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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믿으니, 사는 날까지 의젓하게 삽시다 (시 37: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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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의 모든 일들은 살다보면 원하는 대로 돼서 마음이 기쁘고 편안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원하는 것과 정반대방향으로 흘러가 마음도 불편하고 사는 것이 매우 힘들어 보일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때에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관리하고 해야 할 일을 바로 잘하여 결국 그것을 이루고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상황이 좋고 마음도 기쁘고 일도 잘되는데 어려울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삶에는 마치 맑은 날만 계속 된다면 온 세상이 사막화되어서 아무것도 살지 못하는 황폐화가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삶에는 흐린 날도 있고, 비오는 날도 있고, 원치 않는 일도 있어야 결국 아름다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의 아픔과 슬픔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기는 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합당한 바른 판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고 해결해 넘어감으로 인해 하나님의 아름다운 삶과 축복을 이뤄가고, 또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찌 생각하면 우리 인생의 진정한 승리는 바로 이런 아픔과 눈물과 고통의 때를 어떻게 해결하고 받아들이고 넘어가느냐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을 봅니다.

두 주일 전에 ‘에베레스트산 올라가려는 것과 도봉산 올라가려는 것은 생각부터 다르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어떤 삶의 목표를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고난을 대처하는 우리의 마음의 자세, 그리고 삶의 이러저러한 모든 것을 극복해가는 마음의 자세가 틀리다고 말씀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하루하루 삶의 소중함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루하루 아주 소중한 삶을 하나님 앞에 이루어드릴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단 한번 뿐인 삶의 순간순간의 기회들을 우리는 결코 소홀히 하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한 순간순간들을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 아름답게 이루어드려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이루는 과정에서 우리 마음과 생활의 자세 실제를 가지고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를 주신 말씀에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설교제목은 ‘하나님을 믿으니, 사는 날까지 의젓하게 삽시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을 믿는 의로운 믿음의 백성이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줄 믿고 신뢰하니 어떤 경우가 닥치더라도 당황하거나 경거망동하지 않고 신중히 유려히 삶의 순간들을 맞이하여 헤쳐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어려웠던 순간이라도 그 순간을 통해서 가장 아름답고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순간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젓하게 사는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자신의 뜻과는 다른 상황이나 평가가 주어지게 될 때 당황하고 정서적인 뒤틀림과 분노가 폭발하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도 큰 해가 되며,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를 끼치며, 또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도 빛내는 것이 못됩니다.
우리 성도라 하는 것은 우리 일이 잘 되었을 때 뿐 아니라 잘 못되었거나 혹은 마음에 원치 않는 대로 되거나 혹은 어려운 일을 만나도 하나님이 섭리하신다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렇게 의젓한 사람을 보면 마음이 기쁘고 평안하고 기대되고 하나님의 역사가 그를 통해서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를 소망하게 됩니다.

