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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목자 (시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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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목자 (시편 23:1) 

성경의 중간 부분에 위치한 시편은 여러 면에서 독특한 특성을 가졌습니다.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신약성경에 비해서 다소 거리감 있게 느껴지는데 비해서, 시편은 참 친숙한 느낌을 줍니다. 시편은 구약시대 때부터 성소에서 예배를 위해 읽혀졌기 때문에 그만큼 더 하나님께 대한 친숙함을 느끼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시편 1편이나 23편은 신약 성경의 어떤 부분보다도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친숙하고 좋아한다고 해서 그 만큼 더 잘 아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피상적으로 너무 자주 접하면서 오히려 그 깊은 맛을 알지 못한 채 지나칠 때가 많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시편은 약 2,500-3,500년 전에 기록 되었으나, 지금까지도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호소력이 있습니다. 모든 성경 말씀이 전인을 향하고 있지만, 특히 시편은 우리의 지성이나 의지와 함께 감성을 깊이 자극합니다. 시편에는 사람이 의식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이 묘사되어 있어서, 칼빈은 ‘영혼의 모든 부분을 분석한 책’이라 하였고, 루터는 시편에서 ‘모든 성도들의 마음을 들여다보았다’고 했습니다. 시편은 성도의 기쁨과 희망만 노래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도의 수치와 두려움도 표현합니다. 염려와 당혹감과 슬픔과 탄식과 절망이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심지어 분노와 의심과 원수에 대한 저주까지도 그대로 노출합니다. 인간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모든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서 성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시편을 읽으면 하나님은 물론이요 우리네 인생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게 되고 유독 감성적인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시편 23편은 시편 중에서도 ‘가장 달콤한 시’(스펄전)라고 불릴 만큼 목자와 양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1-3절까지는 그 관계가 너무나 아름다운 목가적인 풍경으로 묘사됩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1절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을 ‘목자’로 부르는 것은 히브리인들의 오랜 전통이었습니다. 아삽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목자”라 했습니다(시 80:1).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택한 백성을 다스릴 메시야나 지도자를 ‘목자’라 불렀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축복할 때 장차 오실 메시아를 “이스라엘의 반석이신 목자”(창 49:24)라 했고, 모세는 자신의 후계자를 세워서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민 27:17)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사야도 메시야의 통치를 내다보며 “그는 목자 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고 예언했습니다. 그래서 ‘목자’의 칭호는 양떼들을 능히 보호할 수 있는 능력과 자비로운 다스림의 이미지가 함께 있습니다. 능력만 있고 자비가 없으면 폭군이 되고, 자비만 있고 능력이 없으면 무능하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시편 23편에서 시인은 ‘이스라엘의 목자’ 하나님을 매우 친근하게 “나의 목자”라 부릅니다. 개인적인 친밀함이 ‘나의 목자’라는 호칭에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교회의 머리로서 성도 전체를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교회와 집단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지 않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과 관계를 맺고 계십니다. 그분은 ‘교회의 목자’이신 동시에 ‘나의 목자’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는 아주 중요합니다.

어린이 행사가 있는 곳에서 풍선을 파는 것을 보셨지요. 그 풍선들은 한 무더기처럼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풍선 전체가 한꺼번에 하나의 실에 묶여 있지 않고, 각각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약 개별적으로 묶여 있지 않다면 잠시 다른 풍선들 사이에 끼여 있을 수는 있겠지만 바람이 불 때 쉽게 날아가 버릴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개개의 양(성도)이 목자(주님)의 음성을 따르다보니 결과적으로 한 떼(한 몸인 교회)를 이루긴 했지만, 양은 저마다 각자 목자와 개별적인 관계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참 성도는 교회를 통해서 그분을 따르지만, 개별적으로 그분과 매우 친밀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개별적으로 주님과의 관계성이 있는 사람이라야 줄 없는 풍선처럼 잠시 끼여 있다가 날아가 버리는 일이 없습니다.

