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딥니다 (고전 13:4-7)

  • 잡초 잡초
  • 681
  • 0

첨부 1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딥니다 (고전13:4-7)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말보다 행함으로

사랑에 대한 설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을 행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7절은 사랑의 15개의 속성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기 ‘사랑’ 대신 ‘나’라는 단어로 바꾸어 한 번 읽어보십시오. “나는 오래 참습니다. 나는 온유합니다. 나는 투기하지 않습니다. 나는 자랑하지 않습니다. 나는 교만하지 않습니다. 나는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나는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성내지 않습니다. 나는 악한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나는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나는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덮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믿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바랍니다. 나는 모든 것을 견딥니다.”

이 고백에서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항목이 몇 개나 됩니까? 혹시 ‘나는 오래 참습니다.’ 대신 ‘나는 오래 참기를 원합니다.’로 바꾸고 싶지는 않았습니까? 요한 사도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하게 행한 만큼이 우리가 실제 사랑한 것이고, 그 사랑만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거의 사랑을 입에 달고 살기 때문에 마치 자신이 사랑이 많은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우리가 행한 만큼, 우리가 시간을 낸 만큼, 우리가 손을 움직인 만큼, 우리가 참은 만큼이 우리가 소유한 사랑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관념이 아니라 실체입니다. 찾아가는 사랑입니다.

산상수훈 말씀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주여’ ‘주여’ 하는 자는 말로만 사랑하는 자입니다. 어떤 분이 천국에 가서 보니 천국엔 목사의 입하고, 성도들의 귀만 와 있다고 합니다. 행하지 않은 몸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 어두운 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더랍니다. 사랑에 대한 백 가지 강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옆에 있는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는 이유는 기도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기 위해서입니다.

일찍이 중국의 실학격인 양명학을 주창했던 왕양명은 지행합일을 주장한 바 있습니다. 왕양명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아는 것은 곧 행하는 것의 시작이고, 행하는 것은 곧 아는 것의 완성입니다. 그러면 알면서 행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왕양명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런 것은 없으며, 그것은 아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명쾌합니다. 우리는 매주 설교를 통해서 좋은 말씀들을 폭포수와 같이 듣습니다. 성경 말씀에는 바다보다도 깊고 넓고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풍부한 말씀들이 있으며 우리는 그 말씀을 매일처럼 묵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말씀을 따라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머리 위에 숯불을 쌓아놓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알기 때문에 그만큼 죄도 많아지는 것이지요. 가장 먼 거리는 첫째는 머리에서 가슴까지이고, 그보다 더 먼 거리는 가슴에서 손발까지의 거리인 것 같습니다.

견디는 사랑

사랑의 마지막 15번째 속성은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딥니다.”입니다. 사랑의 첫 번째 특성이 오래 참음인데 마지막 특성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음으로 시작해서 견디는 것으로 마칩니다. 이렇게 참고 견디는 이유는 사랑에는 시련과 시험이 있기 때문이며, 또한 결국에는 사랑이 승리한다는 굳건한 믿음과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견딘다’는 헬라어 단어는 ‘휘포메네’입니다. 이는 ‘아래에 머문다’는 뜻으로 단순히 참는 정도가 아니라 “악을 용납하지 않고 남자답게 용감하게 참아내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기쁘고 소중합니다. 마냥 이런 행복한 상태로만 머물면 좋겠는데 서로 연약한 사람들이 사랑하다보니 항상 기쁜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마음이 상할 때도 많고 거센 폭풍우가 불어 닥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위기 가운데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굳건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견딘다는 말은 폭풍우에 지지 않고 버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릇을 깨지 않고 유지하는 것, 이것이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입니다.

