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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마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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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제목 :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 설교본문 : 마태복음 6장 12절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는 하나님을 위한 기도와 우리 자신들을 위한 기도가 나오는데 본문은 우리 자신들을 위한 기도에 속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는 첫째,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기도로 구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모르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에는 욕심이 들어가면 안 됩니다.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 날에 필요한 양식을 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몇 십일, 몇 개월, 몇 년 동안 먹을 것을 구하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 두 번째는 죄사함을 위한 기도입니다. 오늘 설교에서 이 부분을 다루려고 합니다. 세 번째는 보호를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다면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마귀의 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쳐주시는 이유는 죄사함이 모든 사람에게 너무나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지적합니다. 롬 3:23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입니다.

1. 죄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생각도 죄고, 하나님을 떠난 말도 죄고, 하나님을 떠난 행동도 죄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일, 하나님을 떠난 관계, 하나님을 떠난 꿈도 죄인 것입니다.
죄를 언어적인 측면에서 보면 몇 가지로 나눠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죄’라는 용어가 몇 가지로 나옵니다. 첫째, ‘하마르티아’입니다. 이 단어는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갔을 때 쓰는 말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행할 것을 행치 아니하고 빗나간 짓을 했을 때 그것이 곧 죄라는 것입니다. 과녁이 분명히 있듯이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는데 그 뜻에서 벗어난 모든 것이 죄인 것입니다. 둘째, ‘파라바시스’입니다. 넘어설 수 없는 선을 넘어섰을 때 쓰는 말입니다. 자동차가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습니다. 중앙선이지요. 중앙선을 넘어서면 사고 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넘어서서는 안 될 선이 있습니다. 생각의 선이 있습니다. 언어의 선이 있어요. 행동의 선이 있어요. 관계의 선이 있어요. 넘어서는 안 되는데 안 되는 줄 알면서 넘어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죄입니다.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모르고 넘어도 죄인 것입니다. 셋째는 ‘아노미아’가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악과 불법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넷째는 ‘오펠레이마타’입니다. 이 단어가 본문에서 쓰인 단어입니다. 마땅히 지불해야 하는 것을 지불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남의 가게에서 물건을 가져오는데 돈을 지불하지 않고 가져왔다면 죄인 것처럼, 하나님과 사람에게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았을 때도 죄가 되는 것입니다.

2. 죄 문제가 해결 안 되면 어떻게 됩니까?

죄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떠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는 고통스러운 삶과 더 고통스러운 죽음 후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를 떠난 것이 그에게 고통의 원인이었던 것과 같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에 있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버지를 떠나고 난 후부터 그의 인생에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한 것입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그 물고기에게 기다리는 것은 고통 밖에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기다리는 것은 고통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 죄의 결과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합시다.

  1) 하나님과 관계가 분리되고 마귀의 자녀가 됩니다.
죄의 특성 중에 하나가 분리시키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연합하지 못하고 분열하는 이유도 사실은 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죄가 분리시키는 것 중에 가장 무서운 분리는 하나님과 죄인을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분에게는 죄를 찾아볼 수 없는 완전하게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죄를 해결하지 못한 인간이 어찌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죄를 범한 아담이 하나님을 피했던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아담과 하나님은 완전한 친밀감 속에서 교제했습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찾아오시면 아담은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과 아무런 막힘이 없이 교제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날이 서늘할 때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다른 날과 달리 무화과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자신의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설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무 뒤에 숨었던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죄를 범한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리되는 대신에 마귀와의 관계가 깊어집니다. 요8:44에 보면 죄를 범하는 자는 마귀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마귀의 특징은 죄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그 속에 없어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합니다. 그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입니다.
누구의 자녀가 되느냐는 중요한 일입니다. 인격이 좋고 능력이 있는 아버지의 자녀라면 그 자녀는 행복하게 살 것입니다. 비정상적인 인격을 가지고 사악하고 폭력적인 아버지를 만난 자녀는 불행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행복한 인생이 보장되어있으나 마귀의 자녀가 되었다면 비참한 인생, 고통스러운 인생이 보장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에 던져집니다.
고전 6:9에 보면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누리는 현세천국이 있고, 죽어서 들어가는 내세 천국이 있습니다. 죄 문제가 해결된 사람은 이 땅에서는 현세천국을 누리고 죽어서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들어갈 영원천국은 12개의 진주문을 통과해서 들어갑니다. 길은 금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금이 그 세상에서는 가장 천한 것입니다. 벽은 12가지 보석으로 되어있습니다. 거기는 밤이 없고 영원한 빛 가운데 있습니다.  수정 같은 생명수 강물이 흐르고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달마다 맺습니다.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가 한 가운데 놓여있는데 이 땅에서 주를 섬겼던 우리들이 언제나 그 얼굴을 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눈물을 친히 닦아 주시고 다시는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습니다.

