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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의 다리 긁지 마! (입다의 서원) (삿 11: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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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다리 긁지 마!(삿11:28-40)

"이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들에게로 나아갈 때에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 손에 붙이시매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크게 도륙하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그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하여금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아비에게 또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용납하소서. 내가 나의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 위한하고 보내니 그가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두 달 만에 그 아비에게로 돌아온지라. 아비가 그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 이로부터 이스라엘 가운데 규례가 되어 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

본문은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애굽에서 바로의 압정에서 구원해 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에게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사 축복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시고, 축복해 주셨지만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 농경사회에서 섬기던 거짓 우상인 '바알'과 '아스다롯'이 천둥과 번개를 가지고 있으며, 농사를 잘되게 하는 신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우상을 섬길 뿐만 아니라 원근 각처의 '이방족속의 각종 모든 신'들을??끌어다가 섬길 만큼 <우상숭배의 악이 극에 달했을 때>의 사건입니다.

삿 10: 6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려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라고 그 당시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따라합시다. "남의 다리 긁지 말자." 남의 다리 긁으면 시원합니까? 답답합니까?

삿10: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셔서 그들을 블레셋과 암몬의 손에 넘기셨고, 8절 전반 절에 보면 그 결과 "그들이 그 해부터 이스라엘 자손을 학대하니" 18년 동안 억압하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곤고가 심해지고, 괴로움이 더해진 이스라엘 자손은 그 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남의 다리 긁다가 하나님께서 징계하시자 하나님께 "범죄 했으니 살려 달라."고 회개하며 부르짖자(삿10:9-10) 16절에 "자기 가운데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시니라."고 하였고, 그래서 또 다시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셨는데 이때에 들어 쓰신 사사가 바로 본문의 [입다(Jepthah)]이었습니다.>

[입다(Jepthah)]는 이스라엘 사사중의 한 사람(삿10:17-12:7)으로 본래 길르앗 사람으로서 "큰 용사"였으나 그를 낳은 어머니가 기생이었으므로(삿11:1) 정 부인에게서 난 이복형제들에 의해 쫓겨나 [돕]이라고 하는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삿11:2-3).

그때 압몬 사람들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요단강 동쪽 이스라엘 경내에 침범하여 18년간이나 점령하고 있었고, 거기에다가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모여서 길르앗에 진을 치고 전쟁을 일으키자 이스라엘 자손도 이에 맞서 미스바에 진을 치기는 했지만(삿10:17) 앞장서서 암몬과의 전투를 이끌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길르앗 백성과 방백들이 서로 말하기를 "누구든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움을 시작하면 그가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고 조건을 제시했지만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있었습니다(삿10:18).

그러자 삿 11:5절을 보면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그에게 말했습니다. 삿11:6절을 보면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고 요청하자 입다는 그를 찾아온 길르앗 장로들에게 대답하기를 삿11:7절에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다시 말하기를 우리 가운데 암몬 자손과의 싸움에 앞장 설 자가 아무도 없어서 당신을 찾아온 것이니 우리와 함께 싸워주기만 하면 당신이 우리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삿11:8)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입다는 길르앗 장로들에게서 '정말 그렇게 행하리라.'는 약속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삿11:9-11).

입다는 암몬의 왕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암몬의 침공과 그들의 영토소유권주장의 부당성을 역사적으로 지적하고 설명하며 호락호락하지 않은 외교전을 폈습니다(삿11:12-27).??그러나 본문 28절을 보면 암몬의 왕이 입다가 사람을 보내어 말한 것을 듣지 않자 부득이 전쟁을 하게 되었고, 32절에 입다는 하나님께서 암몬 자손을 그의 손에 넘겨주셨으므로 33절에 '크게 승리하여 그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입다는 돌이킬 수 없는 한 가지 실수를 함으로 참으로 기가 막히는 비극을 당해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성경 전체에서도 가장 안타깝고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입다]라는 사사에게서 일로 잘못된 신앙적 대응을 경계할것을 알려줍니다.

입다는 암몬 자손과 싸우려고 나아갈 때에 그는 하나님께 서원하기를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고 소원기도를 하였습니다(30-31절).