견디는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아마 남극의 펭귄인 것 같습니다. 펭귄(황제펭귄)이 새끼를 낳을 때는 바다에서 수백km 떨어진 육지 안전한 곳으로 가서 알을 낳습니다. 알을 낳는 시기는 남극의 한 겨울입니다. 영하 60도까지 떨어지고 시속 150km의 강풍이 불어 닥칠 때입니다. 펭귄은 어미가 알을 낳고 아빠가 이를 부화합니다. 너무 춥기 때문에 알을 땅에 놓을 수 없습니다. 자기 발 등 위에 올려 넣고 배와 날개로 감싼 채 60일을 버팁니다. 어미 펭귄은 먹이를 구하러 바닷가로 나가고 아빠 펭귄은 그 60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그렇게 엉거주춤한 자세로 폭풍우를 견디어 냅니다. 이렇게 하고 나면 아빠 펭귄의 몸무게는 거의 절반으로 줄어든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모진 추위와 세찬 눈폭풍을 견디며 희망을 부화하는 것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은 견디는 것입니다. 물러서면 안 됩니다. 포기하면 안 됩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가 승리합니다. 어떤 때는 한 발자국도 전진할 수 없지만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승리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버티다 보면 언젠가 기회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잘생긴 나무들은 일찌감치 재목감으로 다 베입니다. 키가 큰 나무는 바람과 눈보라 앞에 부러지고 맙니다. 끝까지 살아남는 것은 못생긴 나무들입니다. 이들이 산을 지키며 남습니다. 결국 끝까지 지키고 버티는 자가 주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그들이 살아 있을 때 약속의 땅을 받지 못했습니다. 다만 약속의 땅으로 주어진 가나안 땅에 버티고 사는 것뿐이었습니다. 기근이 올 때가 가장 위험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블레셋으로 피신하지만 곧 돌아옵니다. 자기가 견디며 살아야 할 곳은 가나안 땅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큰민족을 이루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모든 자손들이 애굽 땅으로 건너가 살게 됩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 뼈를 가나안 땅에 묻으라고 명령합니다. 죽어서라도 약속의 땅을 지키겠다는 마음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이렇게 견디어 낸 믿음의 조상들이 있기에 그 후손들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 가정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모든 조직 사회가 그렇습니다. 가정에 중심을 잡고 견디어 내는 사람이 있어야 가정이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아빠가 딴 짓한다고 엄마가 중심을 놓아 버리면 그 가정은 무너지고 맙니다. 옛날 시대 우리 가정을 붙잡았던 것은 바로 어머니들의 힘입니다. 아버지는 가정을 내팽개치고 밖으로만 돌 때, 어머니들이 집을 지키고 자녀를 먹여 살리며 교육을 시켰습니다. 교회를 지키어내는 사람도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미련해 보일지라도 참고 기도하며 헌신하며 끝까지 견디는 사람입니다. 잘 나갈 때는 누구든 있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진짜 사랑은 어렵고 힘들 때 함께 있어주는 것이며 함께 견디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실낱 같은 희망이라는 말을 씁니다. 실낱은 아주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적은 희망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 1%이든 0.1%이든 0%하고는 천양지차입니다.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견디어내는 사랑은 이 1%의 희망을 이어가는 사람입니다. 이 1%에 하나님께서 만을 곱하고 백만을 곱할 때 엄청난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0’면 비록 하나님일지라도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받아주는 사랑

이 견딘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휘포메네’라고 하였는데 이는 ‘휘포’(아래)와 ‘메네’(머무른다)의 합성어입니다. 견디는 데 어떻게 견디느냐 하면 아래에 머물면서 위에서 일어나는 모진 폭풍우를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지구 위에는 지진도 나고, 엄청난 허리케인이 몰아치고, 또 전쟁과 핵폭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구마저 흔들린다면 큰일입니다. 지구라는 표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묵묵히 바라보면서 자기 길을 가는 것이 지구라는 별이 가진 위대함입니다.

