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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고난을 이겨낸 욥 (욥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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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는 구약성경 가운데서 매우 특이한 책입니다. 우선, 욥기의 주인공인 욥이 선민이 아닌 이방인이라는 것과 인생에 다가오는 고난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합니다. 욥은 역사상 실재했던 인물로서 아브라함과 거의 동시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가 살았던 우스 땅은 아라비아의 어느 지방이거나 아니면 에서의 자손이 살던 에돔(애 4:21)을 가리킨다고 보지만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욥기는 인생에게 다가오는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또는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원인이 이것이라고 분명한 답을 말해 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욥을 통해서 인생에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다가올 때 어떻게 대처해야 고난이 종국적으로 선이 되는지에 대하여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 욥과 그가 당한 고난에 대하여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그에게는 아들이 일곱이요 딸이 셋 있었으며, 큰 부자로서 양이 7천이요 약대가 3천이요 소가 5백 겨리요 암 나귀가 5백이며 종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욥은 그가 살던 지방에서 가장 큰 자였습니다.

욥의 아들들이 자기들의 생일이 되면 각각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형제들과 누이 셋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셨는데, 그 잔칫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는 혹시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지는 않았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욥은 늘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루는 천상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천사들이 와서 하나님 앞에 섰고 사단도 거기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네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시자, 사단은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단이 대답하기를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하나님께서 욥에게 큰 복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일 뿐이요 만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시면 정녕 대면하여 하나님을 욕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고 하시면서 사단에게 욥을 시험할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생일잔치를 즐기고 있는데, 종이 욥에게 허겁지겁 달려와서 스바 사람들이 와서 종들을 죽이고 소떼와 나귀 떼를 빼앗아 갔다고 고했습니다. 그 종이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또 한 사람이 와서,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떼와 종들을 살라 버렸다고 고하였습니다. 그 종이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갈대아 사람이 약대를 다 빼앗고 칼로 종들을 죽였다고 고했습니다. 그 종이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잔치하던 욥의 열 자녀가 갑자기 불어온 대풍에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몰사했다는 비보를 전했습니다.

처음 세 사람의 보고를 묵묵히 듣고 있던 욥은, 자녀들이 몰사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더 이상 슬픔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말하기를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불행 앞에서도 범죄하거나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욥의 고난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루는 천사들이 와서 하나님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섰는데,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욥을 칭찬하시면서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단이 대답하기를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꿀지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고 하시면서 욥을 시험할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이에 사단이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하였습니다. 욥은 견딜 수 없는 가려움 때문에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었습니다. 욥이 걸린 질병은 상피병(象皮病:elephantiasis)이라고 하는 악성 피부병으로서 피부가 부풀어 올라 마치 코끼리의 가죽처럼 거칠게 되며 또 수족의 마디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가 됩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불그스레한 종기들이 생기다가 온 몸으로 암처럼 퍼집니다.

이 병의 증상에 대하여 욥기 2장 8절에 보면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라고 했습니다. 온 몸이 너무 가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7장 5절에 보면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내 가죽은 합창되었다가 터지는구나”라고 했습니다. 피부에 딱딱한 결절(結節)이 자라나다가 말랑말랑해진 후 터지며 그 상처 속에 실같이 길고 흰 구더기가 생겨납니다.

또한 입에 괴혈병적인 궤양이 생겨서 심한 악취가 났습니다. 그리하여 욥의 아내조차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19장 20절에 보니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꺼풀 뿐이로구나”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몸이 극도로 쇠약해집니다. 30장 17절에 “밤이 되면 내 뼈가 쑤시니 나의 몸에 아픔이 쉬지 아니하는구나”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뼈마디가 쑤시고 특히 낮보다 밤에 고통이 더 심합니다. 30장 30절에 보면 “내 가죽은 검어져서 떨어졌고 내 뼈는 열기로하여 탔구나”라고 했습니다. 이는 황달 증세로 피부가 검게 되고, 뼈 속에 타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욥이 이처럼 극도로 비참한 상태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본 그의 아내는 남편을 위로하기는커녕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욥이 당한 재앙은 필설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너무나 고통이 심하자 그는 자기의 출생을 저주합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유방이 나로 빨게 하였던가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인데”