그런데 그가 암몬을 물리치고 개선하며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르렀을 때에 '자기의 무남독녀인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그를 영접하였습니다(34절).' 입다는 그것을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울부짖어 말하기를 "어찌하면 좋으냐? 내 딸아!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고 나를 괴롭게 하는구나. 내가 내 입으로 하나님께 서원하였으니 돌이킬 수 없는 이 일을 어찌하면 좋으냐?"고 말했습니다(35절). <한 마디로 줄여 말하면 남의 다리 긁는 격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입다의 잘못된 처신에서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이 어이없는 상황을 깨달은 그의 딸은 그러나 아버지에게 36절에 말하기를 "아버지,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입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서원하셨으면 아버지의 그 말씀대로 내게 행하세요. 그것은 아버지가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기 위해서 하신 일이고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를 위하여 허락하신 일 아닙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37-38절을 보면 그 딸은 단지 자기가 남자를 알지 못하고 처녀로 죽게 된 것이 서러우니 친구들 하고 산에 가서 실컷 울고 오도록 두 달만 기다려 줄 것을 아버지에게 청하여 허락을 받았습니다. 약속한 대로 두 달 만에 딸은 아버지에게 돌아왔고 그의 아버지 입다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실행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는 에브라임과의 싸움에서 이겼고, 그리하여 이스라엘을 6년간이나 다스렸습니다. 사무엘은 삼상12:11절에??"이스라엘을 구하려고 하나님이 세운 충실한 자"라고 입다를 평가 했습니다. 히브리서 11:32절에서도 그를 '신앙의 사람'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아무 잘못한 것 없는 착한 딸을 제 손으로 번제의 제물로 바쳐야 했던 입다의 잘못된 신앙관을 한마디로 "남의 다리 긁는다."로 표현 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속담으로 "남의 발에 버선 신긴다."는 말이 있는데 '자기를 위하여 한 일이 뜻밖에도 결과는 남의 이익만을 위한 일이 되었다.'는 뜻으로 본문을 통해 신앙의 교훈을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 입다는 남의 다리 긁는 일을 한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까((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1. 입다는 순수(純粹, purity)성이 없었습니다.

  그는  '순수하게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웠다.'기 보다는 자기가 민족의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래서 삿 11: 8절에 보면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대답하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하려 함이니 그리하면 우리 길르앗 모든 거민의 머리가 되리라."고 약속 때문에 전쟁에 나간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는 것은 '입다나 입다의 형제들이나 이스라엘의 장로들이나 모든 사람들이 비록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모두가 힘의 논리로 일을 해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리적인 힘이 필요 없을 때에는 체면과 위신과 가문을 힘으로 삼던 자들이 힘이 필요하자 체면이니 위신이니 하는 그 모든 것을 내 던지고 자신들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입다에게 매달리고 입다는 그것을 기회로 삼아서 이스라엘의 머리가 되려고 하였습니다. 순수성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딴 생각이나 그릇된 욕심이 전혀 없어야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인간들끼리 자기 좋은 대로 일을 처리해나가는 신앙이 없는 자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즉 그들의 기억에는 하나님이 살아 있을지 몰라도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은 전혀 살아 계시지 않는 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자신들 역시 그런 수준에서 하나님을 말하고 살아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일이 잘된 것으로 인해서 즐거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에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삶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기쁨만을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할 일에만 감사하게 되고, 항상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할 일에 대해서만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입다는 기생의 아들이라고 천대 받고 쫓겨났던 자신의 입지에서 출세와 권력 장악을 반드시 이루기 위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면 사람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하나님께 서원하기를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높임을 받으시고, 나는 십자가 뒤에 가려지는 귀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2. 입다는 특별히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려는 어떤 의지나 노력이 없었습니다.

입다의 남의 다리 긁는 신앙은 성경말씀에 근거한 서원이 아니었으며, 이스라엘을 이끌고 이방족속과 전쟁을 수행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의 말씀대로 행하려는 어떤 의지나 노력이 없자 바로 '하나님께서 침묵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사들의 이야기에서와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입다에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입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결정하고 혼자 말하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혼자 서원하고 혼자 괴로워하며 자기 딸을 번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었다고 해서 모든 일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입다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입다의 행적을 전하는 기록 속에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는 단지 길르앗 족속의 장로들의 청으로 나서게 된 것입니다.

입다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언급은 두 군데 나옵니다.

