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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 강권하여 데려오라 (눅 14: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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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잘 다투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날도 남편은 아내와 심하게 다툰 후에 화가 나서 차를 몰고 나갔습니다. 거칠게 운전을 하다가 앞에서 오는 차와 충돌을 해서 의식을 잃었습니다. 그는 응급실에서 3일 만에 깨어나게 됩니다. 그가 깨어났을 때 그는 하얀 옷을 입은 두명의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가 천국이 맞죠?” 옆에 있는 부인이 말합니다. “이 사람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그때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여기 있는 것을 보니 천국이 아닌 것은 확실한 것 같아!”

노예상인으로 살던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는 목사가 되어서 목회 활동을 하다가 82세가 되어 숨을 거둘 때 이렇게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천국에 가면 세 가지 때문에 놀랄 것입니다. 첫째는 전혀 천국에 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이 천국에 와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천국에서 꼭 보리라고 기대했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서 놀랄 것입니다. 세 번째는 노예상인 출신의 나 같은 죄인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놀라게 될 것 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천국 잔치의 비유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주인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종들을 보내어 손님들을 청하는 장면입니다. 사람들을 초청하는 주인은 하나님이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초청을 받는 사람들은 유대인을 비롯한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심부름을 하는 종들은 선지자들이요, 오늘날의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종들은 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잔치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잔치가 임박해서 또 한 번 종들을 보내서 그들을 초청했을때 그들은 한결같이 사양을 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온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밭을 새로 샀기 때문에 가서 봐야 한다고 거절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소 다섯 겨리를 샀기 때문에 시험하러 간다고 잔치참여를 거절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이제 결혼을 한 신혼부부였기에 내 아내를 두고 어디를 갈 수 없다고 거절을 했습니다. 종이 돌아와서 그 사실을 주인에게 보고하니 주인이 분노해서 말합니다. “너는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와라.” 여기서 병신은 장애인들을 이야기 합니다. 어찌 보면 그 시대에 남들에게 대접 받지 못하는 사람들, 무언가 의지할 것이 없고, 내세울 것이 없기 때문에 겸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종이 가서 그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주인님 그래도 아직 자리가 남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주인은 “길과 산가로 가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들이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명령합니다. 여러분 따라해 보십시오. “사람들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오늘 내 집이라는 것은 넓은 의미로 천국을 의비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천국은 비좁아서 못 들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영적인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동시에 내 집을 채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내 집이라는 의미를 좀 더 주목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비둘기파는 자들과 매매하는 자들에게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교회를 의미한다고 보아도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교회를 채우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특별히 첫 번째 초대 받은 사람이 누구일까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선민사상에 빠져있고, 그들은 우월한 민족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절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두 번째 사람들은 가난하고 병신들입니다. 장애인들은 누구일까요? 유대사회에서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가난한 세리와 창기들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죄인으로 인증 받은 사람들, 병든 사람들, 노역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데려다가 천국 잔치에 채웠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말합니다. 길과 산울가로 가서 이것은 산을 넘어서 다른 동리에 가서 다른 사람들을 데려오라는 의미입니다. 이들은 이방인들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물줄기가 이방인에게 까지 번져가게 되었습니다. 자격 없는 우리들도 예수를 통해서 구원받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가 어린아이든, 노약자이든, 건강한자이든 한영혼의 가치를 보시고 사람들을 강권하여 채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사랑큰잔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개설하였다고 하는데, 우리 교회도 예수사랑큰잔치를 개설하여 사람들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총동원 예수사랑큰잔치를 성공적으로 치루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오늘 종들은 주인의 뜻을 알기 때문에 순종했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초대받은 사람들이 거절했을 때 종들은 주인의 뜻에 따라서 다시 길가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 저는 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다시 길가와 산을 넘어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데리고 왔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알까요? 우리가 주님의 뜻을 바로 안다면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외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뜻은 내 집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채우는 것은 천국에 들어갈 영혼들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디모데 전서 2장 4절에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스스로 자신의 목적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뜻, 주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 영혼구원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지난주일도 요한복음 4장을 묵상했습니다. 