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가인과 그 제물, 아벨과 그 제물

  • 잡초 잡초
  • 823
  • 0

첨부 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여 가인과 아벨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소유' 혹은 '획득'이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아담의 장자 가인은 농사를 하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허무' 혹은 '덧없음'이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동생 아벨은 양을 치는 자였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모아 여호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동생 아벨은 하나님께 자신의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이것이 동기가 되어서 가인은 아벨을 들판으로 유인하여 돌로 쳐 죽이는 이른바 골육상해치사(骨肉傷害致死)의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동생 아벨의 비극이 아니라 형 되는 가인 가(家)의 비극이라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비극의 원인이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 제물을 받지 않으신데 있기 때문입니다.

Ⅰ. 가인과 아벨은 각각 자기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창세기 4장 3-5절에 『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 열납하셨으나 』라는 말 솨아( )는 주목할만한 가치 있는 제물을 말하는 것이고 莩酉?『 열납되지 아니했다 』는 말은 쳐다볼 가치조차 없는 제물이라는 말입니다.

1) 가인의 제사는 여호와 하나님께 열납되지 아니했습니다.

(1) 악한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3장 12절에 『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라고 했습니다.
아벨의 의로움이 살인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것은 구속사적으로 볼 때 선과 악의 첫 번째 대립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3장 15절에 예언한 선과 악의 대립입니다.

(2) 불신앙의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 『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2) 아벨의 제사는 여호와 하나님께 열납되었습니다.

(1) 의로운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3장 12절에 『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고 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동기는 동생 아벨의 행위가 의로움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를 시기하는 이유입니다. 가인은 스스로 자신이 마귀의 자녀인 것을 들어내게 된 것입니다.
유다서 1장 11절에 『 화 있을찐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라고 했습니다.

(2) 더 나은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 기록된 대로 '더 나은 제사'는 곧 믿음의 제사입니다. 아벨의 제사는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드린 거룩한 제사였습니다. 깊은 죄의식 속에 메시야의 구원을 대망하면서 소망 중에 드린 믿음의 제사였습니다.
우리 성경은 가인과 그 제물, 아벨과 그 제물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가인의 인격이 그 제물과 열납되지 아니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성실한 신앙인격이 가치 없는 제물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벨은 그의 성실한 신앙 인격이 가치 있는 제물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내면에 담긴 정직하고 순수한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마음이 담기지 아니한 제사와 헌신은 영원히 싫어하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3) 아벨의 피를 통해 그리스도의 피의 우월성을 보여줍니다.
히브리서 12장 24절에 『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고 했습니다.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죄 없이 죽은 아벨의 피를 대조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의 우월성과 가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벨의 무죄한 그 피는 저주와 관련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35절에 『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 가리라 』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1장 50-51절에 『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고 했습니다.

창세기 4장 11-12절에 『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과 축복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5장 8-9절에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9절에 『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의 중보이신 그리스도의 피의 우월성과 가치성입니다.


Ⅱ. 동생을 살해한 후에 가인은 하나님 앞을 떠났습니다.

본문 4장 16절에 『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땅에 거하였으니 』라고 했습니다. 역본에는 『 And Cain went out from the presence at the Lord 』라고 했습니다. 『 여호와의 앞 』은 리프네 여호와( )인데 그 뜻은 '여호와의 임재', '여호와의 존재', '여호와의 면전'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의 현대적인 의미는 자신의 말씀인 신구약 성경 66권이요, 말씀으로 그 심령에 역사하는 성령님의 역사현장입니다.

시편 139편 7-9절에 『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로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고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날개를 치며 바다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 계시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을 떠났다는 말은 돌아오지 아니했다는 말입니다. 더 적극적인 표현은 회개하지 아니했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4장 13절에 『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가 없나이다 』라고 한 것은 그가 회개하지 아니한 것이 증명됩니다.

이것은 가인이 죄를 아프게 여기지 않고 자기의 받을 벌만 무겁게 생각한 것입니다.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자기의 죄를 너무 중대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나머지 받을 벌은 문제 삼지도 않습니다.

요나서 1장 12절에 『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아노라 하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너를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하시고 표를 주어서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했습니다(4:15). 할레이는 말하기를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않았으나 그는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차라리 만나는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회개하여 하나님을 모셨더라면 그보다 다행한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Ⅲ. 하나님을 떠난 가인 가(家)에 인본주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을 떠난 가인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1) 성(城)을 쌓는 일입니다.
본문 4장 17절에 『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고 했습니다.
여기에 에녹은 므두셀라의 부친이자 육신으로 승천한 에녹이 아니라 가인의 장자 에녹입니다.
가인이 하나님을 떠나서 한 일은 성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그 성 이름을 장자의 이름을 따서 에녹성이라고 했습니다.
성은 보호수단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 성에만 관심을 두고 살았습니다. 이것이 가인가의 비극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하는 일은 성 쌓는 일입니다. 가인은 에녹성에다 가족의 행복과 명예를 걸었습니다.
오늘의 우리들의 에녹성이 무엇입니까? 부의 에녹성, 명예의 에녹성 등등의 오늘의 다양한 에녹성들은 사람의 마음에 일시적인 기쁨과 만족은 될지 모르나 인간을 궁극적으로 보호해 주지는 못합니다. 가인은 에녹성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리고 에녹성만이 자신의 보호수단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하나님을 떠난 비극의 사람들이 가지는 망가(亡家)의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본주의 에녹성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1) 성(性)적 타락이 있었습니다.
본문 4장 19절에 『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라고 했습니다. 에녹, 이랏, 무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이어지는 라멕은 두 아내를 두었습니다.
성적 타락은 가정의 비극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가 없고 성을 높이 쌓았으니 아무도 가인의 허락 없이는 못 들어오는 곳입니다. 공개되지 아니하는 성(城), 견제 받을 수 없는 성(城)입니다. 에녹성이 높이 올라가니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에녹성이 높이 올라가는 것과 이들의 만족도는 정비례되었습니다. 그러나 에녹성(城) 속에 파고드는 죄악은 에녹성(城)이 막지 못했습니다. 부와 명예와 지혜와 육신의 호조건으로 행해지는 성적 타락의 죄를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본주의 에녹성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2) 타락한 자가 악기를 잡는 조상이 있었습니다.
본문 4장 21절에 『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라고 했습니다. 유발은 이들 연주자의 지휘자격이었다고 주석합니다. 라멕이 노래한 히브리어의 흐름을 보면 무용을 자랑하는 노래입니다.