우리교회 실천사항 중에 일곱 번째, 우리 주보에도 맨 앞면에 있습니다.
한 번 따라서 합시다.
“기본 수준을 넘어선 의젓한 성도”
바로 기본 수준을 넘어선 의젓한 성도인데, 바로 이와 같은 의젓한 성도들이 되기를 소원하며 오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생각해 보면서 첫 번째 같이 나누고자 하는 것은 선과 의를 심고 은혜와 축복을 거두는 의젓한 삶의 모습입니다.
오늘 25절과 26절을 보니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내 눈앞의 유익만을 보지 않고 내 마음의 감정 상태에 눈이 가려지지 않고 경망하거나 작은 유익에 집착해서 선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사랑과 배려로 선과 의를 심고 있는 유연한 사람들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의젓한 삶의 모습입니다.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받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종일토록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당장 내 눈앞의 것이 아니라 멀리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혜 갚으심을 바라보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돕고 베풀 때 그 자손까지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기쁨과 감사로 선과 의를 심는 삶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멀리 바라보는 거시적 시야가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 삶은 아는 것만큼만 보이고 또 보는 것만큼 우리는 어떤 일을 잘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음악회를 간다고 합시다. 어떤 곡 연주하고 어느 오케스트라에서 와서 연주한다고 생각하고 가면 우리가 잘 듣고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적지만 그래도 오늘 연주할 곡이 무엇인가 찾아서 작곡자도 공부하고 곡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고 또 오케스트라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고 또 기회가 된다면 가서 연주를 들을 곡들을 집에서 두어 번 들어본다면 의외로 우리는 연주회에 가서 늘 듣던 음악이니까 지루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새로운 더 많은 감동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미술전람회에 간다고 했을 때 가서 그림 쓱 훑어보고 오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 전람회에 전시되는 그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찾아서 미리 글도 읽어보고 미리 사진이나 화보집이나 혹은 인터넷이나 우리가 미리 그림을 보면 좀 더 여러 가지 사전지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가서 그림을 보게 되면 우리가 그냥 가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감동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보았던 그림 똑같은 것 또 보네’라고 생각되지 않고 내가 이렇게 사진으로 보았던 그림을 내가 정말 실제 그림으로 보니까 이런 감동이 있구나! 그리고 그냥 보면 깨닫지 못할 많은 일들을 우린 더 세심히 바라보고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의도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보고 많은 아이디어와 영감을 얻게 되리라 생각을 합니다. 내가 알고 준비한 만큼 우리는 내 눈앞에 띄는 현상 속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보고 발견한 것을 어떻게 활용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본 만큼 어떤 일을 이루고 또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서 도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많은 것을 보려면 높은 곳에 올라가서 멀리 바라봐야 합니다. 내 눈앞에 있는 것뿐이 아니라 지금 내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더 높이 올라가면 멀리까지 볼 수 있고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비행기를 탈 때 마다 느끼는 것은 구름아래 있을 때 눈과 비가 오고 영향을 입는 것이지 구름 위로 쑥 올라가면 그 위에는 눈, 비 없는 화창한 평온한 상태가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마음에 갈등이 많을 때가 있습니다. 불평도 많을 때가 있고 내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 삶이 내 마음속에 한 단계 높아지면 내가 왜 그런 것을 가지고 갈등을 겪었나, 왜 그런 것 때문에 내가 불편해 했을까, 내가 왜 그런 것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이러저러한
구구한 말을 했을까 하고 우리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한 단계 더 높아지고, 수준이 높아지는 때에 이뤄지는 것입니다.
한 수준 뛰어넘으면 평안과 감사가 오고 이해와 사랑이 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못된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 마음에 ‘내가 모든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보아야지.’ 하고 결심하고 보면 사실 이해하지 못 할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아픈 상황이 있고, 어려운 일이 있고, 누구든지 이기지 못하는 갈등과 아픔의 수준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 또 이해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누구든지 이해하고 감싸줄 수 있는 것이 우리삶이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어’ 하고 생각했는데 믿음을 가지고 바라보면 ‘아, 그래. 그에게도 이런 사정이 있었구나!’ 라고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이해하니 배려하고, 배려하니 감사하고, 또 우리마음이 더 풍부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결국 멀리 바라보면-기쁨과 감사로 선을 쌓아가고 의를 심어가면 우리의 삶은 더욱 더 큰 은혜를 입게 됩니다.
당장의 유익보다 그 이후에 있을 더 큰 유익을 바라보고 선을 심고 의를 심는 사람이 될 때 우리가 의젓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삶에는 정확한 단기적인 관리도 필요하지만 멀리 바라보는 진정한 지혜의 투자가 필요합니다. 투자라는 것은 지금 당장은 돌아오는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잃어버리고 상실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은 늘 필요한 손익계산만 맞출 것이 아니라 정말 지금 손해 같아도 멀리 바라보고 투자해가는 삶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선과 의를 기쁨과 감사로 심어가는 것이 바로 의젓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더욱이 축복과 은혜를 거두기 위해서는 축복과 은혜를 베풀고 심어야 합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은혜의 법칙을 우리는 늘 가슴에 새깁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은 말씀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부모가 종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습니다. 기도를 심으면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합니다. 사랑을 심으면 사랑의 열매가 돌아오게 됩니다. 선을 심고 의를 심어가면 그것에 대한 우리의 기쁨과 은혜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거둠은 확대의 법칙 속에서 진행됩니다.
씨앗은 떨어져 발아하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거둠은 반드시 유지됩니다. 하나님의 맷돌은 천천히 도나 잘게 부수는 것처럼 때로는 응답이 더딘 것 같으나 더딜수록 더 정확하고 모든 상황을 헤아려 더 최선의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임하시는 것을 봅니다.
특별히 우리는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있는 사람으로 기쁨과 축복을 거두는 이들입니다.