예수님이 수가성에서 한 여인과 대화를 할 때에 제자들은 동네에 음식을 구하러 갔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과 대화를 통해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물 항아리를 두고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소리쳤습니다. 제자들이 음식을 구해서 왔습니다. “선생님! 여기 음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내게 있다.” 제자들은 수군거렸습니다. “누가 음식을 가져다 드렸나?”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의 양식은 무엇이냐? 나를 보내신 이에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 나의 양식이다.” 오늘 수가성의 한 여인을 구원하는 것이 주님의 양식이고 가장 기뻐하는 일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면 우리는 핑계할 수 없습니다. 오늘 밭을 보러 간 사람처럼, 소를 시험하러 간 사람처럼 핑계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뜻이 분명히 들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면 교회와 성도는 그 잔치를 잘 준비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성공적인 천국잔치를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을 초청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가정에서 잔치를 가끔 열것입니다. 아들이나 딸이 결혼식을 할 때 잔치를 엽니다. 또 칠순잔치, 팔순잔치, 회갑잔치를 엽니다. 또 손자가 돌이면  돌잔치를 엽니다. 몇 월 며칠 장소를 예약합니다. 그 다음에 어느 정도의 음식을 준비할 것이냐? 음식의 수준을 준비합니다. 준비가 다되었습니다. 이제 한 가지 남은 것은 누구를 초청할 것이냐? 가 문제입니다. 결혼식 같은 경우는 인쇄소에서 정식으로 초청장을 찍어서 보냅니다. 요즘 돌잔치 같은 경우는 엄마가 솜씨가 좋아서 컴퓨터로 예쁘게 만들어서 리본을 달아 보내기도합니다. 그렇게 초청을 합니다. 아무나 초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꼭 모시고 싶은 분들을 초청합니다. 우리 아들 결혼식인데 음식도 드시고 마음껏 축하해 주세요. 초청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잔치에는 손님이 많이 있어야 좋습니다. 잔치를 준비해놓고 음식은 많은데 손님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제가 어릴 때 기억을 되살려 보면 저는 읍에도 살지 못하고 평창에서도 한참 들어가는 염안리라는 강 건너 시골에 살았습니다. 시골에 살다보니 먹을 것도 많지 않습니다. 동네에 잔치가 있다고 하면 아주 우리들은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잔치면 온 동네가 며칠 동안 술렁입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쌀을 씻고, 전을 붙이고, 음식을 준비합니다. 그런 동네 어린아이들은 그 집 앞마당에서 노는 것입니다. 그곳에 가야 얻어먹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잔치하는데 동네에서 솜씨좋은 사람들을 초청해서 그분들에게 주방 일을 맡깁니다. 그런데 친구 아이 엄마가 그곳에서 일을 한다면 끝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친구를 데리고 갑니다. 그 아이는 주방에 가서 엄마 치마를 붙들고 “엄마! 엄마! 엄마!”라고 부르면 엄마가 “부침개 하나를 접어서 아이에게 줍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나와서 함께 공평하게 나누어 먹습니다. 지나가던 거지도 배불리 먹고 길을 떠납니다. 그 잔치에는 인심이 있습니다. 즐거움이 있습니다. 풍성함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적인 천국잔치도 풍성한 잔치가 되어야 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 초청하셔야 됩니다. 초청장을 가지고 가셔서 여러분의 결혼식에 초청하듯이 초청하십시오. “우리교회에 천국잔치가 있는데 한번 오세요.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초청하십시오. 그런 심정으로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천국잔치를 배설하면서 우리의 얼굴이 어떠해야 합니까? 잔치를 베풀면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잔칫집은 좋아야합니다. 흥겨워야 합니다. 미소가 있고,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인상을 쓰면 안 됩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의 매일 매일 예배가 천국의 축제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다음주일은 우리 교인들이 더 환한 얼굴로 서민들을 마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늘 오해합니다. 밖에서는 누구 만나서 막 웃고 떠들다가 교회만 들어오면 엄숙해집니다. 인상을 쓰고 굳은 얼굴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룩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거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배는 축제요.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풍성한 잔치를 열어 이웃을 초청해야 합니다. 다음주부터 시작되는 천국잔치가 많은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만나고 천국의 양식을 나누는 풍성한 은혜의 잔치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성공적인 천국 잔치를 위해서는 종들의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 종들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그들은 행합니다.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옵니다. 한번만 초청하러 간 것이 아닙니다. 두 번, 세 번 계속가라고 하지만 종들은 불평하지 않고 그대로 순종합니다. 이 종들은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이야기합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나 다 종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 백성에게 하나님의 초청장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55장에 보면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나오십시오. 돈 없는 자도 어십시오.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십시오.” 예수님도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성경에 오라는 말씀이 1900번이나 소개됩니다. 하나님의 종을 보내서 그들을 천국으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오늘날의 시대는 성도들이 이 종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 아름다운 천국잔치에 많은 사람이 오도록 우리는 초청하면서 순종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종들의 순종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종들이 희생하지 않았다면 그 잔치는 성공적인 잔치가 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나 한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땀을 흘리고 수고를 했을까? 오늘날 한국 교회에 많은 교회가 있고 복음의 꽃이 피었지만 우리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보고 듣지도 못했던 이국땅에 와서 눈물로 기도하며, 생명을 드리며 순교당한 선교사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분들의 피와 땀7 방울 가운데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았습니까?

