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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알의 밀알 (요 12: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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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알의 밀알이라는 제목으로 증거하겠습니다.
오늘은 순교자주일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며 순교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 뜨거운 헌신, 신앙을 되새겨보는 시간이 되기 원합니다.
오늘 말씀 24절에 이런 구절을 보게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너무나 많이 듣고, 너무나 잘 아는 구절입니다.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고, 그리고 죽지 않으면 그곳에는 아무런 변화도, 열매도 있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1.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 아닙니다.

여러 해 전에 이집트의 피라밋 속에서 밀알 몇 개가 낟알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수천년이 지난 밀알입니다. 그런데 수천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땅이 건조하고 습기가 없으니까 썩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었더랍니다. 그런데 그 밀알들을 사람들이 습진 땅에 옮겨 심어보았답니다. 그리고 이 밀알에서 싹이 나고, 열매가 맺힐까 기대했답니다. 그런데요, 놀랍게도 땅에 떨어져 심기워진 그 자리에 싹이 나고, 열매가 맺더랍니다.

당연한 이야기일지 모르나 여기에서 하나의 짚고 넘어갈 원리들을 보기 원합니다. 밀알이 떨어져 열매를 맺으려면, 우선 땅에 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묻히고, 그리고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그리고 난 후에야 비로소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이 원리에는 대부분의 씨앗들 모두가 해당됩니다. 벼도 그렇고, 보리도 그렇고, 콩도 그렇습니다. 아무런 희생도, 내어놓음도, 수고도 없이 나는 나고, 변화는 변화대로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미련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아무런 희생과 헌신과 수고 없는데 시간이 흐른다고, 역사가 깊다고 달라질 것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수많은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며 있다는 것은 그 만큼 이기적이었고, 희생하지 않았고, 또한 아무런 수고도 없었다는 반증일 수 잇다는 것입니다. 즉 그 동안 십자가를 지지 않았기에 열매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2. 작은 한톨이 던져져 온땅을 뒤덮을 수 있습니다.

비록 작은 한 톨일지라도,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겠느냐를 생각하며 떨어질 수 없습니다. 희생과 헌생과 수고, 순교는 이것을 통해 무슨 대가나 결과를 계산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그것이 한 톨에 불과하고 지금 당장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심정과 기분일지라도 하나님께 맡기며 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고, 그것이 믿음이며, 그것이 한 알의 밀알의 본분입니다. 비록 적은 몸부림 같고, 헛수고같이 생각될지라도 그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안 될 일도 못할 일도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일본엔 우리나라 같은 대형교회가 없답니다. 그렇지요, 세상에서 제일 크다는 교회들은 다 한국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니까요. 그리고 그곳에 기독교인들의 숫자도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요, 그 진실, 신실함의 전통이 남아있답니다.
그 중에 나가노 목사님이란 분을 소개하고 합니다. 그분은 ‘가네자와’란 곳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그곳은 불교마을이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했는데 교인은 아내와 두 어린 자식들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주일 부인 하나를 놓고 5년을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정성으로 설교했습니다. 사실, 목사는 부인 앞에서 설교하기가 제일 어렵습니다. 부인에게 설교하면 “니나 잘해라!”는 말을 듣기가 일쑤입니다. 어느 날 폐병환자로 뼈만 남은 ‘하천풍언(가가와 도요히코)’ 이란 신학생이 그의 개척교회를 찾아왔습니다. 나가노 목사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기어코 5년 만에 교인이 100% 부흥되었다고!” 나가노 목사는 각혈하는 하천풍언을 정성을 다하여 보살펴주었습니다. 없는 살림에서도 좋은 음식과 약을 주면서 정성껏 기도해주었습니다. 1년이 넘어가면서 병마의 세력은 차츰 물러가고 생기를 회복하고 병마에서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치르던 때라서 가난한 거지들이 많았습니다. 일주일에 몇 차례씩 거지 떼들이 5-10명씩 몰려와서 먹을 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저들에게 찬밥을 주지 않았습니다. 나가노 목! 사 부부는 부엌에 가서 손수 밥을 지어 주먹밥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가네자와 동네 사람들은 정월 초하루 아침에 모두 동네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동쪽에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절을 했습니다. 일종의 우상숭배의 풍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거지 떼들은 새까맣게 올라와서 동쪽이 아니라 서쪽을 향해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자기들은 나가노 목사님에게 새해에 세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가노 목사에게서 사랑과 전도와 기도생활을 배운 하천풍언 청년은 신학교를 졸업한 뒤에 고베와 도쿄의 빈민들을 위해서 목회를 했습니다. 빈민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변비랍니다. 항문에 변이 차돌처럼 굳어 있어서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장갑을 끼고 손으로 후벼 냅니다. 그래도 안 되면 항문에 자신의 입을 대고, 차돌같이 굳어 있는 변을 침으로 녹여서 빨아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일본 기자가 하천풍언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그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배운대로 합니다. 제 선생님은 제가 각혈한 핏덩이를 닦아 주셨습니다. 그분이 하신 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

