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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뚝이 신앙 (마 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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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에서 살아난 당나귀 이야기>
어느 날 한 농부가 기르는 당나귀가 우물에 빠졌습니다.
당나귀가 울부짖고 난리가 났습니다.
농부는 잠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결심했습니다.
당나귀도 노쇠했고 우물도 오래되었기 때문에 우물을 메우기로 했습니다.
농부는 이웃 사람들을 불러서 우물을 메우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한 참 동안 우물 안에 흙을 채워 넣기 위해 삽질을 했습니다.
우물에 빠진 당나귀는 즉각적으로 자기에게
어떤 일이 닥치는지 알아채고서는 크게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용해졌습니다.
삽질을 하던 사람들이 이상해서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아, 글쎄, 사람들이 우물 속에 흙을 던져 넣을 때마다,
당나귀가 온 몸을 세차게 흔들어 그 흙을 툴툴 털어 버린 후
우물에 쌓인 흙 위에 한 발자국씩 올라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마을 사람들은 더 열심히 더 많은 흙을 당나귀에 뿌렸지만,
그럴수록 당나귀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자기 몸 위에
내려앉은 흙을 떨쳐 내면서 한 단계씩 자꾸만 위로 올라왔습니다.
얼마 후에 사람들은 대경실색(大驚失色)을 했습니다.
당나귀가 우물 가장자리까지 올라오더니만 밖으로 뛰쳐나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당나귀 이야기가 말하려고 하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불요불굴(不搖不屈)의,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삼키기 위해 수많은 삽질을 해댑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당나귀에게서 귀한 교훈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비난과 오해와 모략, 고난, 실패, 등등 온갖 종류의 흙들을 툴툴 털어 버린 뒤,
그 흙을 딛고 한 단계씩 위로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넘어져도 또 다시 일어나 도무지 포기를 모르는 것이 오뚝이입니다.
백 번을 쓰러지든, 천 번을 쓰러지든 일어서고 또 다시 일어서는 것이 오뚝이입니다.
그런데, 오뚝이 하면, 항상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권투 선수 홍수환씨지요.

1977년에 WBA(세계 권투협회) 주니어 페더급 챔피언 결정전이 있었습니다.
그 때 챔피언이 17전 17 KO승으로 승승장구하던 파나마의 카라스키야였습니다.
카라스키야는 비록 경량급이었지만 아무도 그를
대적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가공할만한 펀치의 소유자였습니다.
모든 도박사들이 10대 1정도로 카라스키야의 승리를 확신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경기가 시작된 후 홍수환 선수는 네 번씩이나 링 위에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다시 일어났습니다.
꼭 쓰러진 오뚝이가 저절로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네 번이나 다운을 당했던 홍수환씨가 이기고 말았습니다.
4전5기의 신화를 만들어 내는 순간이었지요.

<오뚝이 신앙인, 가나안 여인 이야기>
오늘 우리는 오뚝이처럼 결코 포기하지 않고 일어서고 또 일어서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오뚝이 신앙을 보여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가나안 여인의 오뚝이 신앙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과 국경지대인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그 당시의 거대한 페니키아의 항구도시로서 오늘날은 레바논에 속해 있습니다.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이었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을 만났습니다.
조상 적부터 이 곳에 터 잡고 살아온 이방 토착민이었지요.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이상한 점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선민 의식으로 가득찬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간해서 이방 지역에
들어가지 않는데 예수님께서 이곳에 들어가신 것이 이상합니다.
게다가 그 이방 지역에서 낯선 여인을 만났다는 것도 이상합니다.
그 당시는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아주 심해서 대낮에
남녀가 대화를 나눈다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가나안 여인이 먼저 예수님께 말을 걸어 온 것이 사실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요청에 대꾸를 하셨다는 것도 예사로운 일은 아닙니다.

자, 그런데 정말 이상하고 놀라운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평소에는 그토록 자상하고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너무나 가혹한 말을 내뱉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이 여인 사이에 오고간 대화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여인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귀신이 들려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한 때 유명한 연예인이었던 여성이 신이 들려 무당이 된 이야기를 TV로 본 적이 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 귀신이 들려 무병(巫病)을 앓고 굿을 하고
작두를 타는 모습을 볼 때 어느 부모인들 마음이 편하겠습니다.
"왜 이런 얄궂은 운명이 내 딸에게 닥친단 말인가!" 한탄할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비록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이요, 유대인들과는 상종을 하지 않는 처지였지만
자기 딸이 귀신이 들렸기 때문에 이 병을 고치고자 예수님께 나아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사람들과 수많은 환자들을 고치셨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예수님 일행을 보자마자 고함을 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나이다!"(22절).