오늘 <30절, 31절>을 보니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 혀는 공의를 이르며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고 말씀합니다. 지혜를 말하고 공의를 이루며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있을 때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다 말씀합니다. 우리의 삶의 의젓한 삶이라는 것은 결국 기준과 원칙이 있는 삶입니다. 원칙이 있는 삶의 든든함과 결과적인 행복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 삶에서 진정한 승리는 원칙의 승리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실수할 수 있고 다 지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과 그런 원칙을 가지지 못하고 움직이는 사람을 봅니다. 어떤 사람의 삶의 움직임이 원칙 속에서 일관성 있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우리는 예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편안할 수 있고 무엇인가 일관성을 가지고 원칙 속에서 이루어져 가는 모든 일들을 보고 우리는 무엇인가 기대합니다.

그런데 늘 우발적이고 감정의 기복이 심해서 ‘잘 할 때는 잘하는데 아닐 때는 영 아니다.’ 생각하면 우리는 가까이 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언제 또 그 마음이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언제 그 감정의 상태-기복이 언제 흔들릴지 몰라서입니다. 결국 사람은 처음에 재미있고 기분 좋게 해주는 사람 곁에 있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예측 가능한 사람, 나에게 진정한 유익을 주는 사람 곁에 있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쉽다, 힘들다, 편하다, 어렵다하는 것이 판단기준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내게 어떤 기쁨과 발전과 유익을 줄까 하는 것에 우리는 더욱 더 마음이 갑니다. 왜냐하면 힘들다, 쉽다, 어렵다, 편하다 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똑같습니다. 적응하게 되니까 일정한 시간만 지나면 결국 우리들에게 느끼는 것은 비슷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원칙이 있는 삶의 든든함과 결과적 행복, 즉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두는 삶이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삶의 원칙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둔 것이라면 그것은 더 없이 행복합니다.

<시편 119편 105절>을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세운 기준은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발전하면 과거가 어리석어보이는 거죠.
꼭 나빠서 변한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또 감정은 수시로 바뀝니다.
‘사랑이 변하니?’ 이런 대사 있죠? “변하죠.”
사랑이 감정이라고만 생각한다면 감정은 변하기 때문에 사랑도 변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사랑은 감정만이 아닙니다. 사과 좋아하다가 배를 좋아하게 됐어요. 그걸 어떻게 설명합니까? 그냥 감정의 변화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랑은 감정만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의지도 포함되어 있고 감정으로 시작된 사랑이 의지로 유지되고,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마지막 가장 고귀한 헌신과 희생과 아름다운 배려와 섬김의 마음으로 그 사랑은 꽃피워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감정이 우리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모든 것은 감정에 따라서 내 마음의 선호 기호에 따라서 움직여지기를 원하고 그것이 기준이 된다면 우리는 언제나 가변적으로 춤출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겨울에 옷을 잘 만들었어요. 그래서 잘 팔았습니다. 많이 사갔어요. 그 옷을 여름에도 팔수는 없습니다. 여름 되면 아무리 잘 만든 겨울옷도 팔지 못하고 이제는 여름옷을 새로 만들어서 팔아야 합니다. 아무리 이 옷이 좋다고 해도 여름에 겨울옷을 많이 팔수는 없습니다. 다음에 겨울이 됐어요. 작년에 많이 판 옷을 또 팔수 있을까요? 작년에 많이 팔았다면 이제는 또 한해가 지나감으로 유행이 지났을 겁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선호도의 관심이 또 달라질 겁니다. 그때는 또 다른 옷을 새롭게 만들어서 팔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기호와 정서와 모든 선호도가 달라지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에 기준을 두고 어떤 일을 결정하게 된다면 결국 그것은 계속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꼭 나빠서가 아니라 우리 감정은 그렇게 흐르고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함없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 은혜의 법이 우리 마음의 기준과 그리고 또 원칙이 근거가 돼야 합니다.

물론 진리는 불변하지만 시대에 따른 올바른 적용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은 분명하지만 시대에 따라 적용하는 모습은 각각 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변하는 진리의 근거를 가지고 있게 되면 그것이 아무리 적용의 변화를 갖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든든하게 우리들에게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아무리 깨끗해도 부패한 인간의 마음이니 바를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깨끗해’라고 말하거나 다른 사람 더럽다고 공격하는 사람은 너무 무지해서 자기의 더러움을 모르는 사람이거나 자기의 더러움을 억지로 감추거나 포장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 유대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붙잡아서 데리고 왔습니다. 돌로 쳐서 죽입니까? 아니면 그냥 용서해 줍니까? 예수님을 곤경에 몰아넣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돌로 쳐 죽이라”면 사랑이 없다고 말할 것이고, “그냥 놓아줘라”하면 율법을 어기는 자라 비난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비아냥거리는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숨을 죽이시고 바닥에 앉으셔서 길거리 바닥에 쓰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그 사람들은 그 글을 읽고는 하나 둘 슬며시 다 도망쳐서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한다. 그런데 이제는 다시는 그와 같이 하지 말라”