1885년 4월 5일 인천 제물포 앞바다에 배에서 내린 두 명의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바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입니다. 마침 그날이 부활절 아침이었습니다. 아펜젤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여기에 도착했습니다. 이아침에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광명과 자유를 주옵소서.” 이 얽어 버린 결박에서 이들을 해방시켜 주십시오. 오늘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직도 죄에 포로가 되어있습니다. 마귀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것에 결박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들의 결박에서 자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펜젤러는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었습니다. 그는 복음 전도와 성경번역에 힘쓰던 중 1902년 6월 11일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인천에서 배를 타고 군산 앞바다를 지나가다가 어청도에서 배가 침몰해 버렸습니다. 승객 24명과 함께 깊은 바다 속에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 죽음의 장면의 목격한 미국인 탄광 기술자 보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물에 잠기면서도 한국인 비서와 목포가 고향인 한 여학생을 구조하기 우해서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자기혼자의 몸이라면 탈출할 수 있는 상황에서 두 사람을 구조하다가 결국 장열하게 죽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아펜젤러가 이 한국 땅에 흘린 피로 인해서 오늘 우리가 편안하게 예수 믿고 복음을 듣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다 복음의 빚진 자입니다. 누군가에게 복음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양화대교를 건너가면 양화진이라는 선교사들의 묘가 있습니다. 우리 한국에 친척들이 있어서 온 것도 아니고, 초청장을 보내 온 것도 아닙니다. 자기발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왔다가 여기서 복음 선교 사역에 힘쓰다가 순교당하고 풍토병으로 죽어간 수많은 선교사들이 그곳에 누여 있습니다. 더더욱 안 된 것은 선교사 가족들의 묘가 그곳에 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생후 1일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쌍둥이가 죽기도하고 형과 동생이 동시에 세상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왜 그들이 이국땅에 왔어야 합니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천국잔치에 그들을 초대하기 위해서 희생을 감수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에게 이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희생 없이는 감당 할 수 없습니다. 헌신 없이는 결코 전도할 수 없습니다.

며칠 전에 신문에 장기기증에 대한 소식이 나왔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은 자신의 시신을 남에게 기증하는 것입니다. 라철주라고 하는 분은 뇌출혈로 내사 판정을 받았는데 자신의 심장과 간과 신장, 각막 등 모두 6명에게 선물을 했습니다.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했습니다. 우리의 몸이 건강하다면 그것을 남에게 넘겨 줄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선물일 것입니다. 장기 기증이 참 가치 있고 고귀하지만 그보다 더 귀한 일이 있다면 오늘도 죽어가는 영혼에게 주의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라고 저는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고, 내가 누구를 보낼 고” 이사야는 말했습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천국 잔치를 위한 종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을 초청하고, 그들을 영접하고, 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저와 여러분이 핑계 자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저런 핑계로 주님이 주신 사명을 외면하지 마시고 이 사명을 위해 함께 힘을 모아 아름다운 천국잔치를 통해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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