그러나 이 소리를 들은 예수님의 태도가 평소와 너무 다릅니다.
마치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셨다는 듯이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가나안 여인 그 자체를 무시하신 것이지요!
물론 예수님도 유대인이었기에 이방 여인과 상종하지 않는다는
관습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남편이 다섯이나 되는 여인과
다정한 대화를 나누신 주님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여인의 안타까운 외침을 듣고서도 왜 침묵하셨을까요?
이 여인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유대인이 이방인과, 그것도 이방 여인과 상종하지 않는다는 불문율 때문에
대꾸를 하지 않으면 제풀에 지쳐서 저절로 떠날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랬을까요?
전후문맥을 보면 앞에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 여인이 계속해서 예수님 일행을 성가시게 하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선생님,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으니, 그를 안심시켜 떠나 보내주세요!"(23절)
여기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간청한 것은 이 여인의
처지에 대하여 어떤 동정심이나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방 지역에 들어왔기 때문에 빨리 이 골치 아픈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 좀 해주셔서 이 여인을 쫓아 보내달라는 요청이었지요.
귀찮고 성가셨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바로 이 때 예수님은 지나가는 소리로, 그러나 분명히
이 여인이 곁말로 듣도록 아주 냉담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24절을 보세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여러분,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관심은 오로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데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이방인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말씀이지요!

자, 이와 같이 냉담한 반응을 들은 가나안 여인이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대개 이처럼 차가운 반응을 접했을 때 사람들은
욕을 한다든지 저주를 퍼붓는다든지 하면서 그 자리를 떠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조금도 물러섬이 없습니다.
25절 말씀을 보세요.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이 여인은 너무도 차가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오히려 예수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을 비난하거나 따진 것이 아니라 아주 겸손하게
절까지 하면서 자기를 도와 달라고 간청했던 것이지요.
앞에서 말씀드린 당나귀나 오뚝이처럼 도무지 물러섬이 없습니다!

자, 그런데 이런 여인의 태도에 대해서 예수님은 정말 치명적인 말씀을 내뱉으셨습니다.
26절 말씀을 보세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기서 주님은 '떡'을 사이에다 두고 '자녀'와 '개'를 날카롭게 대조시킵니다. 
떡이라 함은 구원의 소식, 즉 하나님의 복음을 말합니다.
자녀라 함은 예수님의 동족인 유대 민족을 말하지요.
따라서 예수님이 구원하시려는 대상은 유대인이지 이방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이 먹어야 할 떡을 개와 같은 이방인에게 던져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가나안 여인이 개와 같이 비천한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개와 관련된 말은 언제나 욕설이나 얕잡아 보는 비속어가 대부분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상스러운 욕설은 모두 개와 관계가 되어있지요!
한 마디로 개는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비하하고
천대하고 상대하지 않겠다는, 경멸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자기 딸의 건강 문제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갔다가
이 여인은 졸지에 개와 같은 처지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머리끝까지 화가 났을 것입니다.
"안 도와주면 그만이지 이렇게까지 모욕을 줄 건 뭐란 말인가!"
아마 틀림없이 분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위대한 믿음과 재치의 진가는 바로 이 때부터 나타났습니다.

27절을 보세요.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얼마나 믿음과 재치가 뛰어난 말입니까?
"주님, 옳습니다.
하지만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제가 개가 되어도 좋습니다.
그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다 버린, 상 위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라도 좋으니 먹게 해주세요!"

예수님은 당연히 이 여인의 믿음에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떠보기 위하여 일부러 가혹한 말씀을 하셨는데
이 여인은 그 모든 장애물을 특유의 믿음과 뚝심으로 이겨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차갑게 대하면 차갑게 대할수록 더욱 더 간절한 자세로 주님께 나아갔던 것이지요!