대단한 진리의 가르침이십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정말 대단한 지혜와 힘과 능력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지혜가, 이런 힘과 능력이 어디서 생성됐을까요? 진정한 사랑과 배려와 아낌과 용서와 베풂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정말 그 여인에 대한 사랑, 그 여인에 대한 배려, 그 여인에 대한 기회를 줌, 그 여인에 대한 진정한 아낌 속에서 이와 같은 지혜가 생기시게 되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또 그들에게도 진정한 가르침을 주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공포하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 끝날 까지 진리로 남아서 우리를 지켜줄 하나님의 말씀이 원칙의 기준이 되는 것이 우리들에게 합당하며 우리의 삶의 길을 밝혀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집니다.

오늘 <27절> 이하를 보니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영히 거하리니 여호와께서 공의를 사랑하시고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 비록 우리눈앞에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아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축복이요, 기대할 수 있는 것이 감사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 마음이 원하는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이 지상에는 많은 산들이 있습니다. 가장 높은 산도 있고, 동네 뒷산 같은 얕은 산도 있습니다. 가장 높은 산만 존재하고 나머지 ‘나는 최고가 아니야’ 하고 바다 속에 빠져야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그 자리에 존재해서 각각의 아름다움을 빛내고 모두를 서로 아름답게 빛내줄 것입니다.

숲속에 가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빼어 꼿꼿하게 자란 나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풀들도 있고 줄기들도 있어서 나무들을 빙빙 감아 돌아가며 기생하는 식물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정말 바닥을 기는 이끼와 같은 것들도 있고 많은 다양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결국 다 합하여져서 서로 공생하고 서로 어울려짐으로 말미암아 원대한 숲의 장관을 이루게 되는 것을 봅니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어도 지금 내게 주어진 여건과 형편,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모든 것이 가장 귀한 것이라고 느끼는 자존감을 가지고 살 때 우리는 진정으로 멋진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읽은 얘기라서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억이 나는데 어떤 사람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우표-오래된 우표를 딱 두 장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게 세계에서 가장 비싼 우표래요. 그런데 이 사람이 공개적으로 두 장 중에 한 장을 찢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랐겠지요. “그렇게 비싼 우표를 찢다니 자기 재산을 막 버렸어.” 그래서 그 사람이 자기 재산의 절반을 잃어버렸을까요? 그러면 제가 얘기 안하겠죠.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세계에서 딱 두 장이 있는 우표가 세계에서 딱 한 장밖에 없는 우표로 되었어요. 그래서 그 값이 두 장을 합한 것보다 두 배로 더 올랐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한 장을 찢어버림으로 재산이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 아니라, 한 장을 찢어버림으로 재산의 총액은 두 배가 됐다고 합니다. 이게 뭐죠? 희소성의 원칙입니다. 세상에 두 개있는 것의 값하고 세상에 한 개밖에 없는 것의 값은 전혀 틀려요.

우리는 세상의 유일한 사람, 여러분 지상에 60억의 인구가 있는데 여러분하고 똑같이 생긴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얼마나 희소합니까? 여러분은 보석입니다. 얼마나 멋진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인사합시다.
“당신은 정말 멋져요. 저는 당신처럼 멋진 사람 한 번도 못 봤어요.” 그렇죠. 우리는 옆에 있는 사람과 같은 사람을 한 번도 못 본겁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유일하게 멋진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보물입니다. 보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존귀한 자입니까? 내 일이 잘돼도, 못돼도, 어려워도, 그리고 힘들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배롭고 존귀한 가치가 있는 자존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영적인 자존감을 가져야 됩니다.

