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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라비아 對 예루살렘 (갈 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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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사도가 된 내력>
원래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열렬한 유대교 신자로서 기독교를 박멸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가득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너무도 극적인 체험을 했습니다(행 9: 1-18).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서 예루살렘에
끌고 오려고 다메섹 가까이 갈 때에 갑자기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났습니다. 
'큰 자' 사울이라는 히브리식 이름을 가졌던 사울이
'작은 자' 헬라식 이름 바울로 거듭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바울은 열혈 유대교인에서 열혈 기독교인으로 바뀌었습니다.
자기가 핍박하던 예수를 위해서 스스로 핍박당하는 사도로 변신했습니다.

그토록 미친 듯이 기독교를 매도하고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바울이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초대 교인들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동기와 진의를 의심했습니다.
혹시 더 많은 기독교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해서 전술적인 위장 귀순을 한 것은 아닐까?
혹은 일시적인 감정의 변화 때문에 잠시 정신이 이상해진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도 바울이 예수님이 직접 뽑아 세워주신 12사도들 중에 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의 사도직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사실 바울은 예수님 생전에 육신의 예수님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가 만난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었지 육신의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아닌 인간적인 뜻에 의해서 바울이
스스로 사도가 되었다는 의혹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갈라디아에 흩어져 있던 여러 교회들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로 이런 이들을 향하여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이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갈 1: 1절을 보세요.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바울이 복음 전하는 사도가 된 것은 사람들이 시켜서
된 것도 아니요 사람이 맡겨서 된 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직접 임명하심으로써 사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내력을 밝히고 있습니다.
11-12절에서 바울은 또 한 차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강변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 나타나심으로써 받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기가 과거에 교회를 핍박했던 일을 상기시킵니다(13절).
교회를 박해하는 정도를 넘어서 아예 박멸시키려고 했다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 동족들 가운데 유대교에 열심을 내고
모세의 유전을 지키는 일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습니다(14절).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 세워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행 9장을 통하여 바울이 극적인 회심을 한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아라비아'와 '예루살렘' 사이에서>
그런데 본문 16절 이하의 말씀이 정말 중요합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
그가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단어들이 있습니다.
지명과 인명과 날짜입니다.

먼저 지명으로는 예루살렘, 아라비아, 다메섹, 수리아, 길리기아가 나옵니다.
우리가 머무는 곳, 기웃거리는 장소가 어딘가는 우리의 영성에 있어서 아주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회심한 뒤 어떤 경로를 밟아 나갔는지가 중요합니다. 
이제 잠시 후에 살펴보겠지만 바울이 기독교로 개종한 뒤
어느 곳으로 제일 먼저 갔는지는 그의 사도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사람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판단하는 하는 일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 다음에 인명도 중요합니다.
본문 11-24절 말씀을 보면, 회심한 바울이 만난 사람들은
게바, 즉 베드로와 주님의 젖동생 야고보뿐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를 제외한 다른 11사도들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가가 우리의 신앙 생활에 중요하다면
바울이 왜 게바와 야고보만 만났는지 역시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그 다음에 바울이 체류했던 날짜 역시 중요하다고 봅니다.
다메섹에서 회심한 바울은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또 다시 다메섹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다메섹으로 되돌아가기 전 아라비아에서 머문 시간이 얼마인지 정확치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라비아와 다메섹에 머문 지
꼭 3년 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했다는 사실입니다(18절).
더욱이 예루살렘에 방문해서 오래 머물지 않고 한 보름 정도,
즉 15일 정도만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도대체 이런 사실들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요?
저는 이와 같은 지명과 인명, 체류한 날짜 등이 자신의 사도직이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확신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복음 전하는 것을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으로 알고 철두철미 신앙적으로 감당하려고 했다는 말이지요!
바울의 영성을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그 지명이 가지는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주 가는 곳이 어딘가에 따라서 우리의 영성이 결정됩니다.
우리가 가고 싶어하는 곳, 기웃거리는 곳이 어딘가에 따라 우리의 믿음이 결정된다는 말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바울이 어디로 갔습니까?