또 욥은 이같이 말합니다. “어찌하여 곤고한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번뇌한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그것을 구하기를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더하다가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나는 먹기 전에 탄식이 나며 나의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구나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욥 3:)

무엇보다도 욥을 괴롭힌 것은 그가 당하는 고난의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반성해 보아도 그런 재앙을 당할 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에게 재앙을 당할 죄가 있다면 그 고난을 죄값으로 알고 기꺼이 받을 수 있겠는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만한 죄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소문을 듣고 멀리서 세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다 덕망이 높은 사람들인데 와서 욥이 알아보기도 어렵게 망가진 것을 보고는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일 칠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습니다. 한 동안 그들은 욥이 당한 고난이 너무 심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곧 친구들은 욥이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감추어둔 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합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욥에게 말합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욥 4:) 그러나 욥은 엘리바스의 말에 동의하지 않고 자기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수아 사람 빌닷이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광풍과 같겠는가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 왕골이 진펄이 아니고 나겠으며 갈대가 물 없이 자라겠느냐”

나아마 사람 소발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입이 부푼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네 말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의 목전에 깨끗하다 하는구나 … 너는 알라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니라”(욥 11:)

세 친구의 충고를 들어보면 하나 같이 인과응보를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생긴 것이라는 말입니다. 욥이 재앙을 당한 것은 그에게 그럴만한 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가 당한 재앙을 초래할만한 죄를 범한 적은 없다고 맞섭니다. 그러면서 욥은 하나님께 이렇게 구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대적으로 여기지 마시고 나의 불법과 죄가 얼마나 많은지 나로 알게 해 주옵소서”

모든 일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는 인과응보 사상은 우리 인생의 문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문제를 인과응보로 다 설명할 수는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이 그럴만한 죄를 지은 것이 틀림없어 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할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열 여덟 사람이 죽은 사건이 발생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저들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고 하셨습니다.

오늘날은 자동차가 많아서 일 년에 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암으로 죽는 사람이 하루 평균 179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암에 걸린 사람들을 보고 저들이 그럴만한 죄를 지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과속을 냈기 때문에 사고를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술을 너무 마셔서 간암에 걸린 사람들도 있고, 담배를 많이 피워서 폐암에 걸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인과응보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속을 내지 않았는데도 교통사고를 당할 수 있고, 술 담배를 하지 않았는데도 암에 걸릴 수 있습니다. 병원의 소아병동에 가보면 암에 걸려서 투병하는 어린이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어른들이라면 모르지만 서너 살 난 아이들이 죄를 지었으면 얼마나 지었겠습니까? 그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그토록 고난을 당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처럼 우리 인생에는 고난의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좋으냐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수긍해야 합니다.