두 번째 위기를 관리하는 의젓한 사람이 돼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삶에 있어서 위기관리 능력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능력이 있어진다는 것은 소위 말하는 위기관리 능력이 더 커지는 겁니다. 침묵할 때 침묵하고, 말할 때 말하고, 조용히 말할 때는 조용히 말하고, 크게 말할 때는 크게 말할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이 지혜롭고 의젓한 사람입니다. 남의 어려움이나 약점은 침묵하고, 남의 장점과 칭찬은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이 지혜롭고 의젓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른 줄은 아는데 실행이 잘 안되죠. 남의 약점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되는데 꼭 그것을 말하고 싶어요. 남의 칭찬은 큰 소리로 말해야 되는데 괜히 말하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아마 남자들 대부분 이런 경험이 많을 겁니다. 참 이상하게 꼭 그렇게 되더라고요. 뭐 밖에서 식사를 많이 하는데 어느 날 배가 고파서 집에 가서 밥 좀 먹어야 되겠다하고 부지런히 집에 갈 때가 있지 않습니까? 김치찌개 생각도 나고 집에 가서 ‘빨리 가서 씻고 얼른 손만 씻고 밥부터 먹어야지.’ 하고 집에 가면 그런 날은 또 이상하게 집에 밥이 없어요. 참 이상해요. 그런 날은 밥이 없어요. 그럼 여러분 무슨 생각이 들어요. 배가 고파서 손만 씻고 얼른 밥부터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밥이 없어요. 그때 이런 말하면 어떻겠습니까? “당신 뭐야? 집에 밥도 안 해놓고” 거기다 이런 말 붙이면 사건 나는 겁니다.
“맨 날 집에서 놀면서”
집에서 노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이러면 큰 싸움되는 겁니다.
그럴 때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요새 식구들이 식성이 좋나봐. 당신들이 식구들을 잘 가꿔줘서 건강해서 밥도 잘 먹고 고마워. 내가 얼른 가서 햇반 좀 사올게”
그리고서 부지런히 뛰어 내려가서 햇반을 사오면,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 상당히 아내에게 신뢰를 쌓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언제나 잘 관리하고 경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아가 투자한다는 개념으로 우리 삶을 좀 더 넉넉히 쓰고 마음 넓혀 운용해 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기의 순간에 다른 사람을 보호하고 그것을 통해 오히려 자신의 진정한 삶의 가치를 높이는 사람들은 정말 의젓한 사람들입니다.

요셉의 경우를 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에게 정말 말도 안 되는 모함을 받았습니다. 요셉이 보디발 앞에 섰을 겁니다. 보디발이 이러저러한 문초를 했을 겁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에 대해서 일절 말하지 않았습니다. 정황을 볼 때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입장을 헤아려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주인이 그동안 나를 인정해 준 것만 해도 감사한데 내가 만약 주인의 아내에 대해서 정말 그 사람이 잘못해서 내게는 모함까지 씌었고 그 사람의 행실이 어땠다는 것을 내가 주인에게 알린다면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다면 도대체 주인의 얼굴이 뭐가 되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내가 주인의 마음에 보은하는 것인가, 내게 이제까지 베풀어주신 은혜만 해도 감사하다 하고 그는 침묵했을 겁니다. 보디발이 요셉을 몰랐을까요? 보디발은 요셉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건의 전말이 어떤지 보디발정도 되면 그래도 일국의 경호 대장쯤 되는데 큰 인물입니다. 알 수 있을 겁니다. 보디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요. 그러나 보디발은 이 요셉에 대해 알 수 있었기에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요셉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국에서 팔려온 종이 그 집의 주인이 되는 사람의 여인에게 그와 같은 잘못을 했다고 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 일입니까? 보디발이 그를 살려줬다고 하는 것은 보디발의 그에 대한 각별한 마음 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냥 감옥도 보내지 않고 그는 왕실의 죄인들이 거하는 감옥으로 보내졌습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좀 좋은 감옥쯤 되겠지요. 거기에 보냈습니다. 거기다 왕실의 죄인들과 만나서 거기서 교재가 이루어지고,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의 꿈을 풀이하고, 그것으로 바로 앞에 갈 기회가 되고, 바로의 꿈을 풀이해 주고, 바로의 총리가 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매우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요셉도 의로운 사람이잖아요. 정말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마리아가 정혼한 상태에서 이와 같이 잉태를 했을 때 조용히 끊고자 하지 않습니까? 그 때 천사가 나타나서 요셉에게 이러저러한 모든 기회를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 그리고 구약에 나오는 야곱의 아들 요셉, 모두가 의젓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 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러할 때 우리들에게 정말 의젓한 삶의 자세를 가질 때 결국 그것이 큰 선을 이루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우리들에게 어떤 어려운 때라는 것은 큰 기회입니다. 남들도 내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할 때 ‘내가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찾아서 그것을 도와주면 그 사람은 반드시 큰 열매를 얻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입히면 결국 때가되면 그것이 익어져 아름다운 열매로 돌아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감격스러워요. 뭐냐 하면 주님은 기적을 행하는 분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렸고, 병든 자를 고쳤고, 귀신을 쫓았고, 바다의 풍랑을 잔잔하게 하셨고, 말씀 한 마디에 수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고, 오병이어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은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으로 구원을 얻었습니까? 주님의 기적으로, 능력으로, 권세로, 그걸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겁니까? 그게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그와 같은 주님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정말 초라하고 비참한-사람들에게 채찍 맞고, 침 뱉음 당하고, 기진해서 십자가를 지고서 비틀비틀 가다가 그것도 못 져서 남에게 폐 끼치면서 다른 사람까지 끌어와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지게 하고 비척거리며 골고다의 언덕을 오르셔서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와 같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그 힘없이 연약함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가장 그 연약한 모습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얻고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과연 우리 삶에 가장 훌륭한 때는 언제인가?

