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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승리하는 인생을 사십시오 (롬 12: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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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승리하는 인생을 사십시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인생을 사는데 있어 승리를 원하지, 실패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패와 낙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패배에는 여러 가지 패배가 있습니다.  운동경기에서 조금의 점수 차이로 아깝게 지는 경우, 참으로 아슬아슬하게 지면 아쉽다고 하여 석패(惜敗)라고 합니다.  워낙 좋지 못한 시설이나 환경에서 연습하였고, 훌륭한 코치에게 지도받은 적도 없는데, 정말 잘 싸웠습니다.  그런데 심판도 그날따라 편파 판정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졌을 때는 분패(憤敗)라고 합니다. 그런데 축구 국가대표팀이 국내 경기에서는 잘한다고 했습니다.  역대의 트림 팀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약체라고 하는 팀에게 지는데 5대0이란 상상할 수 없는 스코어로 졌습니다.    그러면 신문에서는 “우리 축구 우물 안 개구리, 참패”라고 대문짝만하게 제목을 붙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는 이들 중에 다양한 분들을 보게 됩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였는데, 마지막 한 단계 올라서지 못하고 주저앉는 석패한 사람,  최선을 다한다고 하지만, 아직도 미흡한 사람들,  아예 교인이라는 간판을 떼고 세상으로 나가는 참패, 대패하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나는 결코 지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주저앉지 않는다.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해야 해, 지금까지 잘 하고 있는 거야! 내게 능력 주시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기에 나는 할 수 있다.” 라고 해야 합니다.  언어를 치료하고 언어를 바꾸십시오. 

현대 교회의 상징인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신 말씀이 두렵고 떨리는 경고로 받아들여집니다.  계시록3:17-18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진솔한 신앙의 정도를 모르고 있습니다.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심히 곤고한데, 가련한데, 가난한데, 눈이 멀었는데, 벌거벗었는데, 죽어 가는데  자기의 모습을 알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병입니다. 

예수는 믿는 것 같은데, 예수의 능력은 부인하고 대단히 종교성이 있어 보이는데 성령의 능력은 부인합니다.  구원이나 죽음후의 천국은 말하지만, 언제나 세상의 큰 것에만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는 큰대자병에 들었습니다. 

구세군 창시자 윌리엄 부스는 “장차 올 세기를 맞이할 가장 큰 위험이 무엇인가 하면 종교는 있으나 성령은 없고, 기독교는 있으나 그리스도는 없고, 속죄는 있으나 중생은 없고, 도덕은 있으나,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없고 천당은  말하나 지옥은 말하지 않는 시대적인 흐름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일은 나를 뛰어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있어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란 없을 것입니다.  중국의 왕양명이란 분은 말하기를 “산 중의 도적은 능히 쳐 이기기는 쉬우나 마음속에 있는 도적은 이기기가 어렵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지혜자들이 남긴 명언이 있습니다.  잠16:32에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노자는 인생을 깊이 생각하신 분입니다.  “남의 하는 일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이상으로 총명한 사람이다.  그리고 남을 설복시킬 수 있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이겨내는 사람은 그 이상으로 강한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알고 자기 자신을 이겨내는 사람이 진정 똑똑한 사람이요, 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아야 자신을 다스릴 수 있고, 자신을 뛰어넘을 수 있고, 이길 수 있습니다.  나의 능력이나 신념을 가지고는 자신을 이겨낼 수가 없고, 내게 능력 주시는 우리 주님 안에서 나를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인생을 승리할 수 있는 비결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라고 하는데, 사람은 혼자 광야에서 은둔하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용산구 안에 살고 있는 탈북자를 후원하는  ‘어울림 공동체’ 발족식에 참석하였습니다.  용산경찰서가 적극적으로 주관하고 선인중앙교회가 앞장서고 몇 몇 교회와 사회 단체, 그리고 하얏트호텔의 직원들로 구성된 자원 봉사단이 참여하여 어울림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우리 교회 서춘근집사님이 용산경찰서 보완과장으로 계시기에 저는 고문으로 참여하게 되어, 발족식에서 축사를 담당하였습니다. 우리교회 집사님이 경찰로 귀한 일을 추진하고 있어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행사 전에 탈북자 동지회장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시간 대화의 주제는 공식명칭에 대한 호칭 문제였습니다. 우리들이 탈북자들을 부를 때에 탈북자라는 말이 맞지만 듣는 사람이 거북할 것 같아서 북한이탈주민이라고 부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은 당연이 가야하는 대열이나 위치에서 이탈한 것이 아니고 북한이 싫어서 탈출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탈주민이란 말이 싫다고 답변서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정부에서 탈북자들을 ‘새터민’이라고 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탈북자들이 반대하였습니다.  새터민이라고 하니, 집도 절도 없어서 남의 터전에 붙어살자고 끼어든 느낌을 주므로 그 말도 싫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당하게 탈북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탈북, 자유를 찾아서, 억압이 싫어서, 인간의 존엄성을 찾기 위하여 탈출하였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축사하였습니다.  우리는 개신교회인데, 프로테스탄트라고 합니다. 항의자, 배반자라는 뜻인데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처럼 탈북자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탈북민들이 가장 어려운 것은 인간관계가 잘 형성되지 않고, 남한 사회에서 따돌림을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식구도 없지요, 혼자서 밤을 보낼 때에 두고 온 가족들이 보고 싶어서 죽을 지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밤마다 술로 지내는 이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남한 사회에 와보니 말이 다르지요.  가치관이 다르지요. 다른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소외감이란 참으로 무서운 질병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그들을 이해하고 같은 형제로 받아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그들에게 직업을 주고, 돈을 벌어먹고 살아가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 보다 앞서 우리의 가슴을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선족에게는 가슴을 잘 여는데 탈북자라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봅니다.  진짜 탈북자인가, 이중간첩 이수근이 같은 사람은 없는가?  그렇게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탈북자를 잘 보호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더욱 북한을 변화시킬 주역으로 활동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승리하기 위하여 좋은 인간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좋은 인간관계로 인하여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 것입니다.