중국 남경에서 일본인들이 무참하게 중국인을 학살한다는 소식을 접한 하천풍언 목사는 6천리 길을 걸어서 중경에 있는 장개석 총통을 만나러 갔습니다. 일본을 대표해서 장개석 총통을 만나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고 큰절로써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시아에서 가장 악한 일본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일본은 망할 것이고, 일본이 망해야 아시아가 산다고 했습니다. 패망한 일본을 도와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장개석 총통의 부인 송미령 여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분을 모셔다가 개인적으로 성경공부도 했습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했습니다. 일본 군대와 함께 민간인들이 철수합니다.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나라에서 일본 민간인들이 철수할 때 현지인들로부터 테러를 당하는 사건이 많았습니다. 일본 패망 당시에 중국 땅에 있던 일본인의 숫자는 200만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테러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천왕의 항복 성명과 동시에 장개석 총통이 포고령 제1호를 내렸습니다. 철수하는 일본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자는 중형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전 이후 포고! 령 1호입니다. 철수하는 일본인들에게 식량도 가지고 가도록 선한 조치를 취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 배후에 하천풍언 목사의 감동이 있었던 것은 물론입니다.

종전 후 승전국 세 나라 대표들이 모였습니다. 미국, 소련, 중국 정상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소련 대표 스탈린은 패전국 일본 영토를 분할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북해도’와 ‘하태’는 소련에 이양시키고, 일본 본토는 미국에, ‘구주’와 나머지는 중국에 이양시키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일본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여기에 반기를 든 사람이 장개석 총통이었습니다. 전쟁의 목적은 평화이며, 영토분할은 제2의 무서운 침략이라고 거부했습니다. 스탈린의 안건에 동의하였다면 일본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중국이 일본에 전쟁보상금을 청원했더라면 일본은 전후 재건할 여지가 없는 어려운 처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장개석의 배후엔 하천풍언 목사의 역할이 있었고, 하천풍언 목사의 배후엔 나가노 목사가 있었습니다. 교인 하나를 놓고 5년을 설교한 나가노 목사는 세상적 기준으론 실패한 목사였으나 그는 분명 실패한 목사가 아니었습니다. 「빙점」의 저자 미유라 아야꼬 여사도 하천풍언 목사도 위대하지만, 그분을 배출한 나가노 목사가 더 위대하다고 썼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산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역사적으로 보여! 준 사람들입니다.

비록 한 알일지라도, 그 한 알이 떨어져 열매를 맺고, 그 열매들이 다시 떨어지면 제 아무리 넓고, 척박한 광야일지라도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지천으로 꽃이 피고, 지천으로 곡식이 열린 땅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늘 한알, 한톨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3. 생명을 얻기 위해선 생명을 내놓아야 한다.

25-26절입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도록 보존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여기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란 아직 세상적인 기준과 가치관을 생명처럼 붙잡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란 자기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 자기 자랑은 없어지고 오직 예수님만 자랑하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낮아지시니 하나님이 그를 높이셨습니다.
스스로 쟁취한 영광은 영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높여야 영광스런 생애가 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 포기해야 할 것이 있으면 포기합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어져야 할 것이 있으면 십자가 밑에서 죽읍시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인간관계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고 삽시다. 거기에 열매가 있고, 평화가 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얼마 전 터어키에서 있던 일입니다. 터키는 우리나라 남북한 합친 땅보다 8배나 큽니다. 그곳 중동부 ‘말라티야’라는 곳이 있습니다. 지난 성지순례 때 이곳에서 하루를 잤습니다. 인근에 에덴동산으로 추정되는 지역이 있어 굉장히 긴 길을 버스를 타고 간 곳입니다. 가는 길에 갑자기 눈이 많이 와 수십대의 차들이 길가에 처박히는 중 다행히 우리 버스만 유일하게 목적지를 갈 수 있었습니다. 그곳이 말라티야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4월 18일 오전 10시 독일인 선교사 틸만이라는 분과 그와 함께 현지인 선교사 네자티(Necati, 35세,7년 전 부터 예수를 믿었음), 우르(32세, 2년 된 신자)가 순교합니다. 이들은 이곳에서 출판사를 차려놓고, 소책자 및 성서를 번역하고, 보급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공개적으로 기독교인들을 양육하던 일을 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3개월 전 그러니까 올해 초부터 이슬람 과격단체 타리캇 소속 20대의 젊은이들이 접근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성경공부를 시켜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4월 18일 그들은 총과 칼, 줄과 수건을 준비하고 그들을 찾아옵니다.

