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자랑과 배설물 (빌 3:1-16)

  • 잡초 잡초
  • 244
  • 0

첨부 1



  혹시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올해 쉰 일 곱 입니다. 만으로 하면 쉰  여섯이지만 저는 한번도 제 나이를 만으로 이야기해 본적이 없습니다. 저는 쉰 일 곱이 좋습니다. 몇 년 전부터 은근히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쉰 일 곱부터 50대 말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빨리 60이 되고 70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 이런 마음이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나이 먹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건방지게 들릴 수 있겠지만, 혹은 철없는 말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제가 제 삶에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제 삶에 후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제가 흠 없는 완벽한 삶을 살았다는 뜻이 아니라 많은 흠과 부족이 있는 것을 감안할 때 도저히 제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젊어진다고 하여도, 그리고 그 동안 저질렀던 모든 실수를 만회하고 회복한다고 하여도 지금보다 더 좋은 삶을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저에게는 있기 때문입니다.

  탁월함이나 뛰어남은 저와는 상관이 없는 단어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래를 조금 남보다 잘 불렀고, 운동을 남보다 조금 더 잘 했기는 했지만 그냥 아마츄어 수준에서 그런 것이지 그것으로 제 인생을 찬란하게 꽃 피 울만큼은 아니었습니다. 공부는 초등학교 때 제일 잘 했을 때가 100명 중 11등 정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당시는 10등 안에 드는 것을 공부 잘 하는 것이라고 인정하던 때였는데 저는 한 번도 그 10등 안에 들어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는 소위 3류를 다녔습니다. 상업고등학교였습니다. 당시 상고는 실력이 뛰어난 아이들이 오는 학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에는 공부 못한다는 소리는 안 들었지만 상고에서는 웬만큼 공부를 잘 하지 않고는 대학진학이 어려웠습니다. 큰 욕심 부리지 않고 그냥 웬만한 대학을 간다고 생각했으면 혹시 갈 수는 있었겠지만 결론적으로 저는 실력 부족으로 대학진학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지극히 평범한, 아니 어떻게 보면 평균적으로 평범 이하의 삶을 살아온 제가 오늘 누리고 있는 삶은 모든 면에서 볼 때 평균 이상입니다. 저 자신만을 놓고 보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극상의 수준입니다.

  저는 제가 어떻게 이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압니다. 목사로서 상투적인 말처럼 들리시겠지만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가 혹시 남보다 조금이라도 잘한 것이 있다면, 정말 혹시라도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었다기 보다는 예수가 잘 믿어졌습니다. 남보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도 아니고, 남보다 성경을 더 많이 읽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 기준으로 보면 남보다 예수를 더 잘 믿었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예수가 잘 믿어졌습니다.

  어려서부터 설교를 들으며, 성경을 읽으며, 찬송을 부르며 제법 은혜라는 것을 많이 받았습니다. 통성기도도 할 줄 모르고, 아직 주여 삼창은 물론이고 할렐루야 소리 하나도 제대로 잘 못하는 사람이지만 제 나름대로의 은혜가 제법 제게도 많았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졌기 때문에 물론 실수할 때도 많았고, 죄를 지은 적도 물론 많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하는 마음이 원칙적으로 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냥 마음뿐이었는데도 하나님은 그 마음을 믿음으로 보시고 그 믿음위에 감당할 수 없는 복을 부어 주셨습니다.

  제가 받은 복을 다 나열할 수 없지만 두고두고 복이라고 여겨지는 제가 받은 대표적인 하나님의 복을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일 것입니다. 그냥 들으시면 상투적인 말이지만 제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첫째는 죄 사함의 복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좀 잘 살아보려고 생각하였을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정말 정신을 차렸을 때 절망적이었던 것은 저의 죄였습니다. 공부 좀 잘 하지 못했던 것, 집안이 좀 가난했던 것은 정말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제게 정말 절망적이었다는 것은 제 삶의 그릇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과 삶을 담아내기에는 너무나도 더럽고 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저에게 죄 사함의 복음은 정말 복음 중의 복음이었습니다. 당연히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씀 중에 하나도 ‘허물의 사함을 얻고 죄의 가리 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 ‘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흰 눈 같이 될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가 되었습니다.

  둘째는 구원의 복입니다. 죄 사함의 결국은 구원입니다. 죄 사함의 목적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게 되었고, 죄인으로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상실하였던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기 때문에 죽어서만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물론 죽음 이후에 들어가게 될 하나님의 나라가 완벽한 하나님의 나라이지만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사람의 삶은 좀 불완전하지만 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삶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느끼게 되는 참 삶의 만족과 행복을 이 땅에서도 누릴 수 있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 구원 받은 삶을 통하여 누리는 삶의 만족과 행복은 세상 사람들이 세상에서 누리는 그 떤 만족과 행복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 하니이다.’(시4:7) 아멘.