저는 이런 사랑은 마치 갈릴리 바다와 사해 바다의 사랑과 같다 생각합니다. 갈릴리 바다는 맑고 깨끗하며 수많은 물고기들이 살고 있습니다. 반면에 사해바다는 염도가 일반 바다의 열 배에 해당하는 곳으로 물고기가 전혀 살 수 없는 죽은 바다입니다. 어떤 분들은 갈릴리 바다가 살아 있는 이유는 물을 받은 만큼 내보냈기 때문이며, 사해바다는 받기만 하고 주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받은 만큼 베푸는 사랑을 강조하는 예화로 이용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갈릴리 바다의 평균 해수면은 해저 200m입니다. 일반 바다보다 200m나 낮기 때문에 이 갈릴리 바다로 들어 온 물은 밖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갈릴리 바다는 연중 깨끗하고 많은 고기들이 살 수 있을까? 갈릴리 바다에서 시작되는 강이 있습니다. 그 유명한 요단강입니다. 요단강은 흘러서 사해바다와 연결됩니다. 사해바다는 해저 400m입니다. 갈릴리 바다가 살아 있는 이유는 사해바다가 그 오폐물을 다 받아주었기 때문입니다. 사해바다가 낮은 자리에 서서 갈릴리 호수의 모든 더러운 것과 독기를 다 받아주면서 견디는 사랑을 했기에 갈릴리 바다가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렇습니다. 골고다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입니다. 주님은 낮은 곳에 계시면서 우리의 모든 허물을 다 받고 계십니다. 아래에 계시면서 우리의 허물과 연약함을 견디어 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래 참으심으로 견디시기 때문입니다. 우주는 탄생된 이래로 하나님의 뜻을 떠나 많은 죄악들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생각한다면 이 피조세계는 이미 심판을 받았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악을 견디어 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구원 때문입니다. 우리가 돌아오시길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한번 그 끈을 놓고 나면 더 이상 희망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서로의 허물을 받아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잘못되고 더러운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받아 주고, 또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온각 독기들은 내가 받아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견디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싫다고 막아버리거나 돌아서면 사랑이라는 그릇은 깨어지고 우리는 더 이상 변화의 희망을 잃고 맙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견디는 것을 잘못합니다. 속도가 느리면 다른 사이트로 순식간에 옮기거나 재부팅을 하듯이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그러나 다시는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견디며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 앞에 닥친 문제는 지금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뒤돌아오면 항상 같은 문제로 넘어지고 우리는 그때마다 손을 떼고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그러나 해 아래 새 것이 없듯이 똑같은 문제가 반복됩니다. 견디는 사랑은 그 자리에서 끝장을 보는 사랑입니다. 여기서 견디며 승리해야 동일한 문제로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견디다 보면 희망은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살리는 사랑

저는 여기서 요한 웨슬리의 사랑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요한 웨슬리는 감리교의 창시자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수많은 사람을 구원시킨 대 부흥사입니다. 지난 번에 제가 『요한 웨슬리의 경건과 기도』중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라는 사랑에 대한 정의를 읽어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이 너무 좋습니다. 다시 한 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악과 관련되어 있습니까? 사랑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며,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가 악한 일을 행한 것이 사실입니까? 아마 소문대로 그렇게 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비록 사실일지라도 겉으로 드러난 그 정도로 악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바랍니다.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히 악한 행위를 했습니까?  그러나 사랑은 그 의도만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바랍니다.
그 의도 또한 악한 것이 확실하다구요? 하지만 그것은 가슴 속 뿌리 깊은 본성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이성을 망각하게 만드는 어떤 격렬한 유혹이나 감정폭발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일 것이라고 바랍니다.
심지어 그의 모든 행위와 의도와 본성이 모두 다 악하다는 사실이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판명 났다 할지라도 사랑은 여전히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결국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회개케 하고 그에게 승리를 안겨 주실 것이라고......”

글이 너무 좋아서 기록하여 간직하고 외우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요한 웨슬리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고 그의 사랑은 성장에 비교할 정도로 아름다웠을까요?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그의 결혼 생활은 극히 불행했습니다. 요한 웨슬리의 부인은 성경 욥기에 나오는 욥의 아내와,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와 함께 3대 악처에 손꼽힐 정도의 여자였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47세라는 늦은 나이에 그 아내 몰리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동안 요한 웨슬리 주위에는 많은 여인들도 있었고 결혼할 기회가 있었지만 웨슬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미적미적하며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모습에 실망하여 여자들이 떠나갔습니다. 그러다 나이도 들어가고 또 실연의 아픔 속에 웨슬리는 어느 날 충동적으로 결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구혼하고 15일만에 결혼을 했는데 그 형제들과 상의하지도 않고 결혼을 했으니까요. 몰리라는 여자는 아이 넷을 둔 과부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웨슬리는 한 가정의 가장이 되기에는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경건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매일 설교 서너 번씩 해야 했으며(평생 총 42,000회의 설교), 부흥 집회를 위해서 오랫동안 집을 비우기 일쑤였습니다. 또 다른 여자들에게는 친절하게 대했지만 자기 아내에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런 남편에 대해서 몰리는 화가 나서 결혼한 지 1년 갓 넘어서 부부싸움하다 그 머리채를 잡아 뽑기도 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독선적인 성격이 강했고, 그 아내 몰리는 극단적인 감정의 소유자였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자기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10가지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자신의 사무실에서 몰리가 도적질하는 것, 편지를 훔쳐보는 것, 중상모략, 차를 대접하기 위해 친구도 초대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 집에 들어오면 포로 같은 느낌, 귀에 거슬리는 상소리들 등이었습니다. 이들의 결혼 생활에 대해 한 작가(스탠리 아이링)는 “거창한 이름뿐인 부적절한 결혼, 여러 번 헤어져 지냈으나 1776년(마지막으로 헤어진 때, 요한 웨슬리의 나이 73세)까지는 끝나지 않은 결혼, 1년 내내 계속되는 싸움, 싸움, 싸움”