이 여인의 믿음과 기지에 감탄하신 주님께서 마침내 28절에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이 여인의 위대한 믿음 때문에 귀신들려 고생하던 딸이 병고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여인이야말로 앞에서 말씀드린 당나귀처럼 흙삽질을 해댈수록 훌훌 털어 버렸습니다.
오뚝이처럼 넘어졌다가 일어서고 또 일어서서 마침내 승리했습니다.
예수님께 처음 나아갔을 때의 '무시와 무관심'→'제자들의 성가심'→
'예수님의 모욕적인 언사'를 차례로 이겨내고 자기의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오뚝이 신앙인이 되는 세 가지 비결>
여러분, 이 여인이 오뚝이 신앙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로, 목적 의식이 분명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목적 의식이 분명한 사람이 오뚝이처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에게 목적은 한 가지였습니다.
귀신 들린 자기 딸의 병을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이 한 가지 목적만 이루어질 수 있다면 어떤 수모나 굴욕도 참을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댓가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삶의 목표를 분명히 정해서 오뚝이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분명했기 때문에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 하나로 나아왔습니다.
유대인이 이방인과 상종하지 않는다는 관습도, 남녀가 대낮에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는 불문율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반드시 자기 딸을 고쳐주실 분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믿음 하나만 있으면 어떤 장애물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당나귀가 아무리 많은 흙을 뒤집어써도 훌훌 털어 버리고
그 흙 위에 다시 우뚝 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장애를 이길 수 있습니다!
오뚝이가 백 번을 쓰러지고 천 번을 쓰러지고 또 다시 쓰러져도
기어코 일어날 수 있듯이 여러분은 결코 쓰러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눈동자처럼 지켜주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손아귀 안에 있음을 믿으십시오!

셋째로, 딸을 사랑했기 때문에 어떤 장애물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
엄청난 고통을 겪는 것을 견디다 못해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딸에 대한 지극한 모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 딸을 위해서는
어떤 수치나 모욕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있었던 것이지요!

여러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를 오뚝이처럼 되게 만듭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견딜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우리 내리 교회를 사랑하신다면 어떤 장애물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우리를 강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요일 4: 18절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는다"고 말씀했습니다. 

제가 달라스에서 개척교회를 할 때 교회 옆에 성경 번역을 하는
선교사들을 훈련시키는 Wycliffe 선교 훈련 센터가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한국계 선교사들이 만들어 내는 한영 잡지인
『The Sower』(씨뿌리는 자)를 읽다가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위클리프 선교사들은 아직까지 성경이 자기 말로 번역되지 않은 오지를
주로 찾아가서 그 원주민들과 동고동락하며 많은 고생을 하는 분들입니다. 
김승일이라는 젊은 선교사의 아버지 김우영 장로님이라는 분이
선교 오지에 가서 고생을 사서하는 자기 아들을 생각하며 쓴 글이었습니다. 

이 아버지는 한국의 보통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기 아들이
미국에서 좋은 대학을 나왔고 또 대학원까지 진학하여 석사 학위를
두 개씩이나 땄기 때문에, 다른 보통 사람들처럼 안정된 직장을 갖고
결혼도 잘해서 그저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아들이 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자기 아들이 남들이 하기 싫어하고 또 고생문이 훤한 선교사의 길을
지망한 것이 마음에 내내 걸렸지만 자기 아들이 오히려 자기보다도
더 귀하고 강한 믿음을 가지고 선교 오지에 가서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고 은혜를 받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특히 아들이 선교지로 떠나면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마지막 유서를
써놓은 것을 읽었을 때 자기 아들이 얼마나 믿음이 강한지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특히 감동을 받은 대목은 선교지에서 자기 아들이
결혼한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를 소개할 때였습니다. 
결혼해서 첫아들을 낳은 자기 여동생에게 이 아이가 "외모의 아름다움은
엄마와 아빠를 닮았으면 좋겠지만 마음은 주님을 닮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을 읽고 자기나 딸이나 다함께 엉엉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장로님의 딸은 자기 오빠에 대하여 말할 때마다 항상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오빠를 존경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가족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 순종한다면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고 끝까지 참게 해주는 힘이 있습니다!
아무리 저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고 할지라도
사랑의 힘만 있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그 사랑만 있다면 여러분은 오뚝이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인생의 목적을 분명히 정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항상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흙을 덮어도 훌훌 털어 버린 당나귀처럼 수없이
쓰러뜨려도 또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처럼 여러분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 불굴의 당나귀같이, 오뚝이같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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