오늘 승리하는 인생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인생을 승리하기 원하면 내가 먼저 좋은 인간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라고 하셨습니다.  14-15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들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 바르게 사는 것을 말씀하며, 먼저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어려운 명령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동해복수법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6)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을 얻을 수 있고 살릴 수 있고, 구원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를 위하여 축복해야 합니다.  이 명령은 참으로 어려운 주문이라고 봅니다.  세상에 어렵지 않은데 가치 있고, 위대한 일이 있는지 말씀해보십시오.  박해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이상 갚아주고 싶은 것이 사람이라면 누구나에게 가질 수 있는 심정이요, 사람을 대하는 태도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승리하기 원하시면 박해하는 사람에 축복하고 절대로 저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은근이 괴롭히고 폄하하는 사람을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아야 인생을 성공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이 나를 괴롭히다니, 너는 되로 주었으나 나는 말로 갚아주려고 하면 받고 갚아주고 다시 받았으니 되갚아주는 악순환은 계속되어 집니다.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야 합니다. 

여러분, 즐거워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즐거워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데, 어떻게 즐거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할 것입니까?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은 쉬울 것 같은데,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는 척할 수 있을지 모르나, 진정으로 함께 울어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까?  어려움을 이해하는 척할 수 있습니까?  그 어려움에 동참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어주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욥기를 읽을 때마다 욥의 친구들은 정말 욥의 친구들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욥이 재앙으로 죽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욥에게 찾아왔습니다.  데만, 수아, 나아마는 가까운 동리가 아니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세 사람이 약속하고 욥을 찾아왔습니다.  욥이 얼마나 고통 중에 있는지 욥인 것을 겨우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밤낮 칠 일 동안 욥과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면서 한 마디도 할 수 없어 묵묵히 함께 있어주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세상에 이런 친구들이 없습니다.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하면서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한탄하니까 그제야 친구들이 입을 열어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얻어맞았느냐고 회개하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친구가 되려고 하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인생을 승리하려면 높은 마음이 아니라 낮은 데 처할 수 있어야 합니다. 16절입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만났습니다.  주님으로 인하여 용서받았습니다.  우리는 같은 마음, 같은 생각, 같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형제와 자매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수준을 망각하고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는데 다 된 줄 알고 높은데 마음을 두게 되고, 스스로 지혜 있는 사람으로 자처하려고 합니다.  낮은 데 처하라는 말은 ‘겸손하라’는 말씀입니다.  인간관계를 말할 때에는 언제 겸손해야 합니다.  낮은 데 처하는 것은 예수님을 생각하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근본이 하나님과 같은 본체를 가지셨으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낮추셨으며,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바울은 권면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롬12:3)라고 하셨습니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잠3:7의 말씀을 반영하는 말씀입니다.  잠3:7에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네 눈으로 너를 지혜롭게 보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신에게 너무 많은 점수를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겸손을 강조하신 분으로 유명합니다.  “천사를 마귀로 만든 것은 교만이며 인간을 천사로 만드는 것은 겸손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벧전5:5에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은혜받기를 원하십니까?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는 악을 버리고 선하게 살라고 하십니다.  17절입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21절에서도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악하다고 하여 나도 악해질 것이 아닙니다.  악에게 지지 않고 이길 수 있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셨습니다.  이기면 지고, 지면 이기는 비결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이 세상이 악하다고 하여 나도 악하게 살면 악에게 지는 것입니다.  악을 이기고 인생을 승리하려면 선을 행하고 악을 선으로 갚아주어야 합니다.  우리 사람이 악의 고리를 끊으려고 하면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하셨습니다. 

