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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쉴만한 물가 (시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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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만한 물가 (시편 23:2) 

지난주에 하나님을 참으로 ‘나의 목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는 상태가 됨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이제 2-3절은 부족함을 어떻게 채워주시는 지 구체적으로 표현되는데, 먼저 양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목자의 모습이 동영상처럼 펼쳐집니다.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푸른 초장”은 히브리 원어로는 ‘어리고 연한 풀’이라는 뜻입니다. 목자가 인도하는 곳은 메마르고 거친 땅이 아니며, 억세고 질긴 풀이 있는 곳도 아닙니다. 그래서 양은 편안히 누울 수 있습니다. “누이신다”는 말은 휴식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쉴만한 물가”는 위험한 급류가 아니라 물이 잔잔하게 흐르기 때문에 참 안식이 있는 물가라는 의미입니다. “인도하시는도다”는 말씀 역시 물 있는 곳으로 인도하여 그곳에서 쉬게 하다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2절에서 반복해서 강조된 것은 ‘쉼’입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인도하는 것 모두가 쉼의 이미지와 관련해서 언급됩니다. 시인은 목자 이미지를 가장 먼저 양으로 휴식하게 하는 존재로 묘사합니다. 동방의 목자들은 양떼들을 급하게 몰아가지 않았습니다. 강행군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한 방식은 양에게 굉장한 부담과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이었습니다. 목자는 꼴을 먹이기 위해 인도할 때나 물을 마시도록 인도할 때나 언제나 양떼가 충분히 쉴 수 있도록 배려하며 천천히 인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양떼에게 근본적으로 쉼을 주시는 분이시며 쉼을 주기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모아, 마치 훈련소 교관처럼 정신없이 뺑뺑이 돌리면서 스파르타식으로 강하게 훈련해서, 주의 일을 많이 시키려는 분이 아닙니다. 이사야 40:11절은 “그는 목자 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명을 주실지라도 근본적으로 쉼을 누리게 하시며, 참 안식 가운데서 먹고 마시게 하시는 분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가는 교인들을 보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불신자가 있습니다. 일요일이면 모처럼 늦잠을 즐길 수 있고, 푹신한 소파에서 재미난 TV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는데, 그 귀한 휴일을 몽땅 교회에 바치고 고생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교제하는 가운데 오히려 참 쉼을 누립니다. 주님 안에서 쉼을 누렸기 때문에 성도의 얼굴에는 생활에 찌든 모습이 불신자보다 적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누구보다 수고한 사람이었지만, 죽지 못해서 그리한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안식하면서 기쁨과 은혜 가운데서 그리했습니다.

양에게 있어서 쉼을 주는 것은 근본적으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 자체가 아니라, 그를 그곳으로 인도하는 목자입니다. 아무리 초장이 푸르고, 물가가 쉴만해도 목자가 없다면 양은 곧 평안을 잃고 불안한 상태에 빠지겠지요. 재미난 장난감이 가득 있어도 엄마가 없으면 금방 무서워하며 우는 어린 아이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근본적으로 쉼을 주시는 분은 목자이지만, 그분께서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를 양에게 실제로 제공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본문을 영혼의 만족과 영적인 쉼의 의미로만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뜻입니다.