16-17절을 보세요.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여기 지명과 관련해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오로지
아라비아로 먼저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갔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분명히 '예루살렘'과 '아라비아'를 날카롭게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루살렘이 어딥니까?
기독교의 출발지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곳이요, 베드로를 비롯한 12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모든 실력자들이 한 군데 모여 있는, 기독교의 중심지가 아닙니까?
기독교의 백악관 기독교의 청와대가 있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바울이 기독교로 개종한 뒤 가장 먼저 사도들로부터 눈도장을 찍고
인정을 받아야 할 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쉽게 말해서 교권의 중심지요, 전 세계 기독교의 총사령부가 예루살렘이었지요.

그런데 바울이 그 중요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고 어디로 갔습니까?
아라비아로 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라비아' 하면 퍼뜩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라비아 사막'입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아득하고 척박하기만 한 광야, 사막 땅이 아라비아이지요.

물론 학자들 가운데에는 아라비아가 정확히 어디를 말하는 지에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메섹 동남쪽에 인접해 있는 나바태아 왕국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곳에 사는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러 갔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저는 아라비아를 그냥 사막 지대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곧장 올라가지 않고 먼저
광야 사막 지대인 아라비아로 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가 16-17절에 들어 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고 곧장 아라비아로
갔다는 말을 하기 전 두 가지를 언급하고 있지요.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않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사람과 의논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을 우선시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사람과 의논한다면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기독교의 중심지요, 권부(權府)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초대 교회의
영수인 베드로와 주의 동생 야고보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부터 먼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람과 의논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의논하고 사람과 사귀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필요함을 깨달았기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고 아라비아 사막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루살렘과 아라비아는 단순한 지명 이상의 영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아라비아'를 우리는 영적인 상징(metaphor)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권력의 중심부요, 실세들이 있는 자리요, 제도권입니다.
사람과 의논하는 자리요, 교회 정치가 있는 곳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라비아는 빈들, 사막이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곳이요,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영적 훈련의 장소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제일 먼저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혈육과 의논하지 않기 위하여, 사도들을 만나 먼저 사람들로부터 눈도장을 찍고
인정받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하여 예루살렘이 아닌 아라비아로 갔다는 것이지요!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목회자로서 참 놀라운 통찰력을 얻었습니다.
제법 큰 교회요 역사와 전통이 있는 교회의 목사가 되고 난 뒤, 여기저기
원치 않는 감투도 쓰게 되고, 이런 모임 저런 모임 오라는 데가 많습니다.
그런 대로 제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도 요긴하고
유익한 모임이라고 생각해서 처음에는 다 쫓아 다녀보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자리는 순순한 교제 모임의 자리도 있었고, 또 어떤 자리는 정치적인 자리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자리 저런 자리에 다 불려 다니고, 이런 자리 저런 자리에
감투를 다 쓰다 보면 말씀 명상하고 연구할 시간이 부족한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목회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도 인간이기에 화려한 자리, 명예와 인기와 감투가 있는 자리에 기웃거리기 쉽습니다.
사람인데 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싶은 유혹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목회가 참 하나님이 주신 성직이요,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가 먼저 가야할 곳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아라비아입니다!

설령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고 할지라도 바울의 경우 아주 잠시 머물렀습니다.
아라비아 쪽에서는 3년을 머물렀는데 비하여
예루살렘에서는 겨우 보름, 15일 밖에는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 15일을 머무르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들은 만나지 않고 꼭
필요한 두 사람, 베드로와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만 만났을 뿐입니다. 

