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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반석 위에 세운 집 (마 7: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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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 위에 세운 집 / 마태복음 7:24~29

옛날에 동경에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일입니다. 모든 건물들이 다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빌딩 하나는 아무 손해가 없이 그대로 보존되었습니다. 그 빌딩은 라이트 씨라고 하는 미국인이 건축한 빌딩이었는데 그는 언젠가는 동경에 대지진이 올 것이라고 예측하고 그것에 대비해서 아주 튼튼한 기초를 놓아서 건축한 빌딩이었습니다. 처음 빌딩을 짓을 때 그 건축 과정을 보고 많은 사람이 비난을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불필요한 경비를 그렇게 많이 들여서 필요 이상의 기초 공사를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대지진으로 인해 이 건축가는 큰 명성이 쌓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살아오면서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건축 지식을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이런 방면에 피해가 하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이 부분에 상당한 경험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날림 공사’라고 하는 말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특별히 지나간 1990년대에 대한민국 전체가 불안했습니다. 사방에서 뭐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다리도 무너지고 백화점도 무너지고 집도 무너졌습니다. 어느 건축가가 발표했습니다. 앞으로 아파트 공사한 것도 더 무너질 건물들이 많으니까 우리가 여기에 대비해야 된다고 신문에 발표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 오래된 아파트는 재개발법으로 헐고 다시 짓는 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건축 예화로 반석과 모래를 비교해서 알아듣기 쉬운 설교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캘리포니아에서 오래 살았는데 지형적 특징이 해변이 많습니다. 끝이 없는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어 자연히 바닷가에서 여러 가지 축제가 많이 열립니다. 그 중에 하나는 모래성을 쌓는 대회를 하는데 사람들이 수만 명씩 나와서 구경합니다. 모래를 가지고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드는데 어떤 사람은 짐승의 모양을 만들기도 하고 성 모양을 만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꽃을 만들기도 하고 물고기를 만들기도 하고 끝없는 바닷가에 자기가 좋아하고 자신 있는 형상으로 모래성을 쌓아서 끝없이 만들어놓는데 너무너무 아름답고 보기 좋고 큰 축제입니다.

