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내 이름 아시지요? (사 49:14~17)

  • 잡초 잡초
  • 1021
  • 0

첨부 1


당황스러운 질문

어느 날 교회에서 만난 성도가 갑자기 제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제 이름 아시지요?" 저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아주 곤욕스럽습니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별로 안 좋아서 사람 이름을 잘 못 외우는데 이렇게 갑자기 물어보니 당황스러워 더 기억이 안 나게 됩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몰라도 목사가 성도 이름을 모른다고 하면 얼마나 미안합니까? 그러니 웬만하면 이런 갑작스러운 질문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주일 저녁예배 때 구역마다 나와서 특송을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교구를 담당하는 부목사도 함께 나갔습니다. 저도 제가 맡은 구역이 특송을 하게 되어 함께 나갔는데 그 때가 그 교회에 부임한 지 채 석 달도 안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담임목사님이 저에게 구역 식구들 이름을 소개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당연히 이름을 잘 몰라서 쩔쩔 맸고 더욱이 갑자기 그렇게 시키니 더 당황을 해서 구역장 이름이니 심지어 장로님 이름까지 기억이 안 나 애를 먹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정말 오랫동안 그 구역 식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고개도 못 들었지요.

이 일이 있고 난 후 저는 목사가 성도 이름을 잘 못 외운다는 것은 핑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요람 보며 열심히 이름을 외웠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담임목회를 하면서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하기 때문에 웬만하면 우리 교회 성도들과 새 가족들 이름까지 다 알지만 어떤 때는 갑자기 이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혹시 이런 일이 있더라도 "우리 목사님이 본디 이름을 잘 못 외워. 그리고 갑자기 생각이 안 날 수도 있지, 뭐" 하고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이렇게 기억력에 한계가 있고 정말 중요한 것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 우리 하나님은 그런 일이 없으시더군요. 하나님은 우리 이름을 절대 잊어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 이름을 절대 안 잊어버리실까요? 하나님이 유난히 기억력이 좋으시기 때문일까요? 아니요. 하나님께는 비결이 따로 있습니다.

손바닥에 새기신 하나님

그 비결은 바로 우리 이름을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 놓으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 16절에 나옵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이름과 모습을 자신의 손바닥에 새겨 놓으셨습니다. 저도 학교 다닐 때 꼭 가지고 와야 할 준비물이 있거나 꼭 외워야 할 내용이 있으면 손바닥에 볼펜으로 써놓곤 했습니다. 그러면 안 잊어버립니다. 그러니 하나님도 절대 잊으실 리 없지요. "아니? 세상에 예수 믿는 사람이 도대체 몇 십 억인데 그 이름을 하나님이 다 손바닥에 새겨 놓으셨다고?" 예, 그렇습니다.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새겨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 안 잊어버리십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를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이하준 목사는 덜 떨어져서 혹시 여러분 이름을 잊어버릴지 몰라도 하나님은 절대 안 잊으십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이 말씀이 나오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멸망당하고 머나먼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가 있습니다. 나라가 망한 것도 슬픈 일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셨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에만 계시고 이스라엘만 다스리시는 분이다. 따라서 우리가 멸망당하고 이렇게 먼 이방 땅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있으니 저 머나먼 이스라엘에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손길이 미치지도 않으실 것이고, 따라서 세월이 흐르면 우리를 잊으실 게다."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런 걱정이 오늘 본문 14절에 나옵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기서 시온이란 예루살렘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면 어떻게 하나? 하나님이 아마 나를 잊어버리셨을 거야." 하는 걱정을 했다는 말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은 생각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이 어느 특정한 곳에만 계시고 거기만 다스리는 분이 아니라 세상 만물을 창조하고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임을 잘 알지 않습니까? 하지만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로로 끌려와 제일 걱정된 것이 "하나님이 아마 우리를 잊으셨을 거야"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두려움을 다 이길 수 있는 아주 명쾌한 해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해답이 바로 "아니다. 하나님은 너희 이스라엘 백성 모두와 시온 성을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손바닥에 새겨 놓으셨기에 절대 잊으실 리 없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잊어도