강제로 형제들을 묶은 그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알라만이 참신이라고 고백하고 강압합니다. 이를 위해 고문하며 그 과정을 핸드폰으로 찍었습니다. 처음에 네자티와 틸만이 고문을 당하고, 우르는 숨어서 경찰에 신고를 합니다. 그리고 결국 방문을 열고 나와 순교하게 됩니다. 화면에 의하면 현지인 네자티는 99번 칼에 찔리고, 독일인 틸만 선교사는 156번 찔립니다. 그리고 우르는 셀수도 없을 만큼 찔려 죽습니다.
이들은 부인하라고 고문하며 손가락을 잘랐고, 코, 입, 항문까지 칼로 지르고 벌렸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렇게 죽인 선교사들의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고 아직 살아있는 다른 형제들 앞에서 그 창자를 토막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목이 베어졌습니다.

이런 일이 얼마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직후 틸만 선교사의 아내 수산나선교사는 앙카라 tv를 통해 고백했습니다. ‘나는 저들을 용서합니다. 저들은 자시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현지인 순교자 네자티는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비록 무슬렘으로 태어났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죽을 것입니다.”

죽은 네자티의 아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고,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죽었기에 그의 죽음은 정말 의미있는 죽음입니다. 네자티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선물입니다. 나는 그와 인생을 같이 했다는 것 자체로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터키 현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으로 곤경과 순교를 당할 수도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네자티의 장례식장에 수백명이나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외쳤습니다. 우리도 기독교인들이다. 우리도 함께 죽여달라.

텔레비전에 나왔던 틸만의 아내 수산나는 그때 자신들은 이곳에서 9년 반 동안 살고, 남편이 이곳에서 죽었지만 이 죽음은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죽어 말라티야에 땅에 묻히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족과 함께 이 곳에 살고 있습니다. 내 아이들은 이곳에서 학교에 다닙니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곳으로 옮기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곁에서 이렇게 살기 원합니다. 우리는 남편의 묘에 오고 가며, 어린 내 딸들은 아버지의 산소에 꽃을 드리며 돌보며 그렇게 살기 원하는 것을 나는 압니다.”

터키는 사도 바울을 고향입니다. 그곳에는 수천년의 기독교 역사가 새겨져 있는 땅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복음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는 땅입니다. 지금도 선교사들은, 신자들은 특별히 현지인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순교를 마다하지 않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그 피는 반드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터키는 요즈음 유럽연합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조건을 만족시키려 무던히도 애를 씁니다. 터키는 유럽의 식량창고라 합니다. 터키로부터 값싼 농산물이 유럽에 공급됩니다. 하지만 유럽은 터키가 유럽연합의 유일한 이스람 국가가 될 것을 걱정하며 막고 있는 실정입니다.
터키도 그것을 분명히 압니다. 더욱이 이민족에 대해 관대한 독일에서도 외국인 학생들에 대해 마냥 관대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 대표적 대상이 터키라고 합니다. 독일로 밀려드는 수많은 터키인에 대해 독일이 매우 불편해 하는 관계 속에서 일어난 천인공노할 일입니다.

분명 터키가 변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에 돌에 맞아 죽어야 하고, 칼에 찔려 죽어야 하는 그 땅에 마치 스테반의 순교를 통해 사도 바울이 나왔던 것처럼 지금은 돌을 들고, 칼을 든 그들 가운데 분명 제 2의 바울이, 제3의 바울이 나올 것입니다.
여러분 특별히 터키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목숨을 걸고 순교하기 까지 충성하는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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