  셋째, 지혜의 복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길과 진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요14:6) 그리고 시편 119편 105절에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살아보니 맞습니다. 다행히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져서 그 말씀을 따라 조금씩, 조금씩 따라 봤더니 오늘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비록 좁았지만 예수님 말씀대로 생명의 길이었음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세상의 똑똑한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하는 수를 볼 수 있었고, 그 하나님의 수로 세상과 인생의 바둑에서 패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세상적인 지식에는 비록 졸하였으나 하나님을 믿음 때문에 오히려 지혜로운 자가 되어 쉽게 풀지 못할 문제들을 하나 둘 풀면서 살게 되었으니 그 복 또한 세상의 그 어떤 복과 비교할 수 없는 뛰어나고 탁월한 복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넷째, 욕심이 줄어드는 복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정말 좋은 것 중에 하나는 쓸데없는 욕심이 아주 조금씩이기는 하지만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저도 돈이 좋지만 저보다 돈 많은 사람이 그렇게 부럽지는 않습니다. 저보다 돈 많은 사람이 부럽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여러분 아십니까? 지금보다 더 가난해져도 그런 소리 할 수 있느냐고 하실 수 있지만, 막상 그렇게 되면 달라질는지는 모르나 지금은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보입니다.

  인터넷 신문에 지난 주 제 설교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댓 글이 여럿 붙었는데 그 중 하나는 이런 글이었습니다. 제목이 ‘김동호 잘났다’이었는데 내용은 요약하면 내 연봉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과 나누고 산다면 나를 인정하고 내가 하는 말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제가 혼자 속으로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나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거의 5년 전부터 금전출납부를 쓰고 있는데 그 분이 제게 요구했던 기준은 아마 넘어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는 가난하지 않습니다. 저는 가난을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예수 믿으면서 받은 복 중에 하나는 돈에 목숨을 걸만큼 욕심을 부리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완전하지 않지만 돈을 조금씩이라도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것을 감히 꼽고 싶습니다. 저는 저를 키워주신 목사님의 사모님이 제게 해 주셨던 말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난 가난이 싫어. 그러나 무섭진 않아”

  돈에 대한 욕심이 조금이지만 줄어드니 자연스럽게 함께 없어지는 욕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리와 명예에 대한 욕심입니다. 어디 강사로 가면 강사소개를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사회 하시는 분이 가끔 제게 묻습니다. 뭐라고 소개를 할까요? 그러면 저는 늘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냥 높은 뜻 숭의교회 목사라고만 하시면 됩니다.’

  여러분 아마 잘 모르실겁니다만 재작년 저희 노회에서 부 노회장선거가 있었는데 제가 그 선거에서 떨어졌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자체가 교만하고 건방진 것입니다만 아마 제가 되려고 조금만 노력했다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떨어졌습니다. 저는 그것이 부끄럽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습니다. 부 노회장이 되었다면 나름대로 제 책임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되지 않았다고 힘들지도 부끄럽지도 않습니다. 이유는 일은 몰라도 자리는 별로 욕심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그냥 김동호라는 것이 좋기 때문에, 그 앞에 치장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노회장이라든가 총회장이라든가 이사장이라든가 회장이라는 것을 자기 치장으로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자랑한다면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 받은 복을 자랑하지 시시하게 내가 노회장이라고 총회장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제가 받은 은혜와 비교하면 게임도 되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와 같은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자랑을 배설물같이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저희 교회는 안수집사와 권사를 뽑는 선거를 합니다. 언젠가부터 교회 직분자 선거가 과열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의 직분이 명예가 되고 계급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직분이 자랑이 되기 시작하였고 그 직분을 받지 못하는 것이 수치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한국교회를 침몰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하나님께 우리 교회를 위하여 간절하게 드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직분을 명예로 생각하는 믿음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뽑히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입니다.

  저는 찬송가 102장이 좋습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  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 전에 즐기던 세상 일  도 주 사랑하는 맘 뺏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은 예수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사람들이 자랑으로 여기는 것을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는 그런 복을 받습니다. 그 복은 세상의 부귀와 영화와 명예와 쾌락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비교하면 배설물 밖에 안 되는 것들입니다.

  평생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 복을 받지 못해 아직도 세상 사람들처럼 배설물을 욕심내고 그것을 자랑하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참에 아예 정말 예수 믿는 일에 생명을 걸어 본문의 바울이 받았던 가장 고상한 복을 받아 세상의 모든 자랑과 욕심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이 땅에서도 천국을 누리며 자유하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예수를 잘 믿음으로 하늘의 복을 받아 세상의 모든 자랑이 배설물처럼 밖에는 보이지 않는 그런 엄청난 복을 받고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