사실 웨슬리는 사랑 없이 결혼을 했습니다. 그는 거침없이 자기 아내를 향하여 “내가 진 십자가”라고 말하거나 “만약 당신이 천년을 산다고 해도 당신이 끼친 해악을 원상복구할 수 없을 것이요”라는 악담도 퍼부었습니다. 이 둘은 수차례 별거와 재회를 반복했습니다. 나중에 자신의 결혼생활을 회고하며 웨슬리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만약 나의 부인이 훌륭한 아내였더라면 자신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위대한 사역에 충성을 다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이것도 일면의 사실이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요한 웨슬리와 그 아내 몰리”(『복음주의자의 아내들』, 두란노)에 대해서 글을 썼던 윌리암 피터슨은 요한웨슬리는 이렇게 평가합니다. “요한 웨슬리는 그의 일과 결혼한 까닭에 하나님께서 주신 결혼에 신실하지 못한 중죄를 저질렀다. 때때로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일을 사랑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기 쉽다”

제가 이렇게 요한 웨슬리의 실패한 결혼을 이렇게 장황히 말씀드리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사랑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며 둘째는 받아주고 견디는 사랑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요한 웨슬리 같은 영적인 거장도 사랑에서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니 그보다 더 연약한 우리들은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요한 웨슬리가 썼던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라는 글은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러나 그 위대한 글의 십분의 일만큼도 사랑 못한 것이 요한 웨슬리였고 또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위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단지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요한 웨슬리 같은 사람은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일에 더 열심할 수 있었을 것이고, 한 여자를 이렇게 불행으로 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은 이 때문에 결혼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랑에는 절대량이 있습니다. 주님께 전적으로 헌신된 사람은 그 사랑을 사람에게 쏟기는 쉽지 않습니다.

물론 헌신된 복음전도자 옆에 훌륭한 아내가 있을 경우 또한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그 아내가 남편이 쏟아내는 독기와 무관심을 다 받아 주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그 사람의 신앙이 위대해서가 아닙니다. 한 위대한 사람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하고 견디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물이 하나 탄생합니다. 사실 천재들이나 위인들은 성격이 외골수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을 받아주는 사람이 없다면 인물이 탄생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이 위인을 만들어냅니다.

이제는 누구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참고 견디어 주어야 합니다. 요한 웨슬리와 그의 아내는 사랑한 것이 아니라 서로 각자의 길로만 갔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나는 복음 전하는데 바쁘니 당신은 나를 도와달라는 태도였고, 그의 아내 몰리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사랑해주기만을 바랐습니다. 웨슬리의 일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래서 둘은 서로 원망하다 지옥 같은 가정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어느 쪽도 가정을 지키고 보호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것을 내려놓고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참고 견디어주었더라면 이들은 아름다운 사랑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이고, 멀리 있는 백 마리 양보다 가까이 있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우리 주님과 사랑이 가능한 까닭은 주님께서 우리에 대해서 일절 참고 견디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거룩함과 의를 요구하셨다면 우리는 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의와 거룩에 대해서 일절 참으심과 우리의 불의를 견디심으로 우리를 살리십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 혼돈과 공허가 있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지만 우리가 든든히 설 수 있는 까닭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 든든한 요새요 방패요 반석이 되셔서 우리를 견디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회복되고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을 의지함으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