현세천국은 이 땅에서 천국의 맛을 보는 것입니다. 식사를 하는 것과 맛을 보는 것이 다르듯이 이 땅에서 누리는 천국은 영원한 천국만은 못하지만 다른 어떤 방법으로 누릴 수 없는 행복을 줍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오셔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을 성령 안에서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간혹 인생사의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괴로운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왔는데 기도나 찬송 중에 혹은 예배 중에 혹은 말씀을 듣다가 현실과 상관없는 행복이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것이 천국을 맛보는 것입니다. 현세천국을 누리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기도는 찬송 중에 혹은 예배 중에 제 입에서 “너무 좋다. 너무 좋다”라는 말이 나올 때가 있었습니다. 현세천국의 맛을 보기 때문입니다.

만약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현세천국도 누리지 못하고 영원천국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불행합니다. 그 사람은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계21:18에 보니까 죄인들이 들어가는 곳으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라고 했습니다. 눅16:19-31에 보면 부자와 거지의 비유가 나옵니다.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낙원에 들어가서 아브라함의 품에서 행복하게 사는데 부자는 음부에 들어가서 엄청난 고통을 당합니다. 낙원과 음부는 부활 전에 대기하는 장소로 보지만 천국과 지옥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자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얼마나 옹색한 기도입니까? 그런데 그 간구마저 거절됩니다. 막9:48,49에 보면 지옥이 어떤 곳인지 가르쳐줍니다.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불 쏙에 소금이 들어가면 열기 때문에 튀듯이 지옥불 속에 들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고통당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연탄불 위에 굵은 소금을 치면 튀듯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곳이 지옥이라고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구더기가 얼마나 쉽게 죽습니까? 발로 밟기만 해도 터져 죽습니다. 손가락 손가락으로 눌러도 터져 죽는 연약한 존재가 구더기인데 그렇게 연약한 구더기도 죽지 않습니다. 햇빛 아래 몇 분만 내놔도 쉽게 죽을 수 있는 존재가 구더기인데 지옥에서는 그 구더기도 죽는 일이 없습니다. 이 말은 지옥 고통이 영원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이 땅에서 괴로운 일을 만나면 그 고통을 지옥 고통에 비교합니다. ‘사는 것이 지옥’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당에서 당하는 어떤 고통도 지옥 고통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지옥의 고통은 이 당에 사는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고통이 아닙니다. 죄를 해결하지 못하면 영원한 지옥에 떨어집니다.

  3) 하나님의 응답은 기대할 수 없고 마귀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얼굴빛을 기도하는 사람에게 비춰주며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죄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사람의 기도는 응답이 불가능합니다. 사59:1,2에 보면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지가 그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기도 응답이 안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고 하나님이 응답하고 싶지 않아서도 아니며 죄가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해도 좋은 것이 우리에게 오지 못하게 막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렘 6:25에 보면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 앞 절을 보면 ‘이러한 일들’과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은 비와 늦은 비가 제대로 오는 것은 풍년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성령의 역사를 예언적으로 보여주는 약속입니다. 이른 비는 주님의 초림과 관련된 영적 축복이며 늦은 비는 말세에 부어주시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렘6:25에서 말하는 ‘좋은 것’은 물질적인 번영과 영적인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가 그 좋은 것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복을 원한다면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쓰레기 더미에는 파리가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파리를 쫓아내도 쓰레기를 치우지 않으면 파리는 계속해서 모이게 되듯이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마귀와 마귀의 졸개들인 귀신들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쓰레기를 치우면 파리가 사라지듯이 죄를 해결해야 마귀의 역사가 물러가는 것입니다. 마귀의 역사를 물리치려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십시오.

  4) 의를 행할 수 있는 힘을 잃게 되고 죄의 종이 되어 죄가 끄는 대로 끌려 다닙니다.
누구든지 죄를 범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사모하고 의를 행하고 싶지만 죄가 나를 죄 가운데로 끌어가는 것입니다.
전염병을 일으키는 세균을 그대로 두면 세균은 번식합니다. 세균의 번식을 막지 못하면 전염병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지 죄를 범하면 그 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죄를 범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 죄의 원리입니다. 성경에 보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6:10)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한 가지 죄 때문에 일만 가지의 죄를 범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한 가지 죄가 만 가지 죄를 불러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요8:34에 보면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합니다. 종은 주인이 끄는 대로 끌려 다녀야 합니다. 주인이 시키는 일을 종은 하게 되어 있듯이 죄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죄의 종이기에 죄가 원하는 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를 행하기를 원함은 내게 있으나 의를 행할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죄를 처리하지 못하면 그 죄가 또 다른 죄를 낳게 됩니다.


