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맥추감사절] 믿음으로 감사를! (눅 17:11~19)

  • 잡초 잡초
  • 204
  • 0

첨부 1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 중에 정말로 고마운 사람을 꼽으라면 과연 누구를 꼽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하여 주신 부모님도 고마우신 분들이요 나를 가르쳐준 선생님도 고마우신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보다도 우리가 가장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나로 하여금 예수님을 알 수 있도록 예수님을 전해준 사람일 것입니다. 그가 아니고서는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을 수도 없고 예수님을 어쩌면 영원히 믿지 못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고마운 사람을 말하라면 내가 힘들어 할 때 내가 아파할 때 나와 함께 있어준 사람입니다. 모두가 다 나를 비난하고 욕하며 외면할 때 오히려 내 손을 잡아 주었던 그 사람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가 있겠고 그 사람이 얼마나 고마운 사람인지 이는 그런 어려움을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너무도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픔이 없는 세상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그 누구도 아파하며 살아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왕이면 기쁘고 즐겁게 행복한 세상을 살고 싶은 마음이야말로 누구에게나 있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너무도 쉽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손해를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일 수도 있을 것이고 내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서 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어떤 오해 때문에 빚어지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가 없어서 아파하기도 하고 이루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결코 그 뜻을 이룰 수 없는 나의 한계 때문에 아파하기도 합니다. 남들과 비교해 볼 때 초라해 지는 자신을 느끼며 아파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내가 남들보다 더 뚱뚱하다는 것 때문이기도 하고 반대로 너무 말랐다는 것 때문이기도 합니다. 남들보다 수입도 적고 살고 있는 형편이 초라해서 아파하기도 하고 남들보다 많이 배우지 못한 것 때문에 아파하기도 하고 작은 키 때문에 아파하기도 합니다. 요즘이야 수술을 통해서 모습을 바꾸기도 하지만 남들과 비교해 볼 때 잘 생기지 못했다고 하는 마음 때문에 아파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아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아픔보다도 더 마음이 아픈 것은 외로움일 것입니다. 내가 어떤 큰 실수를 저질렀을 때 그래서 모든 사람이 나를 욕하고 비난하며 내게서 멀어질 때 그래서 더욱 내가 필요로 할 때 내 곁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것보다,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지만 누구 한 사람 나를 위로해 줄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물론 몸이 아파서 지쳐가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고칠 수 있다고 하는 희망이 있으면 다행이지만 거의 불치병에 가까운 병에 걸렸을 때 거기에는 그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 문둥병자 열 사람이 있습니다. 요즘은 문둥병자라고 하는 말조차도 상처가 된다고 해서 한센씨 병이라고 고쳐 부르고 있지만 이 병만큼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병도 없습니다. 물론 지금이야 치료가 가능한 병이요 상처를 통하지 않고는 결코 감염되지 않는 병이라고 많이들 알게 됐지만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문둥병은 세상의 많은 병중에서도 제일로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병이었습니다. 머리털이 빠져가고 눈썹이 빠져가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것은 아무 고통 없이 찾아와서 어느 날부터인가 얼굴도 흉측스럽게 일그러져 가고 손마디 마디가 떨어져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어디에 있을까요? 거기다가 일단 문둥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더 마음 아픈 것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더 이상 같이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저 고흥반도 남쪽의 소록도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골짜기로 들어가 같은 병에 걸린 사람들과 무리를 지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그 버려진 곳을 향해 집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야 하는 그 사람들의 아픔을 무어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그건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더 이상 동네에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마을 밖으로 쫓겨납니다. 그리고 광야에 토굴을 만들어 그 안에서 생활합니다. 간간이 가족들이나 누가 던져주는 먹을거리로 겨우 주린 배를 움켜쥐고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바로 문둥병자였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이 문둥병이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오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정도의 죄인이었다고 생각할 때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버려져서 이렇게 고통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물론 그들 가운데는 “그래 나는 이렇게 당해도 싸” 하고 자신을 인정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보다도 더 나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왜 하필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하면서 한없이 하나님을 원망도 하기도 하며 끝없는 좌절 속에 빠져 살 수밖에 없었던 그들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에게는 그 어떤 위로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니 위로해 줄 사람조차도 그들 가운데는 없었습니다. 행여나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가는 돌팔매를 당합니다. 그러니 사람이 그립기는 해도 저만치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싶으며 스스로 숨지 않으면 그나마 목숨보존도 어려웠습니다. 그러니 뭉그러져가는 자기의 모습보다도 사람을 만날 수도 없고 그 어떤 위로도 받을 수 없다고 하는 이 외로움이 더욱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입니다.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고 하고 스스로도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는 사람들의 이 아픔을 그 누가 위로해 줄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이렇게 관심 밖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곁에 없는 아니 스스로 누군가의 눈에 띌까봐 꽁꽁 숨어버린 채 아파하고 있는 사람들, 마음으로는 누군가를 간절히 필요로 하면서도 막상 누군가 내게 손을 내밀면 피해서 도망쳐버리는 사람들의 그 아픔을 누가 알아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그런 아픔들이 혹시 우리들 가운데도 있지는 않은가요? 다른 사람들과 가까이 있기를 마음으로는 원하면서도 다가가지 못하고 혹 누가 내게 다가오기라도 하면 도망쳐버리는 그 이율배반적인 마음을 누가 이해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게 지내는 사람들을 부러운 마음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는 그 사람이 혹시 나는 아니던가 생각해 봅니다. 