저도 여러 번 가봤는데 어떻게 모래를 가지고 그렇게 똑같이 만들어놓는지 고래를 만들어놓은 것을 보았는데 금방 헤엄쳐 나갈 것처럼 예술적으로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쁘게 잘 만들어놓았다고 해도 파도가 한번 와서 쓸고 지나가면 흔적도 없이 다 사라지고 맙니다. 모래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 그 재료가 돌멩이였다면 파도가 백번이 아니라 천 번이 쳐도 형태를 그대로 보존할 텐데, 모래로 쌓았기 때문에 만약 이것을 만드는 도중 비라도 한줄기 쏟아져도 다 망가지고 부서집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라도 구절이 나오는데 창수는 고였던 물이 별안간 터져 나오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면 반석 위에 지은 집이라고 했던 이 반석의 뜻을 먼저 우리가 살펴보겠습니다. 신구약 성경에는 반석이라는 단어가 아주 많이 등장합니다. 또 그 반석의 뜻이 무엇인지도 성경 자체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석이라 함은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이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여 집을 건축하는 자를 지혜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구약 성경 가운데 나타나는 반석과 하나님의 관계는 수없이 많이 나오는데 특별히 시편에서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시편 18편 2절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편 19편 14절로 보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술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또 시편 31편 3절을 보면 “주는 나는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시편 42편 9절에 보면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시편 144편 1절에 “나의 반석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이렇게 수없이 많은 성경구절로 반석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성전 건물이 모리아 산에 황금빛 돔으로 건축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제사 지내던 자리로 이곳을 중심해서 성전을 지은 것입니다. 건물 안에 뭐가 있는지 사람들이 궁금해서 모두 다 들어가 봅니다. 커다란 반석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그 반석이 곧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신약에 나타난 반석의 의미,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여기서 말한 반석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곧 예수를 말합니다. 바울 서신에 나타난 반석의 의미는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이것은 구약 출애굽기 17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사막에서 목이 말라 죽을 뻔 했습니다. 그때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하고 원망했을 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내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어디서 내가 물을 가져다가 이 많은 백성에게 먹이겠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얼마 안 있어 내게 돌질 하겠나이다.” 심각한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네가 가지고 있는 그 지팡이로 네 앞에 있는 반석을 치라.” 쳤더니 거기서 물이 쏟아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갈증을 면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다 갈증을 면했습니다. 그런데 이 출애굽 사건을 바울 시대에 와서 해석하기를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니라.”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에 반영된 반석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반석 위에 집을 건축한다는 의미는 구체적으로 우리 삶에 어떤 반영이 가능한 것인가? 몇 가지 길이 주어져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특별히 산상보훈의 마지막 결론부분으로 큰 의미가 부여됩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계속해서 예수님이 설교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산상보훈의 복음을 총정리 하는 결론 부분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몇 가지 해석이 나옵니다. 교회의 기초는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설교를 하실 때 주신 깊은 주의사항이 있었습니다. 적그리스도의 출현입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면서 너희를 미혹케 하리라.” 이것이 현실적으로 나타나서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종교적 혼란을 가져왔는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는 생각하지 말고 우리 대한민국만 보아도 이 문제가 얼마나 신앙에 손해를 끼쳤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 이단 문제 연구를 가장 열심히 하는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교회에 가서 부흥회를 하고 왔습니다. 이단에 대해서 이분보다 더 많이 알고 더 열심히 수고하시는 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흥회에 가서 들은 말인데 지금 한국에는 이단성 교주가 60명이 넘는답니다. 이 교주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그리스도화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기독론이라고 하는 것을 공부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공부하는 과목입니다. 기독교는 나사렛 예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예수 외에 어떤 누구도 메시야로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교주가 있는 모든 공동체는 그 모임이 비록 교회 간판을 걸고 기독교 간판을 걸었다고 하여도 소용없습니다.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기서 반석이란 바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십자가에 달린 그분 그 외에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에베소에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교회는 그의 몸이라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8절에 “교회의 근본은 예수 그리스도”라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쉽게 생각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어떤 이름을 갖다놓는 집단은 모두 다 이단으로 정리하시면 아주 간단합니다. 이단성 교주들이 이름도 다양하게 붙여 우리를 유혹합니다. 참 아버지, 진리의 어머니, 새벽 별, 우레의 아들, 땅의 어머니, 하나님의 둘째 아들, 어린 종, 마지막 종, 대천부님, 구천상제, 심판주, 여호와이레천부, 감람나무 등 60가지를 다 말하려면 시간이 없으니까 여기서 그치겠습니다. 이런 것들은 그 당시에는 뭐가 되는 것 같지만 모래 위에 집을 건축한 것이라서 비가 나고 창수가 나면 소리 없이 다 사라지는 것이 기독교 2000년의 역사였습니다.

그 다음에 신앙생활의 기초도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예수를 믿고 살아갑니다. 이 과정을 신앙생활이라고 표현합니다. 신앙생활을 예수 믿는데 두지 않으면 비가 오고 창수가 날 때 다 무너지고 맙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문학적 표현의 질문으로 설교하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려고 갔느냐? 그런 사람을 보려면 다른 데 가야된다. 왕궁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이 말씀을 해석해봅시다. “너희가 무엇을 얻으려고 교회에 왔느냐?” 이것입니다.

교회는 본질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그 본질적 가치를 떠나서 다른 것에 초점을 맞추면 비가 오고 창수가 날 때 다 없어지고 맙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나오는 것은 다른 목적이 하나도 없습니다. 영혼의 요청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만나서 그 복음의 능력으로 삶의 풍성함을 누리고 내게 주시는 구원의 은총과 사명적 순례를 가기 위해 우리가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매우 다양합니다. 오랜 목회생활을 하면서 제가 겪었던 사건만 해도 수없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제가 이 교회에 찾아온 것은 사실 이런, 이런 바램이 있어서입니다. 목사님이 이것을 위해 저를 좀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목적을 저에게 말씀하십니다. “어휴! 저는 그 것을 들어드릴 수도 없고 들어드려도 안됩니다. 그것은 복음의 정신이 아닙니다. 그런 목적을 가지고 어느 교회든 찾아다니고 하지 마십시오. 실망스럽겠지만 제가 확실하게 답변하는 것입니다. 조금도 다른 목적을 가지고 그렇게 요청하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이권을 제안하는 때도 있습니다. “목사님, 이렇게 해주시면 제가 10퍼센트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십시오.” “목사를 망치려면 그런 제안을 하십시오. 당신은 이 교회 오지 마시고 그런 제안도 하지 마십시오. 어디 가셔도 그러지 마세요.” 이렇게 목적이 따른 교회 출석은 바람이 불고 비가 나고 창수가 나면 다 무너져 버리고 없어집니다. 주님을 찾아오는 것은 주님을 위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다른 목적으로 하면 다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미국의 이민자 목사님 가운데는 이런 예화가 하나 생겼습니다. 목사님이 이민 가서 목회를 하다 보니까 잘 안 된다 말입니다. 이민자들은 스트레스가 많고 안되는 게 많지 않습니까? 한국에서는 그래도 괜찮게 나가던 사람이 공항에 내리자마자 금방 무식한 사람이 되어버리니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습니까? 그래서 이민 사회의 교회가 좀 어지러워지고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민자들을 위한 훌륭한 목회를 내가 할 수 있을까?’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발한 아이디어가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할 필요 없이 나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면 그것이 이민자다.’ 맞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기 마음을 살펴보니까 이민을 와서 사는 게 참 재미없단 말입니다.