도모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도모하는 것은 어떤 일을 이루려고 수단과 방법을 꾀하는 것입니다.  계획하고 실천에 옮기고, 좋은 결말을 얻으려고 힘써 행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18절입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시급한 일이라고 하여도 화목을 깨드리면서 해야 하는 그런 일은 없다고 봅니다.  화목하라고 했는데, 평화하라는 말씀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란 말은 우리는 평화를 창조하는 사람들이 되려고 힘써야 합니다.  골3:15절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하게 지낼 수 있어야 합니다.

마5:9에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화평을 창조하는 사람들, 피스메이커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먹이고 입히라고 하셨습니다.  19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 가운데 ‘드베르만’이라는 심리학자요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도바울의 심리를 심층 분석을 하면서 사도바울이 회심한 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에 먼저 스데반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 환한 미소를 띠고 천사와 같은 얼굴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죽어가는 그 모습 속에서 벌써 바울은 깨어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바울이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히 여기면서도 바울의 그 마음은 핵폭탄을 맞는 것 같은 그런 위력에 거꾸러뜨림을 당했다는 겁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들이 서로 갈등하고 미워하고 질시한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요셉이 억울하게 당하였다고 하여 형들에게 원수 갚았습니까?  오히려 그들을 먼저 용서하고 먹이고 입혔습니다. 진정으로 울면서 용서하였습니다.  창45:5에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라고 먼저 말합니다. 용서를 구하니, 용서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용서하는 것이 진정 용서입니다.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다윗이 왜 성군입니까?  그를 왜 존경하는 것입니까?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피하여 도망가고 있는데 시므이라는 사람이 따라오면서 욕을 퍼부었습니다.  시므이가 저주하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으니라” 중간의 이야기는 생략하고 시므이가 다윗 앞에 다시 무릎을 꿇었습니다.  다윗이 다시 왕으로 돌아왔으니 시므이가 다급해졌습니다.  다윗의 신복들은 시므이는 죽어야 마땅한 자라고 하는데도 다윗은 시므이를 용서하고 살려주고 죽이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그냥 넘어가고 나중에라도 죽이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님을 만나서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만을 모시고 인생을 복되고 보람 있고, 의미 있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낮은 자리에서 만날 수 있고, 자신이 낮은 자리로 내려가지 않고는 주님을 모시고 동행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 중에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말하고 있습니다.  “슬픔은 나누면 나눌수록 줄어지고, 기쁨은 나누면 나눌수록 커져만 간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가, 우리의 교회가,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일터가 우리로 인하여 화목하고 즐거운 일들로만 가득 찰 수 있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인간의 삶은 메아리와 같다고 합니다.  주는 대로 받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린 아이가 산에 올라가서 “야호”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니 “야호”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렇게 몇 번 하다가 계속해서 똑 같이 따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외쳤습니다. “따라하지 마”라고 소리쳤답니다.  “따라하지 마”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점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너 죽인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랬는데, 똑같이 “너 죽인다”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만 아이는 겁이 났습니다.  그는 산을 내려와 어머니에게 달려와 가슴에 안겼습니다.  아이의 말을 들을 엄마는 다음에 산에 올라가면 “사랑해”라고 외치라고 하였습니다.  아이는 그곳에 서서 “사랑해”라고 외쳤습니다.  그랬더니 “사랑해”라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기분이 좋게 산을 내려왔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 주신 말씀을 다 실천하신 분이요, 우리의 삶과 신앙에 좋은 본보기가 되셨습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포악무도한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라고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용서와 사랑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인생을 승리하기 위하여 첫째로 좋은 인간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좋은 인간관계는 좋은 언어 축복의 언어 속에 시작됩니다. 두 번째로 인생을 승리하려면 높은 마음이 아니라 낮은 데 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는 악을 버리고 선하게 살라고 하십니다.  네 번째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먹이고 입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인생을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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