하나님이 자기 성읍인 시온(예루살렘)을 잊어버리실 리 없다는 사실을 더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 이사야 선지자는 15절에서 어머니와 자식의 비유를 듭니다. 어머니가 자기 젖 먹는 자식을 잊을 수 있습니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내 자식인데 어떻게 잊어버립니까? 아무리 급해도, 아무리 힘든 일이 생겨도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내 자식만은 절대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 어머니입니다. 제가 전에 섬기던 교회에 약간 정신이 이상한 여자 분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 교인은 아닌데 늘 교회 주변에 어슬렁거리며 밥도 얻어먹고 교회당에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정신이 온전하지 않으니 하는 행동도 온전할 리 없습니다. 옷차림도 남루하고 씻지 않은 몸에서는 늘 지독한 악취가 났습니다. 말도 횡설수설하고 워낙 정신이 없다보니 자기 물건이나 교회에서 준 옷가지도 여기 저기 놓아두고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횡설수설을 하고 정신없는 행동을 해도 절대 잊어버리거나 놓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자기 품에 안은 아기였습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낳은 자식인지는 몰라도 그 여인의 품에는 아직 어린 아이가 하나 안겨 있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아이만은 내려놓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정신이 온전치 않은 어머니도 자기 자식을 잊어버리거나 놓치지 않는 것을 보면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어머니가 그 젖 먹는 자식을 절대 잊지 않고 자기 배로 낳은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지만 혹시 어머니는 자식을 잊어버리는 법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 잊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평양 장대현교회의 부흥사경회에서부터 일어난 것을 알고 계시지요? 그 이후에 이 부흥의 불길이 부흥회를 통해 평양전역과 전국으로 번져 나가는데 부흥회 때마다 성령이 뜨겁게 역사하시면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통회 자복하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고 부흥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앞 다투어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놀라운 일이 늘 벌어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부흥회 중에 한 여인이 나와 자신의 놀라운 죄를 고백하는데 전쟁 통에 간난아이를 업고 피난을 가다가 너무 굶주리고 지쳐 아이고 자기고 다 죽게 생겼더랍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자기 아이를 업은 채 나무에 부딪쳐 죽게 하고 자기만 피난해 도망쳐 나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충격적인 고백이었습니다. 여러분, 물론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지고지순하고 세상 그 어떤 사랑도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위대한 사랑입니다. 자식을 위해 한도 끝도 없이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어머니도 사람인지라 아주 가끔 한 번씩은 이런 무서운 일도 벌어지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저 살려고 자식을 희생시키는 일도 있고, 심지어 자식을 낳아 놓고 잊어버리는 일도 어쩌다 한 번씩은 있게 마련입니다. 남편을 잃고 재가하면서 자기 자식을 떼어놓고 가는 일도 제법 잊지 않습니까?

하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다 잊어버려도, 심지어 어머니가 자식을 잊더라도 하나님은 결코 자녀 된 우리를 잊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 그 어떤 사랑도, 심지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강하다는 어머니의 사랑조차 따라갈 수 없는 놀라운 사랑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도 이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명히 가르쳐주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이 그 어떤 어려움을 당할 때든지, 그 어떤 아픔을 겪을 때든지 늘 알고 계시며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결과는 무엇인가? 17절입니다.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 즉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지않아 빨리 걸어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요, 반대로 그들을 헐고 황폐하게 만든 원수들은 너를 떠나가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아시고 기억하시기에 언젠가 반드시 고난과 아픔을 딛고 일어서며 회복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를 치던 원수를 멸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하나님이 나를 잊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고 그 분의 도우심을 기다리라는 것이지요.

내 이름 아시죠?

우리도 가끔 이스라엘 백성들 같은 위기를 겪을 때가 있습니다. 육신이 병들고 지치면 마음도 따라서 약해집니다. 경제적으로 힘들거나 가정이 위태로우면 근심걱정에 사로잡혀 짐이 너무 무겁고 사는 것 자체가 힘이 듭니다. 그런데 이럴 때 원칙적으로는 믿음이 더 커져서 이런 시련을 이겨내야 하는데 어디 그게 쉬운 일입니까? 오히려 힘든 일이 생기면 내 마음과 영혼조차 힘들어지고 약해지니 내 속에 각종 근심 걱정 두려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생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면 이런 생각까지 들게 되는 것이지요. "혹시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나?" 게다가 이런 의심이 생길 때면 마귀사탄이 우리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입니다. "야, 너 같은 것을 하나님이 기억하실 리 있겠어? 세상에 예수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하나님도 얼마나 바쁘시겠어? 너 같이 하찮고 별 볼일 없는 인간까지 기억하고 보살필 만큼 하나님이 그렇게 한가한 분 아니야."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에 극심한 열등감이 생깁니다. "그래, 나 같은 것을 하나님이 기억하실 리 없지."