욥은 모든 재산과 열 자녀를 다 잃었을 때 ‘왜 나에게 이런 재앙이 다가오느냐 나에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 그러면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는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옛말에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빈손으로 세상에 태어났다가 빈손으로 세상을 하직하는 것이니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욥은 말하기를 내가 어머니의 태에서 벌거벗고 나왔다가 또한 벌거벗고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욥은 양이 7천이요 약대가 3천이요 소가 5백 겨리요 암 나귀가 5백이며 종도 많았으나, 그 모든 재산이 원래부터 그의 소유는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자기는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는데 하나님께서 다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주셨던 것을 도로 가져가신 것이니 하나님의 처분에 수긍하고 그 동안 누리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찬송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욥은 온 몸에 악창이 나서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지만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아내에게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하나님을 섬기지 않던 사람들도 무슨 재앙을 만나면 그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는 것을 흔히 봅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나에게 이런 불행한 일이 생겨날 수 있단 말이냐?”고 항변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낸 것에 불과합니다. 또 그런 태도는 문제의 해결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에 분이 가득 차게 해서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욥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현실을 수긍하면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욥은 재앙을 만났을 때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원망 불평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사태를 더욱 악화시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만났을 때 무엇보다도 먼저 입에 파수꾼을 세우고 지켜야 합니다. 잠언 13장 3절에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하였고, 전도서 5장 2절에 보니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입을 조심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욥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권한에 달려 있음과,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정당하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정당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어떤 시련에도 입술로 범죄하지 않고 믿음으로 고난을 이겨낼 수 있게 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정당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선하신 분이라고 증거합니다. 시편 100편 5절에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 하였고, 시편 119편 68절에 보니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선하시고 그 하시는 일이 다 선하십니다.

욥이 재앙 중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없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여러 가지로 호소한 것은 그가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알고자 함이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포학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간구할찌라도 신원함이 없구나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지 못하게 하시고 내 첩경에 흑암을 두셨으며 나의 영광을 벗기시며 나의 면류관을 머리에서 취하시고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 내 소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 같이 보시는구나”(욥 19:)

그러나 욥은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었으므로 이같이 말했습니다.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연으로 영영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욥 19:)

욥은 자기가 병고에 시달리다가 죽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내가 죽어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만나 보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비록 육신이 죽더라도 그는 죽음 저 편에서 구속자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정당함을 인정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즘 기독교인들은 너무나 현세적입니다. 복을 받아도 이 땅에서 다 받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이 땅에서 잘 살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부활이라든가 영원한 천국의 삶은 덤으로 받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내세를 믿는 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의 부활과 영원한 천국을 믿습니다. 우리는 지상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현실이 형통하든 역경에 처해 있든 간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선하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건강하든 병약하든 그런 것에 상관없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선하십니다. 예레미야서 29장 11절로 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같이 말씀하십니다. “11)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12)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13)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욥이 이 일에 증인입니다. 그가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정당함을 인정하시고 다시금 건강을 회복시켜 주셨고, 새로 열 자녀를 선물로 주셨으며, 하늘 문을 여시고 복을 부어 주셔서 이전보다 갑절이나 부자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욥이 받은 현세적인 축복에 지나치게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혹 우리의 건강이 좋아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우리가 부자가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나아갈 때 모든 고난을 이겨낼 힘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욥은 극심한 고난 중에서도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근거해서 자기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는 사람이 불로 금을 연단하듯이, 하나님께서 그를 고난 가운데서 단련하셔서 정금 같이 순수하고 흠 없는 신앙인으로 만들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욥은 고난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목적과 고난이 가져다 줄 영광스러운 결과를 알았으므로 끝까지 어려움을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욥기를 보면, 드디어 하나님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나타나셔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38장부터 42장까지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는 욥이 당한 고난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인간의 머리로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하심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찌니라
바닷물이 태에서 나옴 같이 넘쳐 흐를 때에 문으로 그것을 막은 자가 누구냐
네가 나던 날부터 아침을 명하였었느냐
네가 바다 근원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밑으로 걸어 다녔었느냐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었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었느냐
땅의 넓이를 네가 측량하였었느냐 다 알거든 말할찌니라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방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의지함이냐“

이에 욥이 하나님께 이같이 대답합니다.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하나님을 만나 뵙기 전에는 고난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호소했던 욥이었으나 정작 하나님을 만나 뵙고 그 말씀을 듣고 나자 자기의 무지함을 고백하고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뵙기 전의 욥과 같이 우리도 좁은 머리로 하나님을 다 이해하려고 덤빌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우리를 향하신 은혜로우신 목적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만날 때 이를 정금 같은 믿음을 갖기 위해 연단 받는 복스러운 기회로 선용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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