먼저 29절에 보면 암몬 왕과의 외교적 협상이 결렬되고 전쟁이 불가피해지자(28절 참조) "이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셨다."는 말씀이 한 번 나오고,

그리고 본문 32절에서 입다가 드디어 암몬 자손과 전쟁을 시작하자 "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 손에 붙이시매."라는 언급이 나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입다를 일시적으로 지도자로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암몬의 손아귀에서 구해내시려는 뜻을 이루셨지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입다에게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고전 4장 6절을 읽어보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는 지혜가 있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과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보다 앞에 있는 11절을 보면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를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뢰니라." 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어떤 응답도 하나님 편에서 하시지 않았습니다.

1) 입다가 하나님께 서원하여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고 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2)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하던 입다가 자기 집 앞에 이르러 자기 집에서 자기 딸이 나와 자기를 영접하는 것을 보고는 옷을 찢으며 "어찌할꼬!" 하며 괴로워 부르짖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대답이 없으셨고,

3) 35-36절절에 그 딸이 "아버지, 아버지께서 하나님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라면 그 말씀대로 내게 행하셔요." 하며 애처롭게 말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4) 39절에 '산에 가서 울고 두 달 만에 돌아온 딸을 입다가 그의 서원대로 번제로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일체의 반응이 없으셨습니다.' 입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도 않는 어리석은 일을 행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도 얻지 못하는 남의 다리 긁는 비극을 스스로 자초했던 것입니다.

말씀과 상관없는 잘못된 신앙을 가진 입다에게 침묵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입다에게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따라합시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 행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자기 생각대로 밀어붙이는 일을 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도 않으시고, 인정하지도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침묵 우리에게 경고가 되기도 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무관심은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징벌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에는 우리도 침묵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내 생각이나 방법으로 거역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무시하고 내 생각과 방법대로 행하면 결국 불순종, 불신앙의 길을 걷게 되고, 괴로움을 자초하는 어리석고 위험한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성령 강림절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도 입다처럼 일방적으로 자기 생각, 자기 소원, 자기 의지, 자기 욕심만을 큰 소리로 쏟아내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영광을 찾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조용히 기도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무슨 일을 하던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살피며, 하나님보다 앞서가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에는 더더욱 그의 침묵의 의미를 두려운 마음으로 살피고, 기다리는 것이 신앙인의 바른 자세인줄 믿습니다.

입다는 하나님 앞에 말씀에 순종하여 올바로 서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전혀 몰랐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특별히 한 영혼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하나님은 입다의 딸을 입다에 의해서 죽게 하심으로 인해서 생명의 소중함을 발견하게 하시고, 입다 자신의 죄가 어떤 것임을 보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입다에게 승리를 주셨지만 입다의 딸에게 역사하여 입다를 영접하러 집에서 가장 먼저 나오게 한 것입니다.

자! 입다만의 어리석고 남의 다리 긁는 신앙입니까? 우리의 이야기를 한 번 해 봅시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입다의 불신앙에 의해서 깨끗한 입다의 딸이 희생한 것처럼, 우리의 죄와 불신앙으로 인해서 죄 없으신 독생자 그리스도가 희생하지 않으셨습니까? 마치 입다의 딸이 '이것은 아버지를 위한 하나님의 일이니 말한 대로 행하라.'고 하는 것처럼 예수님 역시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해 주시기 위해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위해 죽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입다가 자신의 딸을 보면서 자신이 옷을 찢으며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애통해 한 것처럼, 우리의 죄로 인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보면서 때마다 날마다 순간마다 애통해 하고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십자가를 바로 대하는 모습이 이렇게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본문 40절에 보면 "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진실 된 회개가 한 번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대할 때 마다 마치 베드로가 닭 울음소리를 듣고 새벽마다 통곡한 것처럼 철저한 나를 부인하고 회개하는 결단이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3. 입다는 잘못된 서원을 했습니다.

