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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 받은 사람들 (행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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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받은 사람들 행2:1-13

교회에서 흔히 쓰는 단어일수록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믿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정의하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이란 말을 많이 씁니다. 성경에서 여러 가지 믿음을 얘기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알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나치는 때가 많습니다. 또 '사랑'은 무엇입니까? 눈물의 씨앗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을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다룰 '은혜'는 또 어떻습니까? 이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사용합니다. 주일날 가장 많이 듣는 단어가 아마 은혜일 것입니다. "목사님, 오늘 참 많이 은혜 받았습니다." "아, 저 집사님은 보기만 해도 은혜스러워!" "우리 교회는 은혜가 넘쳐!" "나는 정말 큰 은혜 받았어!" 대단한 일을 했을 때 누군가 칭찬을 하면 "다 하나님의 은혜지요. 제가 했나요!" 이렇듯 '은혜'라는 단어를 수없이 쓰는데, 은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정확한 대답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은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헨'이라는 단어는 '구부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위에서 아래로 베푸는 호의를 말합니다.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원래 은혜라고 합니다. 신학적인 의미로 부연한다면,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에게 베푸는 자발적인 호의, 영어로는 'Grace'입니다. 이 말을 우리의 삶과 연관시켜 아주 명쾌하게 설명하신 신학자가 있습니다. 도날드 반 하우스입니다. "위를 향한 사랑, 그것은 예배이다. 바깥을 향한 사랑, 그것은 자비이다. 아래로 향한 사랑, 그것이 바로 은혜이다." 그렇습니다. 은혜란, 아랫사람은 받을 자격이 전혀 없지만, 윗사람이 그에게 베푸는 호의입니다.

1700년대 중엽 영국에 한 노예상인이 살았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파는 것이 그의 직업이었습니다. 그는 노예를 인간 취급도 안하고 경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느 날 성경을 우연히 읽다가 자기가 노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어 죄에 끌려 다니던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합니다. 비로소 자기가 용서받고 자유해진 영혼의 감격을 시로 옮긴 것이 유명한 Amazing Grace(찬405장)찬송입니다. 존 뉴톤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런데 이런 죄 사함 곧 구원의 선물이 은혜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공짜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원은 결코 싸구려 공짜가 아닙니다. 비싼 공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 사함 받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까닭입니다. 어제 우리 교우 가운데 돌 예배를 부탁 받고 설교 준비를 하는데 예수님의 어린 시절! 다룬 눅2:40,52절을 보면서 새로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도대체 그분이 누구시길래 그런 대접을 받아야합니까?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구유에 오셨습니다. 벌레가 우글거리고, 기생충이 득실거리는 그곳에서 나신 모습을 볼 때 눈물이 나더라구요. 요즘 우리 아이들 보세요. 그런 환경에 나두면 아마 병균에 감염되어 어려움이 많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 사랑, 그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까? 이는 결코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이 값비싼 구원의 선물이 아무 공로 없는, 아무 자격이 없는 나에게 은혜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직접 함께 생활하며 기적을 목격했던 사람들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제자훈련을 누구보다 잘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직접 제자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누가 그들보다 더 잘 제자훈련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십자가 앞에 서자 예수님을 부인하고 숨어버리고 결국은 팔아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직접 제자훈련을 받았던 저들도 그러했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제자훈련만을 잘 받았다고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훈련을 받으면 많은 것을 깨닫지만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가를 절실히 알게됩니다. 자신은 제자로서의 십자가를 능히 감당치 못하는 사람임을 절실히 알게 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꿈은 전 세계를 변화시키는 엄청난 것인데, 나는 그 일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고 작은 존재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훈련만으로는 주님의 일! 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영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루를 기쁘게 살려는가? 이발을 하라. 한 주일을 기쁘게 살려는가? 자동차를 사라. 한 달을 기쁘게 살려는가? 결혼을 하라. 한 해를 기쁘게 살려는가? 새 집을 지어라. 평생을 기쁘게 살려는가? 정직하게 살아라." 여기에 한가지를 더 첨부하겠습니다. 영원히 기쁘게 살려는가? 성령을 받으라.
우찌무라간조라는 유명한 일본의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기독교인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의 것을 가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의 것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그를 업신여겨도 그는 세상을 이길 힘이 없으며, 깨끗하게 되기를 힘써도 그는 결코 깨끗해질 수 없다. 그는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불신자보다도 못한 사람이 될 것이다."