내가 모든 것을 능력 있고 호기 있게 휘두를 때인가, 아니면 정말 연약하고 어려운 때지만 그 가운데서도 내가 무엇인가 다른 이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그것을 이룰 때인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결국 내게 어떤 위기의 순간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가장 귀한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의로운 사람이고 의젓한 모습이지요. 어떤 위기에서도 결국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위기를 극복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섭리를 수용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가졌을 때 승리하는 의젓한 모습을 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우리 잘 알죠, 왕의 신상에게 절하라. 왕이 세운 신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풀무 불에 던지리라.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 절할 수 없었습니다. 풀무 불에 던지게 됩니다. 왕이 너무나 아끼는 안타까운 사람들이어서 한 번 더 기회를 주는데 ‘정말 신상에게 절하라’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가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풀무 불에 던져져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가 풀무 불에 던져져서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그대로 죽는 것을 선택하겠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다른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고,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우리는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죽겠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좋은 결과만이 아니라 좋지 않은 결과까지도 수용할 수 있는 진정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이룰 최상의 기회를 봐야 합니다.
파도타기는 파도가 있어야 탈 수 있어요. 우리는 인생의 그 파도타기를 즐길 수 있어야 됩니다. 여름 되면 텔레비전에서라든지 서핑 게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큰 서핑보드가지고 가서 파도를 타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 멋있는 것 같아요. 그렇죠? 여러분 안타고 싶으세요? 저는 그거 한 번 해 봤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그 서핑보드 배에다 깔고서 헤엄쳐서 바다로 한참 멀리 나가잖아요. 파도가 일어나면 거기서부터 서핑보드를 타서 서핑을 하는데 너무너무 멋있는 것 같아요. 파도를 타고 오는데 너무너무 멋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게임하는 것이나 중계하는 것이나 봐도 그렇지만 언제나 맨 마지막에는 굴러서 떨어집니다. 파도가 굴러서 떨어집니다. 한 번도 안보신분들 같아요.

굴러서 떨어지지 않습니까? 그 해안까지 그냥 끝까지 타고 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다 하다가 결국은 어디까지 오다가 떨어지냐 그겁니다. 그런데 굴러 떨어지면 그 서핑보드는 어딜 가죠? 날아갈 것 아니에요. 그렇잖아요. 사람은 이쪽으로 밀려오고 굴러 떨어지니까 보드는 저쪽으로 가기 때문에 사람의 발목에 끈으로 묶어놨습니다. 뭐냐 하면 파도를 타고 오면 반드시 어느 순간에 굴러 떨어져서 분리되니까 그것 잃어버리면 비싸잖아요. 그러니까 그것을 발목에 묶어서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그런 것입니다.
파도타면 결국 꼭 떨어집니다. 그럼 굴러 떨어졌다고 해서 그것이 다는 아니고 또 다시 타러 나갑니다.
우리 삶은 인생의 파도를 타고 파도 때문에 굴러 떨어져도 또 타고 그와 같은 기쁨으로 사용할 수 있을 때 유려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위기를 기회로 삼을 줄도 알았죠.