본문 30~31절에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과 암몬은 지역적 관계로 늘 요단 동편에 대한 이권 관계로 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장로들로부터 이스라엘의 장관으로 세움을 받은 입다는 <미스바에 본부를 두고 싸우기 전에 먼저 암몬 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외교적으로 화평을 얻으려 했습니다.>

입다가 암몬 왕에게 주장한 내용은 <그 땅은 본래 암몬 족속의 땅이 아니고 아모리 족속의 땅이었고, 26절을 보면 '하나님은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고 이스라엘은 지난 300동안 그곳에서 살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암몬 왕은 이 주장을 묵살하고 오히려 '트랜스 요르단'을 포함한 '아르논 강변'과 '얍복 강변의 땅을 완전히 점령하려는 침략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두 나라 사이에는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실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사사 입다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입다가 서원을 한 것 때문에 입다를 사용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남의 다리 긁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따라 조건 없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인데 입다는 인간적인 조건을 제시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배경을 살펴봅시다. 전투가 있기 전날에 입다는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며 서원 기도를 합니다. 그의 서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어떤 댓가를 걸어 확보하려 한 인간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제 적 암몬 군을 맞이하여 싸우려는 입다에게는 이 싸움을 필승으로 이끌어 18년간의 학대에 설분하고 싶은 심정도 일어났겠지만 그에게 당장에 큰 문제는 적 암몬 군은 강하고, 아군은 약하기만 한데 어떻게 해야 아군이 승전할 수 있을 것인가는 가장 큰 고민이이었습니다.

지난 18년 동안 강적 암몬은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침략하였고, 약탈을 일삼아 왔지만 적의 침략과 학대를 피하지 못하였던 상태였습니다. 18년 동안이나 우월한 적의 세력에 눌려 살던 이스라엘이 이제 적 암몬의 도전에 응수해야 하겠지만 무슨 힘을 믿고 나가 싸우겠습니까? 이러한 때에 사사로 세움을 받은 입다는 이번 싸움에 패한다는 것은 이 백성들에게 더 비참한 상태로 만들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어떻게 해서든지 이번 싸움에 이 백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기생의 아들이였으며, 불륜의 관계로 태어난 사생아이였고, 이복 형제들에게 쫓겨나 잡류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입다는 자기의 자격이나 인품 등을 생각할 때에 감히 과거의 훌륭한 사사들 같은 인물로 자임할 수가 없었으므로 필승을 간구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기 위해서 중대한 결심으로 승리만을 위한 잘못된 서원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서원의 내용은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삿 11:31) 고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제의하기를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30-31절)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암몬 족속을 입다의 손에 붙이셔서 암몬은 완전히 항복하고, 이스라엘은 20성읍을 치고 승리하게 해 주셨습니다. 삼상 11:1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승리는 철저하여 사울왕 때까지 암몬은 다시 이스라엘을 더 괴롭게 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입다는 하나님께 약속했던 서원으로 인하여 번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사기 11:34-35절에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그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입다가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암몬에 대한 승리와 안전한 귀환을 요구하며 그것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얻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협상을 통해 보장받으려 한 인간적인 계산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주권적 은혜의 하나님을 자기와 같은 협상가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일이었습니다.

사사 입다의 서원에 대한 평가는 여러 성경학자들에 의해서 평가되고 진단한 이론들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오늘 이 시간에는 과연 사사 입다의 서원이 성경에 근거를 둔 합당한 서원이었느냐? 아니면 지나친 열심에서 나온 무분별한 인위적인 서원이었느냐? 알아보기 위해서 서원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서원에 대하여 조명해 봅시다.

일반적으로 서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① 히브리어의 '네데르'( )가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구두로 약속드린 어떤 것'을 말합니다. 즉 이행하겠다고 맹세하거나(창 28:20), 제물을 바치겠다고 맹세하거나(레 27장), 어떤 일을 삼가 하겠다고 맹세하는 행동(시 132:2) 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② 히브리어의 '앗사르'( )가 있습니다.

이 말은 서원의 더 넓은 범주의 일부로 '맹세와 저주의 일반적인 발언을 나타내며 "~에 속박되다.", "결합되다."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위해 자발적으로 하는 서원을 말합니다.

