군이 의주 교회당에 침입한 것을 인민위원회에 정식으로 항의하고 인민해방군이 무례하게 성전에 군화를 신고 침입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여 사과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 후 인민 정치 보위부 요원이 사택으로 들어와서 이남에서 왔다는 편지를 김목사님에게 전해주고 갔는데 이것을 빌미로 재 수감 입건하여 조사를 받은 일이 있었다.”

저의 아버지는 1947년에 평양 서문밖교회로 옮겨 목회를 했는데 목회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공산당에게 붙잡혀 감옥으로 잡혀갔습니다. 저의 아버지가 신의주에 있을 때나 평양에 있을 때 남한으로 올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아버지는 교회와 양 무리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월남을 거부하고 북한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가 평양 사동 탄광에 갇혀있을 때 김일성 주석의 외숙인 강량욱 목사가 아버지를 회유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강량욱 목사는 지금 조그련 회장인 강영섭 목사의 아버지입니다.

그 당시 저의 사촌 형님 김명길 목사가 5도 연합회가 세운 장로교신학교에 재학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강량욱 목사가 사촌 형을 불렀다고 합니다. “자네에게 특별히 부탁하네. 사동 탄광에 있는 숙부를 찾아가 한 번 이야기를 해보게. 이제라도 우리와 손 잡고 일을 해 보자고 말일세. 죽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말일세.” 저의 사촌 형님 김명길 목사는 당시의 상항을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내가 사동 탄광에 김관주 목사님을 면회 갔을 때 한번은 이런 제안을 드린 적이 있다. 내가 김일성 주석의 외숙인 강량욱 목사에게 말씀 드려서 큰 아버님을 석방하도록 건의할 터이니 나오셔서 강 목사님과 함께 손잡고 목회하시며 신학교에서 가르치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했더니 정색으로 강하게 표현하면서, 내가 강목사와 손잡으려면 왜 이곳에 와서 고생하겠느냐고 하시면서 다시는 그런 말은 입밖에 내지 못하게 하셨다. 마지막 면회인 1950년 4월 5일(식목일)에 갔더니 내가 앞으로 소련으로 가게 될지도 모르니 소련 말 교과서와 사전을 구해서 보내달라고 해서 4월 7일에 그 책을 드려 보낸 일이 있는데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평양 서문밖교회 출신인 이승만 목사는 1996년 7월 9일자로 미국에서 저에게 보낸 팩스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이승만 목사는 미국 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를 역임한 미국교회와 미국 한인교회의 지도자입니다. “여러 면으로 수고 많이 하시는 소식을 늘 듣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옛날 김관주 목사님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나의 기억에 새롭습니다. 공산치하에서 순교를 각오하고 말씀을 전하시던 장엄한 모습의 기억이 오늘까지도 깊이 남았지요. 제가 그때는 어렸으니까 목사님께서 순교하신 그때의 형편에 대해서는 잘 알지를 못합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는 기독교 자유당 결성과 관련하여 1947년 11월 18일 평양에서 투옥되었다가 사동 탄광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복역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48년 7월 사동 탄광에서였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을 「빛과 소금」의 윤세민 기자는 저와의 대담을 기초로 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1948년 7월, 만 열한 살의 어린 소년 명혁은 평양시 외각의 사동 탄광을 찾았다. ‘예수 믿는 반동들의 괴수’로 몰려 탄광에 강제 수용돼있는 아버지 김관주 목사를 면회하기 위해서였다. 명혁은 얼마 후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남루한 작업복 차림의 아버지의 모습은 얼마 전까지 교회 강단에서 힘차게 설교를 하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러나 그 형형한 눈빛과 자신을 보고 환하게 웃는 아버지의 모습은 이전 그대로였다. ‘아니 명혁이 네가 웬일이냐?’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요.’ ‘허허 이런 녀석……’ 아버지와 아들은 반갑게 손을 맞잡고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이윽고 어린 명혁은 나이답지 않게 무겁게 입을 뗐다. ‘아버지 나 남조선 갈래요!’ ‘남조선?’ ‘여기선 도저히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없고, 또 공부도 안 되요.’ ‘…………’ ‘남조선에 가서 마음껏 예배도 드리고 공부도 하고 싶어요.’ ‘남조선……’ ‘네. 어떻게든 갈래요. 거기서 열심히 믿음 생활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돌아올게요. 꼭 이에요, 아버지.’ ‘…그래, 그러려무나. 어린것이 오죽했으면…… 그래 너만이라도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 수만 있다면 야 ……’ 탄 가루로 까맣게 된 아버지의 얼굴 위로 땀과 함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린 명혁의 콧등도 시큰해졌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를 본 것도, 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것도.” (「통일과 선교」, pp. 11-12).

저는 주일성수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만 11살 되던 해 즉, 1948년 8월 어느 날 38선을 넘어 단신으로 월남했습니다. 세상에서 저를 가장 사랑하시던 어머니를 북에 두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시기 위해서 감옥에 갇히신 아버지를 북에 두고 단신으로 38선을 넘어 남으로 왔습니다. 주일성수의 신앙을 지키고 그리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고자 하는 강한 소원을 가지고 남한으로 넘어온 것이었습니다. 몇몇 어른들과 함께 캄캄한 어느 날 밤 38선을 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서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경비군인들에게 발각된 것이었습니다. 어른들은 모두 그 자리에 섰습니다. 그러나 저는 설 수가 없었습니다. 남쪽을 향해서 혼자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30분 이상 달린 것 같았습니다. 파밭을 지나고 강을 건너서 남한 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직 어둠이 깃들인 이른 새벽이었습니다. 어느 초가집에 들어가니 그날 밤 38선을 넘어 온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저를 데리고 오던 사람들이 모두 붙잡혀서 오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만난 어느 청년이 저를 기차에 태워 서울에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저는 그 청년이 누구였는지를 지금까지 모릅니다. 알아보려고 애를 쓰기도 했지만 아직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인도하신 것이었습니다. 천사를 보내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59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 59년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신앙의 자유와 여러 가지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는 기회를 넉넉하게 주셨습니다. 서울 중, 고 및 서울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에 가서 12년 동안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서 목회의 일과 교수의 일과 연합운동과 선교사역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복된 가정도 귀한 자녀 손도 주셨고 아름다운 교회도 주셨습니다. 건강도 주셨고 필요한 물질도 주셨고 좋은 선배들과 동역자들과 후배들도 주셨습니다. 부족한 저를 모두 믿어주고 사랑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삶을 너무나 넉넉하고 너무나 풍족하게 축복해주셨습니다. 슬픔과 아픔도 주셨지만 그것은 오히려 저에게 보석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요 모두가 아버지의 순교하신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저의 남은 과업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넉넉하게 베풀어주신 신앙의 자유와 목회 및 선교 사역의 경험과 축복을 북한 동포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에 평양 서문밖교회 출신인 윤명호 목사님과 잠시 통화를 했는데 윤 목사님의 마지막 관심과 남은 과업도 북한 동포들을 돕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윤명호 목사님은 옛날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저를 가르쳐주신 선생님이었고 지금은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살고 있는데 앞으로 북한 동포들을 돕고 저들을 섬기는 일을 저와 함께 같이 하자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저도 저의 아버지처럼 북한 동포들을 위하여 제물 되는 삶을 살고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저는 이 소원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기를 새벽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다 마친 다음에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와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어머니와 사랑하는 어린 아들 철원이를 천국에서 반갑게 만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철원아 고맙다. 강변교회 성도 여러분,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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