왜 나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며 외로움 속에 몸부림치는 우리들에게 그 아픔을 무엇으로 달래줄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된 위로와 소망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런 아픔의 그늘 속에서 헤매는 우리들에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소망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 소망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버림받은 열 명의 문둥병자의 귀에 어느 날 들려온 한 가지 소식이 어둠 속에서 살아가던 그들에게 소망의 빛을 비쳐줍니다. 그것은 예수라고 하는 한 사람이 있어서 그에게 찾아간 그 어떤 병자도 다 고침을 받았다고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때 그들은 자기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모든 병을 다 고친다고 해도 문둥병만은 안 될 거야 지금까지 누군가가 문둥병자를 고쳐주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 “아니야 아람 사람 나아만의 문둥병을 엘리사 선지자가 고쳐준 적이 있잖아?” “하지만 그건 다 옛날이야기일 뿐이지 그 이후 그 누구도 문둥병을 고쳤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잖아.”

하지만 그런 저들의 다툼도 예수가 근처를 지나가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을 때 더 이상 계속될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그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한결 같이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혹시 사람들이 돌을 던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저 멀리 사라져 버렸습니다. 단지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 모른다는 절박감으로 그들은 그냥 자기들이 숨어 있던 곳에서 뛰쳐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저 멀리서 외칩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때 예수께서 멈춰 서시더니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저들은 정신없이 예수님의 말대로 그 자리를 떠나 제사장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대로 가다가 문득 자기들의 몸이 뭔가 달라진 것을 알게 됩니다. 아 글쎄 어느 틈엔가 자기들의 몸이 깨끗해져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던지 그냥 이리 뛰고 저리 뜁니다. 그리고는 소리소리 지릅니다. “야 내 몸이 깨끗해졌어” 문득 가족들이 생각이 납니다. 얼마나 보고 싶은 얼굴들인지 그들은 얼른 가서 그리운 얼굴들을 보고 싶은 마음에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뛰어갑니다. 왜 안 그러겠습니까? 그동안 자기들이 겪었던 마음 아픈 날들을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토록 자기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지긋지긋한 병이 나았습니다. 몸이 깨끗해졌단 말입니다. 그래 자기 길로 달려가다가 그들 중 한 사람이 문득 걸음을 멈춥니다. 그냥 가서는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자기의 병을 고쳐준 그 예수께 고맙다는 말씀이라도 드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한 사람이 다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는 기쁨의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립니다.

그런데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사마리아 사람으로서 하나님과는 담을 쌓고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더군다나 다른 아홉 명의 문둥병자는 다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는 몰라도 그 엄청난 벌을 받아 문둥병에 걸린 것을 생각해 보면 결코 바른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기는 얼마나 나은가 생각해 보면 자기는 더 못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기가 아직 하나님도 믿지 못했던 자기가 고침을 받은 것을 생각하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밖에서 누가 던져주는 빵 덩어리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던 그였으니 가진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만약에 그에게 지닌 것이 있었다면 다라도 예수님께 드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리는 것밖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습니다. 온 마음을 다 한 눈물의 감사였습니다. 그 마음으로부터의 감사를 예수님이 받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여기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를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바로 감사입니다. 다시 말해서 감사가 없는 믿음은 바른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믿음이야말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믿음인 것을 여기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우리를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감사가 없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감사가 없다면 그 믿음은 우리를 결코 구원으로 이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야말로 바로 감사가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것도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 사마리아 사람은 비록 가진 것은 없었어도 온 마음을 다해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을 큰 소리로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 우리들에게 이런 감사가 있습니까?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하면서도 우리들의 지닌 작은 재물조차도 주님께 드리기를 주저하며 계산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정말 마음으로부터 감사를 드리는 것이라면 온 마음을 다 담아서 드리는 감사라면 주님께 아까워서 드리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시간인들 아끼겠으며 물질인들 아끼겠습니까? 그리고 그 감사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라면 더욱 감사해야 마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온 마음을 다 담아 드리는 감사가 그래서 필요한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처럼 더 이상 사람을 피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더 이상 마음 아파할 이유가 없습니다. 더 이상 그리운 사람을 떠나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미안해할 것도 없습니다. 이제는 함께 하면 됩니다. 자신 있게 만나면 됩니다. 왜요?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감사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줍니다. 구원은 단지 우리 영혼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이여, 나는 그대의 영혼이 평안함과 같이, 그대에게 모든 일이 잘 되고, 그대가 건강하기를 빕니다.”