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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있는 말이 되게 하라 (막 1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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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마가 12:17)

  사람은 말을 통하여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전합니다.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생명 있는 관계로 만들고 그 관계를 지속하게도 합니다. 그러나 말이 그 본래의 기능을 다하지 못할 때 말의 기교와 술수만이 난무하게 되고, 더구나 그 기교와 술수가 횡포의 것이 될 때에 우리는 말에 대한 권태나 싫증을 느끼게 됩니다.

  요즈음 우리들 주위에는 말의 기교와 술수의 횡포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특히 정치가들이 이 부분에 앞장서고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도자들을 비롯한 사람들의 병든 말의 기교와 술수가 이 사회의 소중한 말의 본래적 기능을 잃게 하고 있습니다. 그 횡포 속에 신성한 말이 오염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아픔은 말을 통해서 서로의 느낌과 감정을 전하지 못하고, 말로서 진리와 지식을 전하지 못하고 서로의 이해와 진실을 나누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오히려 말을 가지고 거짓과 왜곡 오해와 모함으로 사람을 죽이는 술수를 만들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 횡포가 글로서 표현될 때 더 무서운 힘을 발휘하여 다른 사람을 매장하거나 죽이기까지 하는 부끄러운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말의 횡포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잘못된 기교와 술수의 말을 바른 말 곧 살아있는 생명의 말과 언어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교적인 말의 술수를 멈추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미워하는 종교지도자들은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의 전통을 지켜가면서 로마 식민지하에서의 해방을 원했고, 반대로 헤롯당은 헤롯 왕권의 지지자들로 로마 식민체제가 계속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이러한 적대적인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보내서 예수님께 질문하게 했습니다. 그 질문은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막 12:14)였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교활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하시면 민족을 배반하라는 배신자가 되게 되고,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신다면 로마정부에 대항하는 반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특이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통용하는 화폐인 주화(coin) 한 데나리온을 가져오라고 하시고 그 화폐에 그려져 있는 초상과 적힌 글이 누구의 것이냐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들이 가이사 황제의 것이라고 대답하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책잡기 위한 사람들의 말은 고도의 기교와 술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예수님을 꼼짝 못하도록 함정에 빠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먼저 그들의 술수를 눈치 채지 못하도록 질문에 앞서 예수님을 높이 치켜세웠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시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막 12:14) 그런 다음에 예수님으로 하여금 배반자가 되든가 반역자가 되도록 만드는 무서운 독이 있는 말의 술수를 부렸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술수의 간악한 질문자체를 멈추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는 대답은 기교와 술수의 질문이 더 이상 계속할 수 없게 하는 대답이었습니다.

  실제로 말의 술수와 횡포는 그 말의 반응이 어떠냐에 따라 커지기도 하고 적어지기도 합니다. 불이 잘 타는 것은 불이 붙을 땔감을 잘 대어줄 때입니다. 불붙을 땔감을 계속 대어 주지 않으면 불은 꺼집니다. 마찬가지로 말의 술수와 횡포는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 사라져 버리는 하찮은 것입니다.

  우리들 주위에서 발생하는 말장난, 모함, 이간질, 거짓인 술수의 말의 횡포는 반응을 요구하고 반응에 따라 더욱 커집니다. 그러므로 반응을 보이지 않아야만 그것들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반응을 멈추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더 이상 반응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기에 함정에 빠뜨리려는 간악한 말의 술수는 중지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의 아버지께서는 서해안 시골교회에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교회건축과 함께 중학교를 설립하셨고, 지역발전을 위해 열심히 일하심으로 성공적인 목회를 하셨습니다. 그 교회에는 전쟁과부들이 몇 분 계셨는데, 그분들을 돕기 위해 흙벽돌을 찍어 집을 지어주고, 먹고살도록 병아리 우리를 지어 주며, 때로는 싸리비를 만들어 주는 등 궂은일을 도맡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익명의 사람으로부터 그 교회에 이상한 편지가 배달되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인즉 어느 날 밤 교회목사가 달밤에 언덕에서 어떤 전쟁과부와 오랫동안 속삭이더니 그 과부 집에 함께 들어갔는데, 곧 불이 꺼지고 조용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편지사건은 간악하고 무서운 말의 술수였고 횡포였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에 교인들과 지역사람들이 전혀 반응하지 않음으로 간교한 술수는 멈추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쓴 장본인은 후에 많은 사람들의 무언의 질타 속에 그곳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말의 횡포와 술수는 반응하지 않는데서 멈추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예수를 책잡으려는 말의 횡포를 멈추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짓된 말, 기교와 술수의 말, 생명 없는 말의 횡포는 멈추도록 해야 합니다.