가끔 목회를 하다 보면 성도들에게 생긴 어려움을 나중에서야 알 때가 있습니다. 수술을 받았다든지 가정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목사인 제가 일 다 끝나고서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화해서 위로하며 묻습니다. "집사님, 성도님 왜 진작 말씀하시지 이제야 말씀하세요?" 그럴 때 이렇게 대답하는 분이 있습니다. "목사님 바쁘시잖아요? 안 그래도 바쁜 분인데 뭐 이런 것을 가지고 말씀드리나 싶어서 말 안 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런 말 들을 때가 가장 섭섭합니다. 제가 바쁜 것은 사실입니다. 목회자로서 해야 할 일도 많고 또 우리 교회 많은 성도들 다 보살피려니 정말 바쁩니다. 하지만 제가 성도의 아픔도 모르고 그냥 지나가야 할 정도로 바쁜 것은 아닙니다. 아니, 혹시 아무리 바쁘고 힘들다고 해도 성도에게 아픔이 생기면 당연히 달려가야 하고, 위로해야 합니다. 제가 당장 힘들어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왜? 그게 제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인 저도 그런데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그래요, 우리 하나님 바쁘십니다. 세상에 예수 믿는 사람이 몇 명인데 그 분들 기도 다 들어주랴, 다 보살피랴 정신없이 바쁘십니다. 하지만 아무리 바쁘셔도 내 문제를 안 들어주실 정도는 아닙니다. 하나님을 뭐로 보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그런 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 모두를 기억하시고 우리의 모든 작은 아픔과 신음도 다 들으십니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이런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런데도 "하나님이 날 모르실 거야, 내 사정 모르실 거야." 하는 것은 불신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무시합니까?

제가 미처 성도들의 문제를 챙기기 못할 때 이렇게 불평하는 분도 있습니다. "목사님이 내가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서 나를 이렇게 무시하나?" 저를 어떻게 보십니까? 제게는 모든 성도가 다 똑같이 귀합니다. 우리 장로님들 권사님들에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가 장로님 권사님은 더 소중히 여기고 평신도는 무시할 사람 아닙니다. 다 귀합니다. 다 똑같이 소중합니다. 제가 부자라고 권세 있다고 더 귀하게 여기고 힘없다고 가난하다고 무시하는 사람처럼 보입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인 저도 이러한데 하물며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여러분, 내가 힘들도 어려울 때 "내가 별 볼일 없어서 하나님이 나를 모르실 거야.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는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들거든 그것은 다 마귀 사탄의 음성입니다. "마귀야 물러나라." 명하고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쫒아내세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우리 하나님은요 우리를 정말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절대 안 잊어버리십니다. 우리의 모든 아픔과 문제를 다 아십니다. 나를 나 자신보다 더 잘 아십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바로의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해몽해줍니다. "당신이 꾼 꿈은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을 복직시킨다는 좋은 꿈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부탁합니다.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감옥에서 나가게 해 주세요."(창 40:14) 술 맡은 관원은 꼭 그러마 약속하고 과연 그 꿈 해몽대로 사흘 만에 복직이 됩니다. 하지만 복직된 관원은 요셉의 일을 까맣게 잊어버립니다(23절). 그럴 만도 한 것이 복직된 기쁨에 젖어 축하파티도 해야지요, 그동안 밀린 업무도 바쁘지요, 감옥에 있는 천한 노예인 요셉 따위를 기억할만한 눈곱만한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사람은 이렇습니다. 자기에게 도움 될 만한 사람이다 싶으면 뭐 간이라도 빼줄 듯 굉장하지만, 정작 자기에게 도움 안 될 별 볼일 없는 존재다 싶으면 금세라도 잊어버리는 것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술 맡은 관원은 요셉을 잊어버렸어도 하나님은 절대 안 잊어버리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나를 다 잊어버리고 남들은 보잘 것 없는 나를 다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내 이름 아시죠>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흘린 눈물을 그가 닦아 주셨죠.
  그는 내 아버지 난 그의 소유. 내가 어딜 가든지 날 떠나지 않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이 가사처럼 하나님은 나를 아십니다. 하나님은 내 이름을 아십니다. 나를 손바닥에 새겨두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나를 무시하고 세상 사람들은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나를 존귀히 여기시고 나를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은 내 모든 삶을 주관하십니다. 내 이름만 아시는 것이 아니라 내 모든 생각도 아시고 내 모든 사정을 아십니다. 내가 남몰래 흘렸던 눈물도 다 보셨고, 내가 남몰래 쉬었던 그 작은 한숨도 다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내 눈물 닦아주시고 내 한숨 쉴 일 사라지게 하시고 나를 회복시키며 나를 도우실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사람들은 저마다 세상에서 자기 이름 석 자를 남기고 싶어 합니다. 사람들이 내 이름을 기억해주기 바랍니다. 저도 이하준 목사라는 제 이름을 사람들이 기억해주기 바라는 욕심이 분명히 있습니다. 어쩌다가 유명한 사람이나 높은 분이 내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면 우리는 엄청나게 감격합니다. 높은 분과 악수했다고 손도 안 씻겠다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기억해주기 바라기보다 하나님이 내 이름 아시고 기억하심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멋지고 유명한 이름 석 자 남기기보다 하늘나라 생명책에 내 이름 기록됨을 기뻐하고 감격하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지금 현재 어려움을 겪는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아십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