오늘 본문은 우리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모습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다락방에 모여 성령을 기다리라는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던 120 문도 가운데 오순절 날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여기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렀다"‘순’자는‘열흘 순旬’자입니다. 한자로 오순(五旬)은 50을 말하지요? 영어에서도 오순절을 Pentecost라고 하는데, 이 말은 “펜테코스테(pentekoste)” 라는 희랍어에서 온 말로서 “50번 째”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이후 50일 째 되는 날을 오순절로 지켰습니다. 오순절은 곡식을 거두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오순절은 바로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맥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시기도 하고, 메추라기를 보내주시기도 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리농사를 짓기도 했습니다. 보리를 수확해서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맥추절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할 때 시내산에 머물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모세는 십계명을 포함한 율법을 받습니다. 이때가 애굽에서 나온 지 50일 째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은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날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는 그저 노예 집단에 불과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들이 율법을 받게 됨으로써 국가로서의 법률과 조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 시대에 와서는 어떤 의미가 되었을까요? 맥추절, 칠칠절, 혹은 오순절에 이르러서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성령이 기도하고 있는 120 문도에게 강림하셨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순절에 이르러서 성도의 모임인 교회가 성령을 받게 됨으로 완전한 교회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의 맥추절은 ‘교회의 탄생일, 교회의 생일’이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본문에 보는 대로 오순절 날에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그 소리가 온 집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는 불의 혀(tongues of fire) 같이 갈라진! 것이 보이더니 모인 각 사람 위에 내렸습니다. 각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해서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다락방에 약속하신 성령의 강림을 통해 옛 껍질을 벗어 던지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을 감당하는 새 역사의 주인공으로 희망을 주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당당한 하나님의 은혜 받은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은혜는 용수철과 같은 것입니다. 그 동안은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의 서슬퍼런 눈이 무서워 숨어 지내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무엇보다 성령 받은 그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첫째가 그들의 입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6절에 따르면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고, 7-8절에 의하면 "말하는 사람들은 다 갈릴리 사람인데 듣는 사람들은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들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반응이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다 놀라며 의혹하여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다 놀란 것입니다. 얼마나 놀랐으면 이들의 모습이 술 취한 자와 같이 여겼겠습니까?

오순절 다락방에 임한 성령은 제일 먼저 120명의 입을 열어 놓았습니다. 꼭 다물고 있던 사람들의 입을 열어 하나님의 큰 일,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온 예루살렘에 소동이 일어날 정도로 소리를 지르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안 믿는 사람을 옆에 두고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합니다. 특히 베드로는 세상 앞에 있는 자들을 향해 그 동안 말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던 예수에 대해 외칩니다. 36절에 보면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예수의 주되심!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 이것을 피를 토하듯 외친 것입니다. 이제 성령 받은 그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언어가 된 것입니다.

요즘 우리를 참 힘들게 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상실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6.25라는 민족상쟁의 비극을 딛고 57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엄청난 발전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당시 폐허화 된 조국의 앞날은 한마디로 절망과 상실 그 자체였습니다. 그 때 유엔에 등록 된 120여 개의 나라 가운데 우리나라는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나라였습니다. 국민 소득이 76불이었고, 1964년에 이르러서 국민 소득이 100달러에 들어섰어요. 이 100달러를 위해 단군이래 460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 우리가 지금은 세계 경제 대국으로 세계 10위에 들어와 있고 국민 소득 역시 2만불 시대를 여는 선진 사회로 들어서고 있지 않습니까? 이 정도가 되면 행복한 나라, 잘 사는 나라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겉모습뿐이지 그 속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오늘 한국 사회는 절망적인 소식들로 가득합니다. 최근의 우리 한국사회가 과거에 비해 뚜렷하게 달라진 것이 두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는 자살율의 급격한 증가입니다. 어느 한 일간지 보도에 의하면 IMF 이후 7년 만에 자살율은 2배 이상으로 뛰어 올랐고, 처음으로 자살로 죽은 사람이 교통 사고로 죽은 사람보다 많아 졌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OECD국가 중 자살율 제1위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자살자의 증가와 함께 또 하나 두드러진 사회적 변화는 이민을 원하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한 전문가들의 해석은 거의 일치하고 있는데, 한마디로 우리 사회가 희망을 잃어버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인간상실을 가리키는 것 중의 하나가 무엇입니까?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의사소통의 단절입니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그래서 얼마나 자신의 벽을 쌓고 살아갑니까? 그러니까 말이 안 통합니다. 말이 안 통하는 것보다 더 삶을 답답하고 짜증나게 하며 세상을 살고 싶지 않게 만드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언어는 있어도 서로서로 사이에 말이 안 통하면 사람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말이 안 통하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한국말을 쓰는 우리 같은 국민들 사이에서도 말이 안 통하는 일은 수없이 많습니다. 기성 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에 말이 안 통하고 여자와 남자 사이에 말이 안 통합니다. 국민과 정치하는 사람들 사이에 말이 안 통하고, 여당과 야당 사이에도 말이 안 통합니다. 기업가와 근로자 사이에 말이 안 통하며 선생과 학생 사이에 말이 안 통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은 인간상실의 세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 강림은 언어의 회복입니다. 그것도 살리는 언어 치료와 회복을 주는 언어로 그들의 혀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남을 비방하고, 끌어내리는 언어가 아닌 남을 격려하고 세워주고 희망을 주는 언어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정말 교회에도 이런 언어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말이라고 다 말입니까? 남에게 상처주지 않고 오히려 말로 남을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고 칭찬해주고 서로 사랑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안 되겠습니까?