3. 어떻게 해야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죄를 해결하지 못하면 이렇게 심각한 문제들이 계속 발생하는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죄 가운데 있습니다.
사람들이 죄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잘못된 방법으로 죄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노력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행이나 구제나 봉사나 수도를 통해서 죄가 없어진다면 얼마든지 해도 되지만 그런 방법으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인죄를 범한 죄수가 감옥에서 아무리 좋은 일을 했더라도 그 사람의 선행이 그의 죄를 없이 할 수 없듯이 이미 죄인 된 인간이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의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1)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자기를 믿는 자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름의 뜻도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33년의 공생애를 마치시면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사53:5)고 말했고, 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정리하면 그분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은 그를 믿는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대신 죄 값을 계산 하셨다는 것입니다.

롬 5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아담의 범죄에 대해서 말합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롬5:19) 이 말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인류의 대표자로 범죄 하여 인류가 죄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아담의 죄를 범했으므로 나도 죄인이라는 이론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내가 ‘마’씨 성을 가진 이유는 내가 원해서도 내가 잘못해서도 아니라 우리 조상이 ‘마’씨 성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내 의사하고는 상관없이 나는 타어 날 때부터 ‘마’씨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마’씨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조상들이 죄인이었기에 나는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담의 이야기에서 그 이야기를 끝내지 않고 곧이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죄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없어서 하나님이 또 다른 인류의 대표를 보내셨는데 그분이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죄 값을 치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주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죄의 값을 계산 하셨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나를 새생명 가운데서 살게 하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믿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주님과 하나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담대하게 갈2: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말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대 그곳에 없던 사람입니다. 그는 그 때 예수를 알지도 못했고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후에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을 바울의 죽음으로 여겨주셔서 죄인 된 바울이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보시는 것입니다.

세례는 내가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다는 고백적인 예식입니다. 세례는 본래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침례가 맞습니다. 그런데 세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롬6장에서는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합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11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롬8:1에서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말합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정죄함이 없습니까? 그 이유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시 32:1에 보면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그 말씀에서는 허물이 없는 사람이나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복 있는 사람은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진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가 우리의 허물을 사하고 죄를 가리는 것입니다.

  2) 보혈의 능력을 믿고 자백하면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받아드리는 순간 나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습니다. 원죄, 조상죄, 자범죄 까지 다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죄사함을 받은 후에도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들은 내가 원하지 않지만 연약하여 죄를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성경은 단순한 요구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를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다시 정결하게 해주십니다. 요일1:7에 보면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요일1:9에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자식이 부모의 재산에 손해를 끼쳤습니다. 그런데 자식이 부모에게 나아가서 사실대로 고백하면 정상적인 부모는 다 용서하고 받아드릴 것입니다. 자식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좋으신 아버지라 우리가 죄를 범한 후에 용서를 구하기만하면 다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죄를 범한 후에 용서를 구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나 자신과의 관계에 문제도 생기지만 그 죄가 나를 찔러서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처리하지 못한 사람은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편 32:3-5에 보면 시편기자가 이와 관련된 고백을 합니다. 3,4절에 보니까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죄를 숨기고 고백하지 않았더니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영적침체가 찾아왔는데 여름 가뭄에 식물들이 말라 비틀어 들어가는 것처럼 영적으로 메마른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5절에서는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고 고백합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니 너무 괴로워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했더니 하나님께서 지체하지 않고 곧 죄를 사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3)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우리가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먼저 선행 되어야 할 것을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해주는 일이 먼저 있어야 우리의 죄도 사해진다는 말입니다.

마 18장에 보면 주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어느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일단란트가 금 34kg이니까 일만 달란트면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빚진 것입니다. 노동자 한사람이 쉬지 않고 5964일을 일해야 1달란트를 벌수 있는 1만달란트면 59,640,000일을 일해야 갚을 수 있는 돈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갚을 수 없는 빚이라는 것입니다. 임금이 그를 긍휼이 여기고 탕감해줍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임금에게서 나가서 길을 가다가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나서 멱살을 잡고 갚을 것을 요구하고 갚지 못하자 감옥에 가두어버립니다. 100 데나리온이면 우리 돈으로 약 700만원 정도 되는 돈입니다. 700만원이 큰 돈이지만 그 사람이 임금에게 탕감 받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100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가옥에 가두었던 것입니다. 그 소식을 임금이 듣게 됩니다. 그리고 대노하여 그를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마치신 주님이 이런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성경은 사람들을 그릇에 비유합니다(딤후2:20). 그릇의 크기에 따라서 채울 수 있는 양이 결정됩니다. 아무리 욕심을 내도 그릇이 작으면 많이 담을 수 없습니다. 그릇이 크면 큰 만큼 많이 담을 수 있습니다. 저는 사람의 그릇의 크기는 누구까지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느냐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 용서하십시오. 주님이 나를 용서하신 것처럼 다 용서하십시오. 그 길이 내가 주 앞에서 용서 받는 길이고 그 길이 내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는 길입니다.

막11장에서 주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나무가 마르게 하신 후에 그 사건을 통해서 몇 가지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가장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용서에 관한 말씀입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막 11:25)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해서 교우 여러분들에게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죄사함의 확신을 갖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용서하자는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한 사람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 나에게 피해를 끼친 사람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든 다 용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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