한국에서는 그래도 친구들도 만나도 길만 걸어가도 행복하고 쳐다만 봐도 재미있었는데 이민 오니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단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재미있는 교회를 하자.’ 이것이 목회 철학으로 정해 졌습니다. ‘이민 생활은 날마다 짜증나고 쫓기고 스트레스 받고 좌절감, 실패감, 그래서 가정마다 이혼을 많이 하게 되고…. 이거, 안되겠다. 이걸 치료할 수 있는 길은 아주 재미있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다.’

얼마나 아이디어가 좋습니까? 그래서 교인들은 와서 재미있다고 느끼고 갈 수 있도록 주일마다, 계절마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연구해서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교인은 점점 안 나오는 겁니다. 나오던 교인들도 안 나오는 겁니다. “뭐 이런 교회가 다 있어?” 하면서 안 나오는 겁니다. ‘이상하다! 재미있어서 많이 나올 것 같은데…….’ 어떤 때는 교회에서 회의를 하는데도 목사님은 재미에다 철학을 맞췄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에서 회의를 할 때 커피만 마시면 점점 정신이 말똥말똥해져서 싸움만 한다. 우리 맥주를 마시도록 하자!” 재미있게 하느라고 맥주를 박스로 갖다 놓고 회의를 했습니다. 나중에는 교인이 다 없어지고 8명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래도 목사님은 그 생각을 버릴 수가 없어서 주일 예배 간단히 보고 8명 데리고 할 것이 없어 사택에 데려가서 “사치기 사치기 사뽀뽀”를 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끝이랍니다.

비가 오거나 창수가 날 때 교회 오는 목적이 본질적 가치에서 벗어나면 그런 것은 다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제 믿음으로는 교회는 교인들이 오히려 십자가를 져야 하고 지어주어야 합니다. 다소 싫어하면서도 십자가를 지고 가는 믿음의 정열이 있을 때 거룩한 목표를 향해 교인들이 뜨거운 마음을 열려 거기에 혼신으로 몸을 바치고, 그런 교회로 사람이 오는 것이지 재미있는 데다 철학을 둔다면 교회에 와서 무슨 재미를 느끼려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몸을 바치는 길이요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교회는 그래야 한다. 본질적 모습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저는 세미나를 늘 그렇게 합니다. 지금 우리 갈보리교회도 교회 안팎에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다 십자가를 번쩍번쩍하게 메달아 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주께서 나를 위해서 저 고통의 십자가를 지셨으므로 나도 주님을 위하여 내가 줄 수 있는 십자가를 지겠다는 마음의 각오를 항상 새롭게 하기 위해서 걸어놓은 십자가입니다. 주님 말씀 반석 위에 집을 건축해야만,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교회 본질적 모습에 충성할 때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상에 있는 모든 공동체도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닐 때 영원하지 않고 다 무너집니다. 우리가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말합니다. 가족 관계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피차가 다 하나님의 자녀와 형상이라고 하는 관계 속에서 가족을 바라보지 않으면 오히려 만남이 괴로울 뿐인 사람이 더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경제 능력이 결혼의 조건이 되었다면 그 가정은 경제 능력에 비가 오고 창수가 터지는 날 무너져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얼굴이 조건이 되었다면 늙으면 창수가 터져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현대 사회는 무너진 가정이 훨씬 더 많은 겁니다.

