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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 화평하라 (롬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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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인들에게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가장 힘든 일은, 적은 월급, 과도한 업무가 아니었다. ‘인간관계가 가장 힘들었다.’였다. 인간관계가 나빠지면 생산성이 떨어진다. 인간관계가 나빠지면, 모든 일에 힘들다. 특별히 마음이 힘들다. 괴롭기에 행복해질 수 없다.

  멋진 차를 타는 것보다, 인간관계가 좋아야 행복하다. 넓은 집에 사는 것보다 관계가 원만해야 그 가정이 행복하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역할을 감당하고, 어머니는 어머니의 역할을 감당하는 관계가 좋은 가정이 복된 가정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과 같이 먹으면 체하게 된다. 그러나 맛없는 음식도, 관계가 좋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먹으면 정말 맛있다. 성경은 관계를 아름답게 맺음이 행복이라 한다. 우리가 맺어야 할 관계가운데,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행복한데, 그렇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죄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정말 싫어하신다. 죄에 대해 진노하신다. 하나님과 좋지 못한 관계가 되면, 펄펄 끓는 지옥 불에 던져지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지옥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지, 예수님은 범죄한 눈을 빼서라도, 범죄한 팔과 다리를 잘라서라도, 지옥만은 가지 말라고 하신다(마5:29-30). 그만큼 두려운 곳이 지옥이다.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죄인 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가를 말씀한다.

1. 죄는 하나님과 화평할 수 없게 만든다.

화평(에이레네, εἰρήνη)은 평화를 말하는데, 다시 하나가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였다. 원수 관계, 적대 관계에 있었지만, 이제는 다시 돌아와 회복되었음을 말한다.

  화평은 무엇을 얻어서 오지 않는다. 관계가 회복되면 평화가 생긴다. 자식이 집을 나가면, 아무리 좋은 것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마음이 평안하지 않다. 하지만 자식이 돌아오면 마음이 화평해진다. 부부가 싸웠다가 화해하고 같이 화해하고 같이 밥을 먹으면 속이 편안해진다. 이것이 화평이다.

  화평은 히브리어로 솰롬(לוֹם󰚂)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솰롬을 사용하고 있다. 만날 때마다 솰롬하고 인사하고, 헤어질 때도 솰롬으로 헤어진다. 나라 없이 2천년간 유랑하던 유대인은, 한번도 솰롬을 잊은 적이 없다. 솰롬의 원천은 하나님이다.

  솰롬은 명사로 “완전, 건강, 번영, 행복, 평화, 성공, 복지”등으로 쓰여 진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솰롬이다. 인간에게 솰롬이 없다면, 살았으나 죽은 것이며, 좌절과 낙담가운데 살다가 허무하게 일생을 마치게 된다.

  그러나 솰롬이 있는 한, 아무리 어려워도 좌절할 수 없다. 낙담은 금물이다. 솰롬은 용기를 북돋아 주며, 삶의 의욕이 넘쳐흐르도록 만들어준다. 그러나 솰롬은 죄가 있는 곳에는 없다. (시38:3)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죄는 뼈 속 깊은 곳까지, 평안이 없게 만든다. 죄가 인간을 지배하면, 살아 있으나 죽은 목숨이다. 솰롬이 없는 인간은, 생기가 없고, 희망이 없으며, 번영과 융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비극은, 솰롬이 없는 비극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48:22, 57:21). 우리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원수였다(10). 이 원수 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죽음밖에 없었다. 그래서 구약의 제사장들조차도 감히 나아갈 수 없었다.

  1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에 어린양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유일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 이때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면서, 2가지 장치를 하고 들어갔다. 하나는 허리 묶는 끈이요, 또 하나는 옷에 단 방울이었다. 왜 이렇게 끈으로 묶고, 방울을 달았는지 아세요?

  지성소에 들어갔다가, 범죄함으로 죽는 일이 있었기에, 방울 소리가 나지 않으면 ‘죽었구나’하고 알지만, 그래도 사람이 들어갈 수 없으니까, 끈을 잡아 끌어냈다. 이렇듯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목숨을 걸고 들어갔다.

  그런데 성경이 이토록 강조하는,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에서 해방됨을, 마귀는 별로 중요하게 보지 못하게 만든다. 심리학은 고도의 기술을 사용하여, 구원을 인간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받음’은 훨씬 쉽고, 어린아이 수준에 불과하게 만들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듭남을, 본격적으로 자신을 구원하는 데 필요한, 입문 과정정도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상담의 치료는 무의식의 치료지, 결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남으로, 하나님과 화평케 되는,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이요, 치유가 아니다.