  기교와 술수의 말을 말한 자들 자신에게 되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질문한 사람에게 자신에게 돌아가 그 질문의 동기에 책임을 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질문자에게 그 질문이 되돌아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의 동기에 대하여 자신을 바로 보게 하여 책임을 지도록 했습니다.
  ‘너희들 자신이 너희들의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이 어떠한 것이 되기를 원하는 바를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또한 너희들 자신이 질문의 이유와 의도를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그 대답에 스스로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 삶의 모습으로 다른 사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기에 누가 이렇고 저렇고 하는 사람은 그 사람 자신이 이렇고 저런 사람임을 보게 됩니다. 남을 비방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비방하는 말의 내용이 그 사람 자신의 모습임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고침을 받는 길은 그렇게 말하는 자신에게 돌아가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이해하고 책임을 질 수 있어야합니다.

  저는 해외 목회 시에 한인사회가 잘못된 말들 때문에 종종 시끄러워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번은 한인사회에서 존경받는 한 가정이 모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모함의 내용은 그 가정은 철저한 위선자의 가정이라는 것과, 불법체류자인 한인들을 괴롭히고 남녀의 이성문제가 깨끗하지 못한 가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가정은 모함 받은 대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후일 밝혀진 바에 의하면 모함한 그 사람이 철저한 위선자이고, 불법체류자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사기의 행각을 일삼는 자였고, 부부관계나 이성관계가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모함하는 그 내용이 자신의 모습임을 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원인이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자신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못하는 데 있었습니다.

  우리는 거짓된 말의 술수와 횡포를 만들어 내는 자신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자신에게 진실하게 하고 그 말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고 그 병든 말을 치료받게 해야 합니다. 우리들 자신에 대해서 그 말을 만들어낸 자신의 의도를 살피는 가운데 자신들의 말이 진실 되고 살아있는 생명의 말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되도록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질문한 사람에게 자신에게 돌아가 그 질문의 동기에 책임을 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말의 본래의 기능을 회복시켜 살아있는 말이 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고 하신 것은 말의 본래의 기능과 함께 살아있는 말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질문의 의도를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기교적인 말장난보다는 살아 있는 생명의 말이 되도록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들 주위에는 거짓과 술수, 모함의 말들 외에 형식적인 말들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들은 우리를 황폐하고 어둡게 만들며 사단이 활동하는 영역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말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만드실 때에 말씀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이 말의 능력을 혼자만 가지고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에게 이 말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속에는 말의 능력이 들어 있는데 이 속성에 따라 사람을 만드시고 말의 능력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말도 가히 상상할 수 없는 만큼의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고 황폐하게 만드는 기교와 술수의 말들이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생명 있는 말들이 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들 가운데 살아있는 말이 가득 차게 해야 합니다. 생명의 말은 우리 인간들의 관계를 생명 있게 합니다. 예수님은 살아있는 말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셨고, 상처받은 우리의 마음을 치료하여 주셨고, 우리들의 삶을 새롭게 하여 주셨습니다. 보잘 것 없는 한마디의 말일지라도 살아있는 말일 때 그 말은 우리들을 살아나게 해주고 치료해주는 축복의 말이 됩니다.

  우리들의 신앙공동체인 이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나누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의 말은 살아있는 말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생명 있는 말의 역사로 사랑을 나누게 되고, 도움을 주고받게 되고,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1967년 8월 28일 오후 1시 30분 충청남도 천양군 구부광산이 매몰되어 지하 100m 속에 갇혔던 양찬성씨가 구출된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정확히 16일 만인 9월 12일 오후 9시 15분에 구출되었는데, 이것은 세계의 기록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양찬성씨가 지하에서 생명을 잃지 아니한 가장 큰 원인은 전화가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있어서 밖의 사람과 계속하여 전화를 통한 대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살아있는 말, 곧 생명 있는 대화는 인간으로 살아가게 해주는 능력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무릇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아있는 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들의 생활 속에 살아있는 생명의 말들로 가득 차도록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는 생명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기교와 술수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진실 되어 사람을 구원하여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믿고 따를 때 구원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의 말도 진실하고 생명 있는 말로 사람들의 빛이 되는 말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의 질문은 예수님을 모함하려는 질문이었고, 예수님을 죽이려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하나의 기교요, 술수의 말이요, 사람을 황폐하게 하는 죽은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의 본래의 기능을 회복하여 살아 있는 말이 되도록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생명 있는 말의 풍요 자가 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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