본문 4장 23-24절에 『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이 노래의 내용이 두 아내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이요, 결국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무신론자의 인본주의 노래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본주의 에녹성에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3) 타락한 자가 무기를 제조하는 조상이 있었습니다.
본문 4장 22절에 『 씰라는 두발 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인 동시에 에녹성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연을 지배할 권한을 주었습니다(창 1:26-28). 이것을 하나님의 문화적인 명령(Cultural mandate) 혹은 문화적인 사명(Cultural Mission)이라고 합니다. 문화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모든 행동양식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가인 가(家)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의 문화적인 활동이 중도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그 활동은 계속되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에 의해 개발된 문화적인 역량은 오히려 퇴폐적이고 외설적인 악기와 노래, 자신과 남을 파괴시키는 무서운 전쟁무기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만든 수많은 악기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로 사용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노여워하시는 죄악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 수많은 악기들 중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악기들은 그 수가 제한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상당수의 악기들이 죄악에 오염되어 버렸는가 하면 그곳에 익숙해진 악기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거룩성과 찬양의 거룩성 차원에서 오염된 악기를 사용할 수 없는 것은 교회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정서입니다.

세계적인 군사문제 연구기관인 스웨덴 스톡홀름 국제 평화 연구소(SIPRI) 발표에 의하면 지난 해 한국의 군사비 지출 총액은 219억 달러(약 20조3천670억원)로 세계 11위입니다. 미국이 전 세계 군사비의 46%(5천287억 달러)입니다. 특이한 것은 북한은 이미 핵보유국가로 인정하는가 하면 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아시아 1위(495억 달러)로 부상했습니다. 군사비 증가는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첨단화, 전문화, 기능화 되었다는 말로 통합니다.
하나님 앞을 떠난 가인 가(家)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2) 유물주의가 그 사상의 주가 되었습니다.
본문 4장 20절에 『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라고 했습니다.
가인성 안에서 육축에 성공한 사람이 야발인데 그들의 부한 생활이 야발 때문인 줄 알았습니다. 야발은 부의 상징이요, 야발은 교육의 목표였고, 야발은 사람들의 행복의 기준이며 이상형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부를 생각하고, 하나님을 떠나 권력과 명예를 생각하고, 하나님을 떠나 행복을 생각하는 것이 유물주의입니다. 공산주의자들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자본주의도 무신론주의 유물주의를 지향하는 공산주의 못지않게 기독교의 무서운 적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후예들이 판을 치던 부패한 세상을 버려둔 채 여인의 후손으로 이어질 거룩한 줄기로 셋과 에노스를 이 세상 무대에 등장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더 이상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형이 아우를 죽이는 끔찍한 타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며 아벨고 그 제물은 열납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나 하나님께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 없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범죄한 인간들은 하나님 앞을 떠나기를 좋아합니다. 타락한 이 시대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그 심령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근심되게 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인본주의가 극에 달하여 자기 자신의 힘으로 만족을 얻으려고 자신의 성을 높이높이 쌓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유물주의가 자신과 그 가족과 기업을 지배하는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어있는 것이 오늘 이 시대의 비극 중의 비극입니다.
절대 악과 절대 선이 아닐 때는 타협이 가능할지 모르나 가인의 길은 절대 악입니다.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욥기 12장 6절에 『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욥기 21장 7절에 『 어찌하여 악인이 살고 수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냐 』라고 했습니다.
잠언 21장 4절에 『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라고 했습니다.
잠언 24장 19-20절에 『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라고 했습니다.

초대 기독교 박해 300년은 니케아 회의에서, 중세 로마 카톨릭의 어두운 암흑기는 루터와 칼빈에 의해서, 미국의 퓨리탄들의 신앙은 오늘의 미국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벨, 셋, 노아, 아브라함, 야곱,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이사야, 세례 요한, 바울, 어거스틴, 루터, 칼빈, 메첸, 주기철, 손양원 목사로 이어지는 거룩한 신앙의 물줄기를 따라 도도히 흐르기를 원합니다.
가인과 그 제물이 주는 교훈은 패망입니다. 아벨과 그 제물이 주는 교훈은 축복입니다. (강구원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