  죄인 된 인간에게 성경이 제시하는 유일한 치료방법은, 심리치료가 아니라 죄에 대한 회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길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주인으로 모셔 들임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순간, 성령님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런데 지금 심리학의 영향으로 ‘죄’와 ‘구원’이 사라진 자리에, 각종 그럴듯한 병명들만 늘어날 뿐이다. 심리학은 모든 인간은 책임질 것이 전혀 없는 피해자요, 환자일 뿐이다. 피해자에게 구세주가 왜 필요하고, 구원이 필요한가? 환자에게는 구원이 필요하지 않고, 치료가 필요할 뿐이다.

  이러한 거짓된 가르침을, 성경의 진리와 바꾸려는 사탄의 계략에 말려들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구원의 문제는, 우리의 영원이 달린 문제다. ‘죄인 된 인간에게 닥칠, 우리의 머리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것이 성경의 가장 큰 관심사다.

2. 하나님과 화평하려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죄 때문에 부끄럽지 않은 인생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럽지 않은 인생이 되려면,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덧입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가? 솰롬의 모음이 변해서 셀렘(ם󰗞󰚆)으로 변하면 화목제물이 된다. 구약의 제의인 화목제사가 된다. 화목제사는 온전한 살진 소를 잡아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 속에서, 구원의 기쁨과 친교를 나누는 회식을 의미한다.

  다시 솰롬이 실렘(ם󰗥󰚄)으로 변하면, 주어자의 행동을 강조하는, 강력한 역할을 하는 동사가 된다. 동사의 뜻은 “갚다, 대가를 지불하다, 대신 갚다”는 뜻이 된다. (레24:18) “짐승을 쳐죽인 자는 짐승으로 짐승을 갚을(실렘) 것이며” 이처럼 반드시 대가를 지불되어야 용서가 가능해진다.

  용서받기 위해서 대신 지불함이 실렘인데, 실렘 없이 용서란 있을 수 없다. 구약의 실렘을 대신한 분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다. 완전한 지불만이 구원이 가능하기에,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셀렘)으로 오셔서, 대신 죽으셨다(실렘).

  우리가 죽어야 할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실렘)하기 위해서, 화목제물로(셀렘) 단번에 돌아가셨다. 예수님의 대속(실렘)의 죽음으로 우리는 용서받고, 다시 살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온전하게(살람, ם󰗛󰚂) 회복되었고, 하나님과 화평(솰롬, םוֹל󰚂)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죄로 더럽혀진 우리의 삶은, 어떤 행위로도 씻어 낼 수 없다. 이 죄는 오직 용서함으로 가능하다. 하나님이 용서해주시면 없어진다. 아버지가 용서했으면 다 끝난 일이다. 그런데 아이가 스스로 계속 죄책감에 시달리면, 문제 있는 행동이다. 사단은 이 점을 노린다.

  누가복음15장에 탕자의 비유가 나온다.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해서, 그 돈을 가지고 술 마시고, 투전판에서 노름하며 방탕하게 살았다. 탕자가 저지른 불의한 일 가운데, 가장 큰 불의는 무엇인가? 술을 마신 것인가? 투전한 것인가? 방탄한 일을 한 것인가? 아니다.

  제일 큰 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끊고 떠난 것이다. 탕자는 마음대로 갖가지 죄들을 범하게 되었지만, 아버지를 떠났기에 지은 죄들이다. 탕자가 살기 위해서, 한 일이 무엇인가요?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이것은 아주 위대한 깨달음이다.

  탕자는 자기가 이렇게 죽게 된 것은, 죄 때문인 줄 알았다. 탕자가 저지른 죄들은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들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으려면, 누구에게로 돌아가야 하나? 하나님 아버지에게 돌아가야 한다. 아버지에게 돌아온 탕자는, 모든 행위의 죄를 다 용서받았다.

  아버지가 탕자를 끌어안는 순간, 그 모든 과거의 허물은 다 제하여졌다. 그 순간 죄는 다 없어졌다.

탕자가 스스로 자기의 죄에서 벗어나려고 했다면, 그는 실패하고 말았다. 아버지께 돌아왔기에 죄가 없어졌지, 죄를 없앴기에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에게 받았던 유산을 다 탕진했다고 해서,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 손해 배상을 해야 하나요? 그렇지 않다.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린 것이라면, 그대로는 못 간다. 하지만 아버지는 다르다. 빚을 안 갚아도, 아버지는 상관하지 않으신다. 돈을 못 벌어도 상관없다.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에게 그냥 돌아가면 된다. 그것이 의요 믿음이다. 행함이 중요한 게 아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감이 중요하다. 율법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다. 스스로 의로워지려 함은, 아버지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처사이고, 아버지를 속상하게 만드는 일이다.