라고 한 요한삼서 2절의 간구처럼 우리에게 모든 일이 잘 되고 또한 건강하게 살아가는 전인적인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주님 앞으로 나아올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 영혼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일이 잘 되고 또한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온 마음을 다 담아 하나님께 감사하는 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이 다시 돌아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하게 되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사람이 없단 말이냐?” 이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머지 아홉 사람은 비난을 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단지 그냥 가버린 아홉 사람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때 예수님은 너무도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나머지 아홉 사람도 구원에 이르기를 주님은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아홉 사람은 단지 가지들의 몸이 깨끗함을 받게 된 것에 너무 기뻐한 나머지 감사를 잊었습니다. 그 결과 몸은 나았지만 또 한 가지 구원이라고 하는 더 큰 선물을 예수님께서 준비하고 계신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은 너무도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다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바로 감사하는 믿음인 것을 우리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이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우리 주위에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감동하셔서 함께 구원의 자리에 있기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도록 우리 마음에 담아주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이 우리들의 가족이든 아니면 이웃이나 직장 동료이든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 하나도 잃지 않고 그들 모두가 다 구원에 이르기를 예수님은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 예수님의 마음으로 우리가 기도해야 하고 그들을 찾아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서 우리 자신이 바로 이런 구원의 자리에 온전히 자리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마치 집나간 자식이 아닌 집안에 남아 있었던 아들이 사실은 더 큰 탕자였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탕자와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그때 우리는 집 나갔던 자식을 비난하기를 서슴지를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런 내가 더 큰 탕자요 내가 바로 비난 받아 마땅한 사람은 아닌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내게 주님과 함께 있다는 그 사실에 대한 감사가 있습니까? 그 감사한 마음을 담아 주님께 날마다 감사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주님이 아파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아직 주님 앞에 있지 못한 우리의 가족이나 이웃들을 위해서 함께 아파하며 울며 기도해 본 적이 있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정말 주님의 마음으로 아파한다면 바로 그들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손을 내밀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위로와 격려를, 가진 것이 없어서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으로 도우며, 아파하는 사람을 치료받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기도하며 함께 아파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저 “힘들겠다, 아프겠다, 어쩌면 좋니?” 하고 입바른 소리 하나 하고 내 할 일 다 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그저 나 하나 먹고 살기에 바빠서 다른 사람들은 마음에 두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레위인과 나그네를 그리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하셨는지 그 마음을 헤아려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하지만 이제 우리는 다시금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아파해야 합니다. 먼저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여 주신 그 은혜에 큰 소리로 감사해야 합니다. 큰 소리로 감사한다는 것은 곧 나가서 내가 받은바 은혜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내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주님께 감사한다면 그들도 주님이 기뻐하시도록 주님 앞에 있도록 하기 위해서 찾아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눈물로 호소하는 것입니다.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함께 울 수 있어야 하고, 몸과 마음이 외롭고 아파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함께 울 수 있어야 하고, 함께 아파할 수 있어야 하며 그들과 함께 있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한단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무엇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와 같이 힘들어 하고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을 돌아보십시오.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눈물로 엎드리십시오. 그 아파하는 마음을 담아 그들을 찾아가십시오. 아니 나부터 어디서 내 첫 사랑을 잃어버렸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시고 바로 서도록 하십시오. 감사가 내 안에서 사라졌다면 그렇다면 나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먹고 사는데 바쁘고 세상살이의 재미에만 빠져있지는 않습니까? 너무도 신나는 세상에만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바로 그 감사를 잊고 자기 갈 길로 가버린 아홉 명의 문둥병자 중 한 사람이요 내가 바로 집안의 탕자인 것이요 내가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주님의 아파하는 마음 “그 아홉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는 그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주님이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고 말씀하실 수 있도록 그렇게 영육 간에 은혜와 복을 누리는 귀한 성도가 될 수 있도록 항상 주님께 마음을 담아 감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기뻐하는데서 그치지 마십시오. 항상 믿음의 간구를 드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이 열 명의 문둥병자에게 가장 고마운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물론 첫째는 그들의 병을 고쳐주신 예수님이 되겠지만 사실은 우리가 잊고 있는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알려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해 알려준 사람이 있었기에 그들이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예수님께로 뛰어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입니다. 소식을 듣고 뛰어나오고 안 나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책임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알려줄 책임과 의무가 우리들에게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무엇보다 내가 먼저 믿음의 감사를 주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하고 그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찾아 예수님에 대해 알려줄 수 있는 귀한 삶을 우리 모두가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