양에게 있어서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라는 것은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인도하실 때도 영혼의 문제와 함께 인간의 육체가 필요로 하는 의식주 문제까지 돌아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영혼만 만족시켜 주시므로, 나머지는 알아서 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의 문제만 다스리신다면 육체는 누가 다스린다는 말이 될까요? 대번에 이상해지지요. 하나님께서는 내 영혼의 목자이시면서 동시에 내 육체의 목자이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하늘만 바라보는 종교가 아니라 참으로 땅도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입니다. 내세만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생생하게 현실적인 종교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초월하시는 동시에 인간의 삶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함께 인성도 동시에 강조합니다. 소위 영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나 물질적인 것은 내가 알아서 채워야 한다면,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는 배부른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만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이 고백은정신적인 만족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만족을 경험한 사람의 시입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과 기복신앙의 문제점을 지적받다 보면, 마치 기독교는 항상 정신(관념)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육체의 욕망’을 제어하라는 말씀을 ‘육체’ 자체를 부정하게 여겨야 할 것처럼 오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간혹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영혼과 육체를 구별해서 설명하기도 하지만,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뚜렷하게 분리하는 이원론은 성경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인간의 영혼과 육체라는 것이 죽음이 갈라놓기 전에는 분리되지 않는 단일체이기 때문입니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힘든 것처럼, 육체가 영혼에 영향을 미치고, 정신적인 것이 육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영혼의 문제가 따로 있고 육체의 문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영역 모두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진정한 쉼을 위해서는 영혼의 양식뿐만 아니라 육체의 양식 또한 충족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당면한 현실적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채워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실질적으로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에 대한 살아 있는 믿음이 있을 때, 그도 하나님의 뜻에 실질적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막연히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실 것이라는 관념만 가지고 있다면, 그런 추상적인 믿음으로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순종한다든지, 구체적으로 포기한다든지 하기 어렵습니다.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일에서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생생하게 믿지 못하면서, 무슨 근거로 보이지 않는 내세와 영혼의 문제를 채워주실 것을 생생하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따르는 양떼를 언제나 풍성한 꼴을 먹이시고 충분히 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고백은 하나님께서 넉넉하고 풍성하게 채우시는 분이심을 말합니다. 그분은 항상 빠듯하게, 말 잘 듣도록 길들이기 위해서, 안 죽을 만큼만 주시는 깍쟁이가 아니십니다. 고린도전서 9:9-14절을 보면 바울이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된 모세 율법을 인용합니다. 아무리 소라고 해도 수고만 하고 먹지 못하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바울은 이 구체적인 하나님의 채우심에 근거해서 신령한 것을 뿌리는 복음 전파자들 역시 육신의 필요를 뿌려진 자들로부터 거두는 것은 정당하며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주의 명령임을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이 되지 않으려면, 구체적인 현실의 필요들을 채우시는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종종 받은 복을 구체적으로 세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세심하게 그리고 풍성히 채워주셨는지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구체적으로 주신 은혜를 헤아려보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깍쟁이처럼 꼭 필요한 만큼만 주시는 분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얼마나 섬세하게 그리고 풍성하게 채우셨는가를 깨닫고 감격하며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우리 시대 여느 아이들처럼 하고 싶은 것 제대로 못하고 먹고 싶은 것 제대로 먹지 못하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하고 싶고 먹고 싶은 것들에 대해 속으로 껄떡거릴 때가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품위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풍성히 채워주셨습니다. 꿀단지 집에 두고 먹는 사람을 부러워했더니 그 때부터 집에 꿀 떨어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여유 있게 찜질방 다니는 사람 부러워했더니 일 년 동안 원 없이 찜질방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공부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공부 잘하는 사람 부러워했더니, 희한하게도 공부 잘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셔서 수석 졸업하게 하셨습니다. 돈이 없어도 필요할 때면 까마귀를 통해 물어 주셨습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말씀이 그냥 듣기 좋은 문구가 아니라 그에게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껄떡거리던 것들이 채워지고 나면 그것들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구체적인 채우심을 통해서 그의 속에 이루시는 것이 있습니다. 참으로 의미 있는 하나님의 뜻들을 소원하게 하시고, 그 뜻에 헌신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준비시키십니다. 또한 막연히 뜬 구름 잡듯이 하늘만 보고 신앙생활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믿고 순종하도록 하십니다. 탐욕이 아닌 한, 그리고 굶겨야 할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지 않는 한, 넉넉히 채워주실 것을 믿고 담대하도록 하십니다. 참으로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므로 사망의 골짜기라도 따라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십니다.

목자는 분명한 방향과 목적지를 알고 양을 인도합니다. 초장과 물가에서 한 번 배불리 먹고 쉬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필요한 환경과 소용들을 제공하시는 것도 그저 행복하고 평안하게 살게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이루시려는 뜻이 있고, 그를 통해 맺으시려는 열매가 있으며, 그를 최종적으로 인도해 가야할 곳이 있습니다. 매 순간, 모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게 살아감으로서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부터 잘 드러내며 완성해가기 원하십니다. 주께서 주신 쉼 속에서 그 분의 뜻을 날마다 좇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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