두 번 째로 성령 충만하면 담대해집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겁쟁이 베드로가 성령충만하자 얼마나 담대해졌는지 사도행전을 열기만 하면 금방 나옵니다. 전도라는 것은 사탄을 향해 선전포고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도 아니라 상대를 향해 "회개하라"고 외? 않습니까? 그러나 회개란 결코 쉬운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놓고 무릎을 꿇으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일을 누가 감히 강조할 수 있습니까? C. S. 루이스의 말처럼 '회개하라'는 말은 그 사람을 향해 죽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즉 일종의 죽음을 각오하라는 말인데, 누가 감히 가서 사람들에게 '너 칼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죽으라.'고 누가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얼마나 많은 핍박이 일어납니까?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 앞에 그들의 무릎을 꿇고 3000명, 5000명 그리고 수많은 무리들이 주 앞에 돌아오기도 하였지만, 오히려 성령 받은 사람들은 세상의 칼날에 목이 짤리기도 하고 돌에 맞아 죽기도 합니다. 악형을 받았습니다. 희롱과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양과 염소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광야를 방황하며 유리하며 살기도 했습니다. 토굴 속에 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구차하게 생명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기대했던 결과가 나타나지 않고 기적이 없다할지라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 거하는 것을 원하신다면 오히려 감수하며 묵묵히 걸어갔던 것입니다. 지금도 사탄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교회를 핍박하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혹독하게 교회를 핍박하는지 모릅니다. 전도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못살게 구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데이빗 바렛'이라고 하는 유명한 통계학자가 있습니다. 그의 통계에 의하면 1900년대 복음을 전하다가 끌려가 죽은 순교자들, 그 다음에 예수 믿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다가 죽은 순교자들이 1년에 15만 명이 된다고 합니다. 즉 하루에 약 400명이 지구 도처에서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는 말입니다. 북한에 있는 참혹한 핍박까지 포함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만큼 사탄은 오늘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집요하게 갖은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해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핍박하고,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자들을 못살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안순자 선교사 이야기. 페트릭. 그래도 편지에 나 나올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더욱 이 어려움을 이기도록 담대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 부탁)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사탄이 아우성을 쳐도 우리가 성령 충만하면 이 사탄의 역사를 짓밟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 받은 사람들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단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아낌없이 주님을 위해 드립니다. 제가 TV를 잘 보는 편은 아닌데 꼭 요즘 보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대조영'이란 사극인데 이 극중 연기자 중에 임동진이란 분이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 장로로 있다가 작년 초에 이분이 3년 동안 루터신학대학원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교회를 개척해서 지금은 연기와 목회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이 분에게 사극 '대조영'에 '양만춘 장군'역으로 출연해 달라고 요청이 왔습니다. 이 분이 얼마 전에 중풍으로 쓰러지지 않았습니까? 모처럼 자신에게 비중이 있는 배역이 주어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TV 드라마 촬영을 시작할 때, 성공을 위해서 고사를 드리곤 합니다.

그 때 이 분이 조건을 한가지 걸었습니다. "나는 앞으로 목사가 될 사람인데 촬영을 시작할 때 고사를 지내지 말고 예배를 드려 봅시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이것은 모험입니다. 잘못하면 배역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잠시 돈과 인기를 위해 신앙을 팔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고사를 지내는 대신 예배로 대조영 드라마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허락을 얻어서 세트장에서 "예배드릴 사람 다 모이라"고 했더니 세트장이 예배를 드리려는 사람들로 꽉 차게 되었습니다. 그 날 예배는 갑옷을 입고 수염을 붙이는 등 분장을 한 상태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고구려 인들의 예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바르게 살아가도록 지혜를 주십니다. 때때로 사면초가에 둘러 쌓인 것 같고, 그 어느 곳을 둘러봐도 나를 대적하는 사람만 보이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 집중하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들,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이 있습니다. 이 신비한 손길을 누리는 것은 다름 아닌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갈 때 일어납니다. 결코 비굴하지 않고 담대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헨리 나우엔이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의 내용은 다른 사람을 치유해 주는 사람, 다른 사람을 붙들어 주는 사람, 그리고 다른 사람을 인도해 주는 사람 이렇게 세 파트로 되어 있습니다. 나우엔은 이 세 가지 종류의 삶을 예수님의 삶의 특징으로 규정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이 시대에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들이 아니겠느냐 하고 묻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참으로 주의 성령이 그 속에 들어와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은, 참으로 진리를 깨달아서 담대함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일 것이라고요.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얼마나 덥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무덥고 짜증이 나더라도, 어디든 산 속에 있는 계곡에만 들어가면 계곡 사이로 타고 흐르는 물줄기, 그리고 계곡을 휘감고 오는 그 바람이 얼마나 시원합니까? 지난 금요일 기도원 부지를 찾던 중에 홍천 쪽에 있는 어느 기도원으로 쓰던 산을 갔는데 그 더위 속에서도 계곡 사이에서 나오는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 지 모릅니다. 저는 이 바람을 맞으면서 사방에서 불어왔던 하나님의 생기의 바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답답한 마음을 열어 젖히고 성령의 바람이 내게 불어오기를 소원하십시오. 바람이 불지 못할 곳이 어디가 있습니까? 바람은 어디나 붑니다. 자유롭게 붑니다. 우리도 인생을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들로 멋있게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보다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주의 영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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