아브라함은 아들이삭을 바치라는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면 내가 끌어안고 있으나 내놓으나 결과는 똑같다. 똑같은 결과를 이룰 바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내가 끌어안는다고 해서 여러분 것이 됩니까? 아니죠? 하나님이 원하시면 결국 그대로 됩니다. 그렇다면 그럴 바에는 내가 하나님의 은혜대로 움직일 때 그것이 믿음의 조상이 되고, 축복이 되고, 은혜로 임하는 것입니다.
이삭도 잃지 않았고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축복하셨습니다.

여러분 홍해를 건널 때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해 볼까요?
정말 저는 애굽 백성과 바로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려 열 번의 재앙, 마지막 열 번의 재앙 때는 유월절의 역사입니다.
정말 애굽의 모든 장자-동물과 사람의 모든 장자가 다 죽어버렸습니다. 거기서 손들고 나가라 ‘네 백성을 끌고 빨리 나가라’ 해서 탈출하고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런데 홍해 앞에 막히니까 어디 갈 데가 없잖아요. 그것을 알고 애굽의 군사들은 또 쫓아옵니다.
저는 인간적으로 따지면 바로가 모세보다 훨씬 우수한 것 같습니다. 모세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냥 백성들이 ‘하나님 나는 이것을 볼 수 없으니 나를 죽여 이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소서’ 모세도 훌륭한 지도자지만 한계에 닥쳐서는 이랬습니다.
바로는 어떤 한계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또 일어납니다.
유월절에 대재앙을 당했으면서도 그에게 또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또 일어나는 사람입니다. 저는 인간적으로 따지면 바로만한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멋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멋져도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우수해도 하나님이 함께하는 모세가 결국 승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어찌 하나님을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 결국 최종적인 승리를 하는 것입니다.
홍해가 가로막혔을 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통해서 생명을 구하는 바다가 되고 애굽의 병거와 애굽의 모든 군사들은 그 홍해에 모두 뭍이고 수장되어서 죽음의 바다가 되었던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데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위기를 기회로 삼는 것-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가로막힌 홍해가 그들에게 생명의 바다요 그들을 가로막는 자들에게는 죽음의 바다가 되어서 다시는 그들을 따라오게 하지 못하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기를 기회로 삼는 의젓한 믿음의 백성이 돼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까지 기쁘게 하는 의젓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저는 정말 우리가 의젓한 사람이 되되 매력 있는 사람이 돼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정말 매력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시간이 갈수록,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은혜를 느끼고, 기쁨을 느끼고, 같이 있고 싶은-처음에는 별로 그런 것을 몰랐는데 시간이 가면서 점점 좋아져요. 그를 위해서 저절로 기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고 절대 그와 같이 있고 싶다-이런 사람은 우리에게 정말 기쁨과 은혜를 끼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수려한 건물도 앞에서 햇빛이 비취면 그 면은 반짝이지만, 그 뒷면에는 그늘이 지는 법입니다. 햇빛 비취면 반짝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뒷면에 그늘진 면이 있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건물에도 청소도구함 넣는 곳도 있고, 쓰레기통도 있고 다 있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 이러저러한 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평가받아야 될 부분들을 가지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언제인지 야구선수들이 모여서 축구대회 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런데 야구 선수들이 축구하는 것을 보고 ‘누구는 좋은 선수야, 나쁜 선수야’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야구선수는 야구장에서 게임하는 것 보고 ‘훌륭한 선수야, 아니야’ 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평가할 때 그렇게 평가하지 않으면 늘 실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정말 다른 사람을 매력 있게 만들어주고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대단히 매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여러 왕이 바뀔 때마다 중용되어 총리를 여러 왕에 걸쳐서 했습니다. 사람마다 왕이 되면 이 다니엘을 중용해서 썼습니다.

디모데는 사도바울에게 매력 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나의 곁을 떠나서 가버렸지만 ‘디모데야, 너는 지금 빨리 와서 나를 도와 달라. 겨울이 돼서 항구가 얼어붙기 전에 빨리 와서 나를 도와 달라. 아무리 어려울 때도 내가 너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너는 거절할 것이 아니고, 또 그것을 기쁘게 여길 줄로 믿기에 이런 얘길 한다.’ 하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이 다 내 곁을 떠났지만 의원 누가만 오히려 남아서 내 곁에 있다.
정말 많은 사람이 다 사도바울 곁을 떠났지만, 누가만 남아서 사도바울 곁을 지켜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는 그 누가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 가운데 정말 매력 있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물어볼 때 추천을 요구할 때 어떻게 얘기합니까?
저도 목사로서 사역을 하다보니까 추천을 해줘야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추천서를 쓰기도 하고, 가끔가다 전화가 올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 교회 목사님들이 다른 데로 이전하실 때 있지 않습니까? 가끔가다 보면 저희도 그렇게 하고요 다른 교회도 물론 마찬가지입니다. 전화 받을 때가 있습니다.
“담임 목사님, 어떠십니까?” 하고 물어보면 대답해 드릴 때, “정말 훌륭한 분입니다. 목사님 곁에 두시고 쓰시면 정말 큰 도움이 될 거고, 잘 가르치시면 큰 인물이 될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참 좋은 거지요. 그런데 그렇게 말 못하고 “훌륭한 사람인데, 잘 살펴보시고 정말 합당하다고 생각하시면 잘 가르쳐 주십시오.” 이러면 좀 난감하지요.