바울은 적어도 예수님의 수제자요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영도자인
베드로와는 일면식(一面識)을 틀 필요가 있었기에 베드로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베드로와 쌍벽을 이루며, 아니 갈 2: 11-14절을 보건대
베드로가 슬글슬금 눈치를 보았다는 사실에서 베드로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이는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와도 잠시 만났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대계 기독교를 대변했던 베드로와 율법중심의 기독교를 대변했던
실력자 중에 실력자 야고보, 두 사람만 간단히 만났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자기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꼭 만나야 할 필요가 있는
최소한의 두 상징적인 인물들만 만났다는 것이지요!

바울은 이 두 사람 이외의 그 어떤 사도들과도 접촉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20절에 보면 베드로와 주님의 동생 야고보 이외에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한 뒤 "이 말은 하나님 앞에 맹세코 거짓말이 아닙니다!" 하면서 토까지 달고 있습니다.
바울도 복음 전도자로서 그 당시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두 사람, 베드로와 야고보와는 인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복음 전도자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예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 단 두 사람만을 간단히 만났던 것뿐입니다.

<당신이 먼저 가야 할 자리는?>
그러나 여기에서 잊어서 안 될 교훈은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전,
먼저 아라비아로 가서 명상과 기도와 말씀 연구에 전념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물론 우리도 때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 먼저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사람과 의논하지 않고 사람의 눈도장을 찍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과 교제해야 할 아라비아 사막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들어간 다음에도 그 당시 예루살렘 기독교계를
대표한 상징적인 두 인물, 베드로와 야고보만 만났을 뿐입니다.
그 기간도 아라비아 쪽에서는 3년을 머무른 반면에
예루살렘에서는 겨우 15일간 체류했을 뿐입니다!
그 체류 날짜에서도 아라비아 쪽이 훨씬 더 길었던 것이지요.

소설가 김동리 선생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김동리 선생하면 『무녀도』,『을화』,『사반의 십자가』등의
소설을 쓴 한국 최고의 문인이 아닙니까?
그런데 김동리가 40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창작 활동보다는
문인협회와 관계된, 이른 바 문단정치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습니다.
그 때부터 좋은 작품이 통 나오지 않습니다.
특히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직을 둘러싸고 김동리가 평론가 조연현과 벌인
감투싸움은 한 편의 정치 드라마처럼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심지어 '문학 권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김동리같이 뛰어난 작가가 창작 활동은 내팽개친 채 문단정치에 빠져
허우적거린 것은 본인 자신은 물론이고 한국 문학계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단 문학뿐만 아니라 예술계, 종교계에서도 이런 일이 흔히 일어납니다.
그 본연의 자리를 이탈해서 권력과 명예와 이권 다툼에 열을
올릴 때 예술이나 종교가 부패하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아라비아보다 예루살렘 쪽에 기웃거리는 사람들의 운명이지요!

여러분, 우리는 예루살렘에 가기 전에 아라비아로 갈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 당시 기독교 최고의 중심부였던 예루살렘에 들어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전 먼저 아라비아 사막으로 갔습니다.
아라비아 사막에서 다시 다메섹, 자기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그 곳으로 갔습니다. 이렇게 사막의 영성이 있는 아라비아와 예수님에 대한 첫 사랑을 경험했던
다메섹에서 바울은 3년을 체류한 뒤,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는 겨우 15일 밖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런 다음에 바울은 이방 선교의 전초 기지가 된 안디옥이 있었던 수리아와 자신의
고향 다소가 있었던 길리기아 지방으로 가서 복음 전하는 일에 전념하기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이방 선교에 착수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바울의 선교 초기를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두 가지 메타포는 '예루살렘'과 '아라비아'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디가 더 좋습니까?
권세와 명성과 인기와 부를 가진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예루살렘입니까?
오직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과 명상에만 전념하는 아라비아 사막입니까?
물론 예루살렘에도 올라가야 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주님의 제자요 하나님께서 뽑아주신 일꾼이라고
한다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 먼저 아라비아로 가야 합니다.

예루살렘이 아닌 아라비아에 더 오래 머무르는 사람이 주님의 참 사도요 참 종입니다.
예루살렘보다 아라비아를 더 사모하는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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