이상과 같이 서원은 하나님 앞에 하는 자발적 언약 또는 맹세였습니다. 그러므로 서원은 항상 하나님에게 드려지는 것이지 결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약속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드시 사람이 하나님과 서원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서원은 주로 자원해서 하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교환조건으로 사용하였습니다(창 28:16-22, 삼상 1:11).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특별한 은혜를 받고자 간절히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특별한 은혜를 주시는 날에는 자기는 그 주신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고 그 은혜를 선용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서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좀 더 가까이 사는 자가 되기 위하여, 어떤 특정한 일을 한다고 하거나 또는 자기를 제어하는 생활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서약하는 것을 서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원은 특별한 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다음에 자기의 약속으로 드리는 것이므로 당연히 주신 바 그 큰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써 어떤 일정한 일을 자기가 행하여 주께 드리겠다고 서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응답하는 기도에 찬양하여 서원하는 감사 제물의 일종이며, 경건한 열심과 헌신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원 자는 이러한 서약에 자기를 매어 놓아 제한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어떤 상태로 제한하겠다든지, 자기가 어떤 어려운 일을 하겠다든지, 자기가 무엇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겠다든지, 이런 서원을 하나님께 향하여 행한 약속인 까닭에 경솔히 서원을 해서는 안되며, 만약 그 입으로 선언하였으면 반드시 그대로 약속한 것을 지켜야 합니다.

2) 서원의 대상 및 규례가 있는데

서원의 대상은 소유물(창 28:20-22)이나 사람이 되기도 하며(레 27:2, 민 6:2, 삼상 1:11, 잠 31:2), 생축이나(레 27:9) 땅(레 27:16-25), 가옥(레 27:14-15)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의 것이 된 것은 제외되었습니다. 레위기 27:26에 "오직 생축의 첫 새끼는 여호와께 돌릴 첫 새끼와 우양을 물론하고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구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께 가증한 것(신 23:8)도 제외되었습니다. 즉 남자나 여자 창기의 소득 같은 것들을 말합니다. 이 외에는 거의 어떠한 것들로도 서원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서원할 수 있으며, 또는 타자 즉 부모에 의해 서원될 수 있었습니다.

남자나 여자 모두 서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제도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자가 서원한 것은 다소 제약을 받았습니다.

민수기 30:3-5절에 "또 여자가 만일 어려서 그 아비 집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 서원한 일이나 스스로 제어하려 한 일이 있다 하자 그 아비가 그의 서원이나 그 마음에 제어하려는 서약을 듣고도 그에게 아무 말이 없으면 그 모든 서원을 행할 것이요,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을 지킬 것이니라. 그러나 그 아비가 그것을 듣는 날에 허락지 아니하면 그 서원과 마음을 제어하려던 서약이 이루지 못할 것이니 그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였은즉 여호와께서 사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30:6-8절에서는 "또 혹시 남편을 맞을 때에 서원이나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을 경솔히 그 입에서 발하였다 하자 그 남편이 그것을 듣고 그 듣는 날에 그에게 아무 말이 없으면 그 서원을 행할 것이요,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을 지킬 것이니라. 그러나 그 남편이 그것을 듣는 날에 허락지 아니하면 그 서원과 마음을 제어하려고 경솔히 입술에서 발한 서약이 무효될 것이니 여호와께서 그 여자를 사하시리라."

계속해서 13절에서도 "무릇 서원과 무릇 마음을 괴롭게 하려는 서약은 그 남편이 그것을 지키게도 할 수 있고 무효케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율례니 남편이 아내에게, 아비가 자기 집에 있는 유년 여자에게 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민 30:16)

서원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전(시 50:14)이나 혹은 받은 후(시 116:17-18)에 약정하는 헌신과 사랑의 행위로 직무 이상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교도의 사상과 같이 제물을 받거나 시중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서원에는 즐거움(나 1:5)과 노래(시 61:8)가 수반되었으며 서원 예물 드리는 자의 마음에 악을 품지 않으면 그 서원은 열납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은 신속히 갚아야 합니다. 서원 갚기를 더디하는 것은 죄라고 성경은 규정하고 있습니다.(신 23:21)

서원한 것은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반드시 다 실천해야 하며, 서원의 예물은 흠없는 온전한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레 22:21, 말 1:14)

그러므로 경솔히 하지 말며, 남용하지 말 것이며, 창기 또는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서원물로 바치지 못하며, 부녀의 서원은 남편이나 아비의 결정에 따라 이행 여부가 결정됩니다.

이상과 같이 서원에 대한 성경의 실 예를 살펴보았습니다.