  재산을 탕진했다고, 아들에게 “이놈, 그 많은 돈을 다 없애고 빈손으로 들어와? 나가!”라고 말하는 아버지는 없다.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와도, 살아 돌아와서 잘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버지의 심정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평을 주시기 위하여, 의롭다 함을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란다.

3. 화평을 누리자.

하나님께서 화평을 주셨는데,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화평을 주셨는데,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주신 화평을 받아 누리시기 바란다. 화평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1) 죄로부터의 자유다.

죄는 우리를 화평케 하지 못하게 만든다. 죄를 지으면 슬금슬금 눈치보고, 피할 수밖에 없다. 죄를 지으면 죄의 종이 된다. 마귀의 종이 된다. 우리가 지은 죄를 들먹이며 협박하게 된다.

  우리에게 죄가 있었다. 우리 가운데 죄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그 죄가 지금도 있나요? 없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다 용서해 주셨다. 악한 마귀가 가로막을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나는 깨끗해 졌다고 외쳐야 한다.

(2) 불안으로부터의 자유다.

불안하면 화평이 없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가난해서 불편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진짜 믿으면 불안하지 않다. 예수님을 안 믿어도, 큰집에서 좋은 차를 타면서 편안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안 믿는데, 평안하게 사는 법은 없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복은 평안의 복이다. 초대교회 문서들을 보면, 많은 그리스도인의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라는 별칭이 붙어 있다. 이 뜻은 결코 염려하지 않는 자라는 뜻이다.

  믿음의 거장들을 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노래함을 볼 수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한다”라고 고백한다. 다윗은 (시3:)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할지라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고 하였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따라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려야 한다. 이미 우리에게 주신 화평이다. 아무리 좋은 집이 있어도, 들어가 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먹어야만, 힘이 된다.

  구경만 하고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처럼 우리에게 허락하신 축복과 평안을 누릴 때 비로소 우리의 것이 되지, 옆에서 구경만 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90년 전에 미국 최대 구두쇠로 꼽힌 사람은 ‘히티 그린’이라는 노파였다. 아주 장수한 할머니인데, 독자를 두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다리에 병이 나서 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술비가 없어 다리를 잘라내고 한 평생 다리 하나로 살았다.

  이 할머니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묽은 죽으로 연명하다가 영양실조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이 할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이 할머니의 통장에, 90년 전 당시의 돈으로 무려 1억불이 들어 있었다. 영양실조로 죽고, 아들은 다리 수술을 못해서 절단했는데, 그에게서 1억불이 나왔다.

  통장에 돈이 아무리 많으면 무엇하나? 그는 가지고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하고, 쓸 줄 모르는 병든 분이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 엄청난 부요가 있고, 구하기만 하면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못한다, 나는 굶어죽겠다’하고 체념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자고 말씀한다. 성도의 최고의 권능은,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화평과 능력을 누리는 일이다. 그러면, 놀라운 역사가 벌어진다. (눅10: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악한 마귀와 대적해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 이기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사용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싸우라고 해도, 싸울 능력이 없다고 한다. “제가 언제 받았나요”하는 식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가기만 하면 이기는데, 그런 능력이 없다고 한탄만 하고 있다.

  (막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믿음을 가지고, 손을 얹고 기도하면 나을 줄로 믿어야 한다.

  우리는 너무나도 누리지 못하고, 즐기지 못하고 있다. 특별히 과거의 죄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면, 용서받은 줄로 믿어야 하는데, ‘나는 용서받지 못했다. 나는 안 돼요. 못한다’며, 마치 겸손한 사람처럼 위장하고 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불신앙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셨으면, 받은 줄로 믿고 나아가면 된다. 또 용서하셨다면 용서받은 줄 확신하면 되는데, 굳이 ‘나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입니다’라고, 괜한 겸양을 부리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 감사합니다. 내 모든 죄악을 다 용서해 주심을 감사합니다”하며 기도하며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악한 마귀는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너는 죄인이다. 너 같이 악한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하는 속삭임으로 우리를 과거에 붙들어 매고, 과거에 얽매여 전진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 속삭임에 귀를 막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악이 다 하얗게 씻긴 줄 믿고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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