시인은 여호와 하나님을 개별적으로 ‘나의 목자’라고 부를 만큼 그분과 친근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고백을 합니다. 이 구절에서 미완료 시제가 사용되었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상태가 한 순간이 아니라 지속적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이시므로, 내게는 부족함이 없었고, 지금도 부족함이 없고, 앞으로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구약적 의미의 교회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했을 때, 그들을 40년 동안이나 메마르고 거친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긴 세월이 지난 후에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무엇이었을까요?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행함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가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였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신 2:7)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왜 부족함이 없었을까요? 어떤 목자든지 따르기만 하면 부족함이 없게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 목자라 불리는 많은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우준하여 여호와를 찾지 않는 목자로 인해 양떼가 흩어지기도 하였고(렘 10:21), 낙토를 황무지로 만드는 목자도 있었습니다(렘 12:10). 이로 인해 참 목자이신 여호와께서는 양 무리를 멸하며 흩는 목자에게 화를 선언하셨고(렘 23:1), 그런 목자들을 대적하여 양떼를 도로 찾겠다고 선포 하셨습니다(겔 34:10). 이 정도로 악한 목자는 아닐지라도 모든 사람에게 매 순간 부족함이 없도록 해주는 인간 목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람이 목자가 되어 인도할 때는 언제든 어떤 면에서든 결핍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를’ 나의 목자라 하는 시인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참으로 여호와를 나의 목자라고 전인격적으로 인정하는 그 사람에게만 부족함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성도에게도 세상살이는 녹녹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짐을 지기가 벅찰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수없이 고민하고 갈등하며, 한 순간 잘못된 판단으로 슬픔과 탄식에 빠지기도 합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혼란을 느끼며 방황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먹고 사느라 고생하고 자식 키우느라 뼈가 빠집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힘겨움으로 외롭기도 하고 홀로 눈물을 훔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에 성도에게는 목자가 계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롬 8:28)게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전능하시고 지혜로우신 그분의 섭리의 손길로 인도함을 받는 양은 그분의 위대하심 때문에 부족함이 없어집니다.

흔히들 고난을 직면할 때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는 말씀을 붙잡습니다. 이 때 고난의 삶 그 자체가 성도를 성숙하게 만들고 정금같이 빚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나를 아시고 나에게 맞도록 적절하게 단련하시기 때문에 정금 같이 나올 수 있습니다. 햇볕이나 비가 생물이 자라는데 꼭 필요하지만 그 양이 적절하게 조절되지 않으면 오히려 큰 재앙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적절히 제어하시지 않고 끊임없이 풀무질 속에 두신다면 금도 녹아버리고, 계속해서 두드려 맞게 하시면 쇠도 못쓰게 됩니다.

고난과 결핍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인데, 만물이 온전히 회복되기까지 그것은 계속 우리네 삶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 고난과 결핍이 끊임없이 계속된다면 신자도 견딜 수 없습니다. 가끔 초인적인 인내와 불굴의 의지를 보이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만, 대체로는 재정적인 부담이든, 육체적 부담이든, 정신적 부담이든 오랜 기간 지속되면 성도의 성품이 정금같이 연단되기는커녕 짓눌려버립니다. 성도 역시 험한 세상 살아남기 위해서 독종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성도가 불신자와 다른 것은 인생의 고난들을 적절하게 제어해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했습니다(고전 10:13). 예전에 위아래가 없어서 ‘저런 인간은 군대에 가서 엄청나게 고생해봐야 정신을 차릴 것’이라 생각되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군대에 면제되더니 곧바로 민방위에 편입되었습니다. 나중에서야 하나님께서는 그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주시지 않으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방법을 통해서 적절히 그 성품을 연단해 가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적절한 손길로 인해서 불신자에게는 생고생에 불과 환난조차도 성도에게는 감사꺼리로 변합니다. 환난 자체가 감사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적합하게 조절하셔서 오히려 나에게 약이 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지요.

부족함이 없다는 말은, 내 욕망을 다 채워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채워주면 해로울 욕망을 오히려 간과하심으로써 결과적으로 부족함 없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여호와께서 목자시라도 나는 늘 부족하고 쪼들립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목자 되심을 알고, 진정으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그분의 구체적인 손길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은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는 고백을 드릴 수 있게 됩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을 항상 생생한 현실로 느끼면서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환난 속에 있을 때는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평상시에는 둔감한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고민거리와 문제를 신속히 해결해주시지 않고 그냥 두기도 하시는 것이고, 아픔과 위기를 통해서 어떤 목자를 모시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고, 그 앎에 합당한 태도로 반응하며 살아가도록 주님의 손길이 작용합니다. 구체적으로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2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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