과연 사사 입다의 서원이 이에 근거를 둔 합당한 서원이었느냐? 아니면 지나친 열심에서 나온 무분별한 인위적인 서원이었느냐? 하는 것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우리 주위에서도 이러한 무분별한 서원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동의 없이 성별된 사람으로 즉 주의 종으로 바치겠다고 서원 함으로 부모와 자녀가 갈등을 느끼며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특히 미혼녀 가운데 "저는 결혼하지 아니하고 처녀로 살겠습니다."하고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남발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도가 오히려 올무가 되어 괴로워하고 고민하는 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자신을 서원한 자나 서원된 자는 그의 실질적인 봉사에 맞먹는 동등한 대가를 하나님께 지불함으로써 구속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유롭게 되어 자기 자신의 생활에 종사할 수 있었습니다.

레위기 27장 서원에 관한 율법이 있습니다. 레 27: 2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지니"라고 하였는데

5세-20세는 남자의 경우 은 20세겔, 여자의 경우는 은 3세겔
20세-60세는 남자의 경우 은 50세겔, 여자의 경우는 은 30세겔??
60세 이상은 남자의 경우 은 15세겔, 여자의 경우에는 은 10세겔에 해당되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입다는 당시 율법을 무시하고 여호와께 서원하기를 '하나님이 암몬 자신을 자신에게 붙이시면 승리하고 돌아올 때 누구든 자신의 집 문에서 가장 먼저 나와서 자기를 영접하는 자를 번제로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사사 입다의 서원과 그 실천은 비극적이었으며, 그의 서원은 조급하고 무분별한 서원이었습니다.

따라합시다. "성경을 모르면 남의 다리 긁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입다의 서원은 사람을 번제물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물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제물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입다가 그 서원 이행에 있어서 슬퍼하고 낙담했었기 때문에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율법을 떠나 이방 종교가 행하던 당시의 잘못된 신앙을 수입한 입다의 불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확실히 보여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다가 자기의 서원을 하나님께 이행했다는 점으로 보아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던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입다의 열심 있는 헌신은 신앙적인 열심이 아니라 '감정적인 열심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지나친 열심이 있지만 감정적인 신앙에 치우칠 때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반역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말씀에 근거한 서원을 통하여 신앙생활, 경건에 큰 유익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갖가지 문제가 있습니까? 난제가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여러분에게 있다면, 결단하고 기도하십시오. 더 나아가 올바른 신앙에 근거하여 서원하며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나 서원하기 전 무분별하게 감정적 열심만 가지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소원을 말하기 전 깊이 생각한 후에 작정하십시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신속히 갚아야 하며, 즐거움과 노래가 수반되어야 하나님이 받으실 줄 믿습니다. 왜 입다는 남의 다리 긁었습니까?

4. '생명에 대한 존중심'이 없었습니다.

본문 31절에 "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고 한 내용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제사법에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라.'는 규례가 없음은 물론이고, 그것은 하나님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가증한 일이며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엄히 금지된 일이었습니다(레18:21, 신12:31).

물론 31절에 "번제"(* )는 반드시 불에 태워서 바치는 제물만을 의미하지 않고, 여기서는 그저 바쳐 올리 우는 제물(ascending offering)을 의미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그 때에 입다가 암몬을 대적하면서 하나님의 성품과 그가 원하시는 바에 대한 입다의 치명적인 무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번제물로 바치는 것은 이방족속들이 우상숭배 때 사용하는 관행을 좇는 비 신앙적 행동>이었습니다. 사람을 태워 바치는 제물로 사용하는 것은 율법에 엄금되었습니다(레 18:21, 신 12:31, 18:10).

당시 암몬 족속이 몰록 우상(혹은 "밀곰"이라고도 함, 왕상 11:5,33)을 섬겼는데(왕상 11:7), 저희 자녀를 불살라 그 우상에게 바치는 악한 미신(迷信)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극심한 우상숭배 때문에 겪은 이스라엘 민족의 불행을 해결하려는 싸움에 나가면서 다시 우상숭배의 관행을 끌어들이는 남의 다리 긁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서원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에게 요구할 수 있는 공로가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삶은 하나님에게 붙들려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인도되어지는 것이 인간의 삶이며 인생인데도 불구하고 인간 편에서 '이렇게 해주시면 이렇게 해 주셔야 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인생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어지는 것으로 된다고 여기는 잘못된 신앙의 기준을 가졌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서 '하늘로도 땅으로도 예루살렘으로도 심지어 우리들의 머리를 가지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머리털을 희게 하고 검게 하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소관이지 인간의 소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관이라면 감히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조건을 제시하고 거기에다가 온 천하보다 귀한 사람의 목숨을 번제로 제사를 드리겠다는 어리석고 잘못된 맹세를 하겠습니까?