전에 교역자들과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수련회 마치고 단체로 가서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어떤 내용이냐면, 여학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신문사에 기자로 취직하기를 원했는데 다 떨어져서 나중에 패션 잡지사에 입사를 했는데 안타깝게도 기자가 못되고 사장의 비서가 됐습니다. 그런데 그 사장이 아주 굉장히 까다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근무를 하다가 일정기간 마치고 마지막 다른 곳의 신문사에 지원을 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을 데리고 있었던 사람이 추천서를 써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이러저러한 과정을 다 쓰고서는 맨 마지막에 뭐라고 썼냐면 이렇게 썼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이 사람을 고용하지 않으면 당신은 멍청이다’
당신이 이 사람을 고용하지 않으면 당신은 바보다. 그 말은 뭐예요. 꼭 고용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추천서 받고 고용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정말 매력이 있는 겁니다. 우리 스스로 매력을 가지도록 준비를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매력을 발견해서 그를 빛내주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우리의 매력적인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게 해야 합니다. 정말 대하면 대할수록 정말 마음이 끌리고 함께 하고 싶고, 뭔가 같이 하고 싶고, 이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의젓한 사람이라는 것은 때로는 화도 나지만 화내면 결국 손해 보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이겨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화내면 나중에는 몇 배로 갚아야 되잖아요. 화내면 손해라는 것을 알죠.
분노를 참는 사람이 의젓한 사람입니다.
분노를 다스리면 바로 그 뒤에 예수님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분노를 다스리면 바로 그 뒤에 보석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화난다는 것은 그 화를 참으면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계산과 모든 것에 능숙하되 순수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어리석어서 순박한 것이 아니라, 삶을 아름답게 살고 싶은 지혜가 있어서 순박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어차피 살만큼 영악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순수해지기 위해 노력해야만 순수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죄로 말미암아 오염되고 부패됐기 때문에 가만 놔두면 순수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순수해지려고 애를 쓰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감정과 의지와 희생과 헌신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내 마음에 드는 대로 하면 정말 우리 삶은 바뀝니다.
감정은 흔들리니까.
그렇지만 사람은 감정만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의지적으로 그 일을 유지해나가는 것입니다. 희생과 헌신의 심정으로 그 일을 꽃피우고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것이에요. 우리는 정말 모든 일에 대해서 능숙하고 노련하고 숙련된 사람이 돼야 합니다.
숙련되고 노련하고 능숙하다는 것이 부패되고 그만큼 어떤 일에 대해서 노해했다는 부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능숙하고 숙련되고 노련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박함을 위해서 애쓰게 될 때 그것이 능력 있으면서도 순박한 사람이 되는 의젓한 길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탁월하되 겸손해야 합니다. 또한 능숙하되 순박해야 합니다.
순수함은 결코 노력해야만 합니다. 순수함을 이길 능력도 없고 순수함보다 기쁠 수 있는 일도 없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은 순수한 성도들이 되기를, 그렇게 노력하는 성도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가 이 세상 떠날 때에 사랑하고 떠날 수 있었음에 대해서 감격할 수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흡족하게 모든 것, 사람들,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있는 것 다 나눠주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 나눠줄 것이 있기 위해서 우리는 애써서 모아야하고, 애써서 우리는 소득 해야 되고, 우리는 또 땀 흘리고 수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수고하고 애쓰고 모은 것을 나눌 수 있을 때, 그 삶이 우리들에게 가장 큰 축복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잠언 16장 32절>을 보면 한 번 따라서 합시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우리 마음에 정말 어떤 어려움가운데도 의젓하게 대처하는 믿음을 가진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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