제가 처음으로 휴스턴에 목회하러 갔을 때 제가 빌려서 예배드리는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나를 데리고 유명한 몇 곳을 관광시켜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집 앞에 가서 차를 세우고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집을 바라보세요.” 어마어마한 저택이었습니다. “이 집은 석유 부자로 텍사스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의 집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도깨비 집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안 들어가고 이렇게 구경할 뿐입니다. 사람이 한명도 못삽니다. 이 석유 재벌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떤 삶의 가치를 가르쳤느냐 하면 어떻게 하면 재벌 가문을 유지하느냐에 대해 철저한 교육을 시켰다고 합니다. 삶의 가치를 많은 재산을 유지하는 것에다 두고서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어느 날 이 재벌은 집안에서 피살당해 죽었습니다. 수사관들이 도저히 밝혀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휴스톤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철저히 믿고 있는 것은 아들이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이 집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터지니까, 누구다 쳐다보며 살고 싶어 했던 저택이 흉가로 변해 집안이 다 망하고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모래 위에 건축했기 때문에 무너짐이 심하리라.” 내 삶의 기초는 무엇이며, 교회의 기초는 무엇이며, 국가 공동체와 인류의 기초는 무엇인가에 따라 번영하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국가 공동체에서 삶의 철학이나 생활의 우선권의 가치를 어디에 두었느냐에 따라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영원한 튼튼한 반석이 되고 그렇지 아니한 것이 결정됩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에 나타난 대표적 하나님의 심판 역사를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었을 때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로 심판하시니 무너졌습니다. 인간의 힘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배반하여 힘의 건축을 했을 때 하나님은 인간 힘의 상징인 바벨탑을 치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을 잊어버리고 향락의 건축을 쌓았을 때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치셨습니다. 이 세상도 똑같습니다.

누가 로마가 망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누가 징기스칸이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알렉산더가 멸망할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습니까? 다 무너졌습니다.

20세기의 역사를 보면 공산당은 칼 막스의 철학을 복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복음이다. 계급을 없애고 평등하게 살며 먹고 사는 것을 똑같이 만들자. 얼마나 훌륭한 구호인가? 그래서 지금까지 이 세상을 지배해 왔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내쫒자!” 그래서 공산당들이 교회를 내 쫓고 칼 막스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여서 건설한 것이 사회주의 국가들이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칼 막스가 말한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전한 복음은 정 반대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평등하게 만들자. 이것이 유토피아다.” 예수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지 말라.” “그러면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너에게 더하실 것이다.” 정반대의 철학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세상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칼 막스의 철학을 따라간 사회주의 국가는 다 망했습니다.

우리와 가까운 북한을 생각해 보세요. 남한은 현재 5만개의 교회가 존재하고 있는데 북한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내쫓았습니다. 일부러 내쫓은 겁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가장 훌륭하게 해결한다고 말했던 사회주의 국가가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가장 어렵게 만드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북한의 GNP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지금 2만 달러를 넘어간다고 말하고 있는데 북한의 GNP는 천이 안 됩니다. 16분의 1, 20분의 1이 되어 버렸습니다.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하지 말라.” 다 주신 겁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렇게 살면 이 모든 것을 더해주실 것이다.” 다녀 보세요.

전 세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초로 국가 이데올로기를 삼은 나라는 다 잘삽니다. 다 훌륭합니다. “잘 짓고 잘 짓세 우리 집 잘 짓세 만세 반석 위에다 우리 집 잘 짓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류가 사는 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돌아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살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으라.”라고 했습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날 때 무너짐이 심할 것이다. 무너지지 아니하는 것은 기초를 반석 위에 놓는 곳이니라.” 그 기초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말씀입니다. 국가도 개인도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기초하면 영원하고 하나님의 축복이 오늘 약속되는 말씀입니다. 무너지지 아니하는 집을 건축하는 지혜로운 삶의 소유가 오늘 교회 나오신 여러분에게 축복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그 길을 걸었던 민족은 어떤 결과를 얻었으며 그 길을 배척했던 민족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우리가 현실을 보면서 잘 짓고 잘 지을 수 있는 만세 반석 위의 우리 집이 될 수 있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기초한 나 자신의 인생과 가정, 교회와 국가가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살고 싶은 자는 여호와를 찾으라. 이 말씀으로 돌아오라.”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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