본문 34절에 보면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그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고 말합니다. 비록 딸이 둘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아비로서는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더군다나 무남독녀 외딸이라면 입다로서는 무척 사랑하는 딸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입다의 마음은 35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하여금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는 구절을 보면 자신이 딸이 마중을 나오는 것을 본 입다의 심정이 어떠했는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서원으로 인해서 결국 딸이 죽게 된 것을 생각할 때 어찌 참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입다의 딸은 입다의 불신앙으로 인해서 애매하게 죽게 된 것입니다.

또한 본문 37절에 보면 "아비에게 또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용납하소서. 내가 나의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고 말합니다. 입다의 딸이 <자신이 처녀로 죽어야 하는 것에 대해서 두 달 동안이 산에서 애곡하겠다.>는 것은 입다의 딸의 괴로움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37절 하반과 38절 하반절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란 말(* )은, 실상 "나의 처녀 됨을 인하여"라고 번역되어야 하며, 또 39절 하반절의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고한 말(* )은, "그녀가 남자를 알지 못하니라."라고 번역되어야합니다.

그렇다면 그녀가 하나님께 "올려 바침" 이 되었다는 것은 31절의 "번제"라고 번역된 것은, "그녀가 평생도록 결혼하지 못하고 성막에서 수종을 드는 여인이 된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출 38:8참조). 특히 중세 대(15세기) 이전에는 '입다의 서원 실행이 그 딸을 죽여서 번제로 드린 것이다.'라고 해석하였으나, 중세 대 이후에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다만 '그녀로 하여금 평생도록 성막에서 봉사하도록 처녀로 바쳐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입다가 그렇게 원통해 한 것이나 입다의 딸이 친구들과 두 달 동안 애곡한 내용이나 죽은 후 '매년 나흘씩 울었다.'는 기사를 통해서 보면 저는 죽었다고 확신합니다. 특히 델리취(Delitzsch)는 여기 이른 바 "애곡하더라."란 말의 히브리어(* )를 "찬송하더라."라고 번역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입다의 딸이 죽은 것이 틀림이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입다의 딸이 운 것은 결혼을 못한 채 죽어야 하는 것에 대한 원통함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입다의 딸의 괴로움은 깨끗한 자신이 아버지의 죄로 인해서 죽어야 하는 괴로움'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입다에게 암몬 자손을 붙이신 것은, <입다의 불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역사하신 사건>임을 알 수 있고, <남의 생명을 경시하다가 결국 자신의 딸의 생명을 해하는 남의 다리 긁는 짓>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한 영혼을 온 천하보다 귀히 여기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결론을 맺으려고 합니다.

결국 본문의 중심은 남의 다라나 긁고, 잘못된 신앙을 가진 입다가 아닙니다. 입다의 승리가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입다로 인해서 애매하게 희생한 '입다의 딸'이 올바른 신앙의 중심임을 알려 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매년 입다의 딸을 위해서 애곡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자가 무엇을 중심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해주는 교훈입니다. 나의 삶의 중심이 입다의 딸과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희생하고자하는 신앙의 자세,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고자 하는 헌신과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신자는 자신의 일이 잘된 것으로 인해서 즐거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에서 살 때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삶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기쁨만을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할 일에만 감사하게 되고, 항상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할 일에 대해서만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허물과 죄 대문에 십자가를 지시고 죽어주신 십자가의 사랑을 새롭게 깨달으시고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살아가는 삶이되시기 바랍니다. 나로 인해서 희생하신 분이 있음을 알고 그분으로 인해서 애통해 하고 자신에 대해서 참담해한 경험이 있는 자만이 십자가에서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기쁨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는 말씀 앞에서 성령의 감동 앞에서 순종하는 결단으로 사명을 감당하시기 바라며, 입다의 딸과 같은 하나님의 소원을 실천하는데 자신을 드리는 헌신으로 참된 헌신자, 십자가의 은혜를 말하고 살아가는 한 알의 밀알로 헌신하시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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